[실록 민주화운동]민청학련 사건

1973년 10월2일 오전 11시 서울 문리대 강의실 복도에서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학생들이 뛰쳐나왔으나 그 어디에도 불은 없었다. 이어 일단의 학생들이 웅성대는 학생들을 교내 4·19기념탑으로 인도하고는 곧 이어 비상 학생총회를 선포하였다. 유신 이후 침묵만을 강요당한 지 1년여 만에 최초로 유신 반대시위가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은 이날 “사회에 만연된 무기력과 좌절감, 불의의 권력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 모든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기만을 단호히 걷어치우고”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였다. 이날 시위로 20명이 구속되고 57명이 2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일 서울법대, 5일 서울상대의 데모 이후 소강상태에 빠졌던 학생들의 유신 반대시위는 11월5일의 경북대 데모, 서울사대 동맹휴학을 계기로 전국의 각 대학으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학생들은 데모뿐 아니라 동맹휴학, 시험거부, 검은 리본 달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유신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계속되는 학생들의 유신 반대운동은 이제 구속과 제명으로도 어쩔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결국 12월7일 박정희는 백기를 들고 구속학생을 전원 석방하는 등 모든 처벌을 백지화하였다. 그러나 그런다고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신이 철폐되지 않는 한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12월24일 함석헌·장준하·백기완 등 각계 민주인사들은 서울 YMCA회관에서 ‘현행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한 다음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서명운동은 전국 도처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유신을 철폐하라는 전국민적 압박에 직면한 박정희는 마침내 74년 1월8일 유신헌법의 비장의 칼인 긴급조치를 선포한다.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은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은 물론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하는 행위도 금지하고 아울러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까지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하고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그 재판은 비상군법회의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긴급조치로도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유신반대 열풍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미 74년 초부터 학생들의 개학기에 맞춘 3·4월 위기설이 폭넓게 유포되고 있었고 실제로 71년 위수령으로 군대에 끌려갔다가 제대후 복학한 그룹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유신 반대운동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유인태(현 청와대 정무수석)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긴급조치 1호는 학생들로 하여금 한층 비밀스럽게, 그리고 한층 조직적으로 활동하도록 부추겼을 뿐이다. 긴급조치 1호가 떨어진 이상 여기에 과감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은 학생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러 대학이 한꺼번에 시위를 벌이지 않으면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불철주야로 뛰어다닌 결과 2월 하순에 전국 대학간 연결이 거의 완료되었다. 이철이 현장 전체를 책임지고, 정문화가 서울대 내 각 단과대학의 연결을, 황인성이 지방대학과 이화여대의 연결을 각각 맡았다”

그러나 이미 이들의 동향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던 정보당국이 서중석 등 주모자급 학생들을 3월28일부터 검거하기 시작하고 이를 눈치챈 이철·유인태 등이 잠적하면서, 정작 선언문에는 ‘전국청년학생’이라고 하였지만 거사 당일인 4월3일 문리대에서 데모에 참여할 수 있었던 학생은 겨우 70~80명 정도였다. 교정에는 이미 200여명의 사복형사들이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유신 철폐’ 등의 구호를 몇 번 외치고 전원 연행되었다. 다른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국의 청년학생을 조직해 유신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겠다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계자들의 구상은 이렇게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호시탐탐 유신 반대운동을 잠재울 기회를 엿보고 있던 박정희는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상황이 이미 종료된 4월3일 오후 10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총 11개 항의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과 관계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관계자들을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처단하며 그 형량도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한다는 전대 미문의 야만적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잠적한 이철·강구철·유인태 등에게는 2백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당시 간첩신고 포상금이 30만원이었음) 전국에 지명수배하였다. 민청학련을 주도했던 학생들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유인태에 의하면 지명수배되어 이철과 함께 도피 중 현상금이 2백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이 돈이 한 사람당 2백만원이냐, 아니면 모두를 합해 2백만원이냐를 놓고 논쟁까지 하였다고 한다.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사건은 서도원·도예종 등 인민혁명당(인혁당)계 지하 공산세력, 조총련 계열, 일부 종교인 등 국내 반정부세력과 결탁하여 반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유혈 폭력혁명을 통해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과도 연립정부를 거쳐 궁극적으로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한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박정희의 의도는 뻔했다. 이 기회에 일체의 반유신 활동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에 의한 불순활동으로 몰아 일거에 뿌리뽑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의 사주에 의한 책동으로 몰기 위해 인혁당 관계자에 대해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 김지하에 의하면 인혁당 관계자 하재완은 “창자가 다 빠져나와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이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민청학련 관계자에게도 고문이 가해졌다. 유인태에 의하면 저들은 처음에는 소위 ‘인혁당의 학원담당책’ 여정남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지령했다고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안 가서 이번에는 거꾸로 여정남으로부터 모든 것을 지시받았다고 쓰라고 했다. 유인태가 “그 사람이 나이는 많지만 서울의 학생운동 사정에 어두운데 무슨 지시를 받는단 말입니까?”라고 항의하자 “이 새끼야, 잔말 말아. 그래도 선배잖아!”. 폭력혁명의 증거물로 제시된 것 또한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박카스병과 페니실린 병으로 만든, 그러나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한 화염병이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총 1,024명을 수사하여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에 송치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재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인혁당 관계자 8명에 대해 사형선고가 내려졌을 뿐 아니라 유인태·이철·김병곤 등 민청학련 관계자 6명에 대해서도 사형이 선고되었다. 관계자 대부분이 무기징역이나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졌다. 참고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였던 손병희가 일제로부터 받은 형량이 징역 3년이었다.

그러나 사형, 무기가 횡행하는 살벌한 재판정에서도 피고인들은 전혀 굴하지 않고 유신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주장하였다. 서울 상대생 김병곤은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자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다. 변호사 강신옥은 “나의 심정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받는 편이 더 편하겠다”는 요지로 변론하다 세계 사법사상 초유로 법정구속되었다.

74년 8월23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 4호를 해제하였다. 그러나 구속자들은 석방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서 학생들의 단순 데모사건을 무리하게 각계가 총망라된 대규모 국가변란기도 사건으로 조작한 데 대한 뒤탈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교 지학순이 구속되자 천주교가 반유신 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박형규 등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도 합류하였다. 연일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개최되었고 때로는 신·구교 합동으로 열리기도 하였다. 학생들도 연일 구속된 동료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데모를 벌였다. 11월27일에는 종교계, 학계, 법조계 등 각계 인사 71명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박정희가 엮으려고 했던 대로 진짜 각계가 망라된 반유신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박정희는 75년 2월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찬성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구실로 이튿날인 15일 민청학련 사건 관계자들을 석방한다. 공산주의자의 사주에 의한 국가변란기도 사건 치고는, 그리고 사형·무기 운운했던 것 치고는 참으로 싱겁게 끝나고 만 것. 그러나 관계자 전원이 석방된 것은 아니었다. 유인태·이현배·이강철 등은 당시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후 몇년 더 감옥에 있어야 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의문사진상규명위 사무국장)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이재국·김재중(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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