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9)발굴 30돌 ‘천마총’下

1973년 여름. 전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고 민심마저 흉흉했다. 경주에서는 멀쩡한 신라왕릉(천마총)을 발굴해서 하늘이 노해 비를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급기야 경주김씨 종친회 노인들이 발굴현장을 방문해 발굴조사를 중단하라고 법석을 떨었다. 어떤 노인은 현장에 드러누워 떼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시민들 사이에는 “데모라도 해서 발굴을 막자”는 여론도 비등했다. 속설에 왕릉을 발굴하면 액이 따른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 미스터리](9)발굴 30돌 ‘천마총’下

“뜻밖에 금관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너무나 놀라 말문이 막혔어요. 가슴이 얼마나 쿵쿵 뛰는지…. 무엇에 홀린 듯 멍하니 있었어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김동현 발굴단 부단장에게 살짝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금관이 나왔어요’ 했죠. 그분 역시 놀랐는지 ‘무슨 금관이야. 사람 놀리는 거야’ 했어요. 그분도 귀를 의심했던 거지요”

분명 틀림없는 순금의 황금보관이 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보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발짝 떼는 순간…. 그 때까지도 가뭄의 뙤약볕이 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던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순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꽈다당”. 유물 상자를 옮기려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놀라 혼비백산, 금관을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

갑작스런 하늘의 조화에 잔뜩 겁을 먹었던 조사요원들은 폭우성 소나기가 진정하자 조사하던 무덤 내부로 돌아가 작업에 나섰다. 그런 다음 금관 상자를 안전하게 무덤 밖으로 옮기자 그렇게 무섭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평상대로 맑게 개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금관이 출토되고 난 이후부터는 유언비어도 사라지고 아울러 가뭄도 해소됐다는 것이다.

◇과학으로도 밝힐 수 없는 고고학=그러나 문제는 무덤의 주인공이었다. 결정적인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결국 무덤 주인을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조사는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기 위해 하는 작업이 아니다. 명확한 증거물이 나온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선의 연구를 통해 접근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연구자의 몫이 된다. 무엇보다도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나 하는 것을 알면 그만큼 주인공을 추적하는 데 좋은 단서가 된다.

천마총에서 수습된 나무곽의 목질 편을 시료로 해서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방사선분석실에서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을 시도해 보았다. 이때 얻어진 결과는 서기 340년 전후의 어느 시기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과학적인 연대측정에서도 오차가 ±70년이나 됐다. 무려 140년의 폭에 해당되기 때문에 서기 270~41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됐다. 이 측정법은 당시만 해도 선사시대의 경우에는 유용했다. 하지만 10년의 차이가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역사시대에는 오차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져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어쨌든 당시 너무 큰 오차 때문에 신뢰할 수 없어 재래적인 방법으로 유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이 무덤이 서기 5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후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천마총의 조성연대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를 벌인 결과 지금까지 서기 460년에서 540년 사이에 무덤이 조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타계한 임금은 서기 458년 눌지왕(訥祗王), 479년 자비왕(慈悲王), 500년 소지왕(炤知王), 514년 지증왕(智證王), 그리고 540년 법흥왕(法興王) 등 다섯 분이다.

◇천마총 주인공 후보들=그렇다면 누구일까. 먼저 제19대 눌지왕? 그는 쿠데타로 전왕인 실성니사금(尼師今)을 살해하고 임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마립간(麻立干) 임금이 되었으나 42년간 재임하면서 이렇다 할 치적이 없었다. 다만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했고 왕위의 부자상속을 확립했다.

20대 자비왕? 눌지왕의 장자로 재위 22년간 성을 많이 쌓아 국방에 힘썼다. 지금의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도 이때 축성됐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 수도인 하남위례성을 침범하자 백제를 돕기 위해 군사를 냈지만 이미 개로왕(盖鹵王)이 전사하는 바람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21대 소지왕은 자비왕의 장자로 역시 22년간 재위했으며 최초로 시장을 개설, 상업활동을 장려했다.

22대 지증왕은 재위 기간이 13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치적이 많았던 임금이다. 임금이 죽으면 함께 묻는 순장(殉葬)을 없애고 나라이름을 신라(新羅)로 부르게 했다. 그리고 임금을 마립간이라 부르던 것을 왕으로 부르게 했고 국가의 체제를 일신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 마지막으로 23대 법흥왕은 재위 27년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공포해 국가의 법체계를 확립했고 불교를 국교로 공인하여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가야국을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의 비옥한 영토를 확보했다.

◇지증왕이냐, 자비왕이냐=이처럼 어느 임금이나 할 것 없이 나름의 치적이 있어 분명 무덤에는 금관이 묻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추론해보면 지증왕일 가능성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우선 천마총 출토 유물의 전체적인 성격이 국가의 비약을 나타내고 있다. 칠기에 그려진 그림 가운데 광배(光背)형태나 불꽃문양(火焰文) 등은 중국 북위(北魏)의 영향을 받은 6세기 초기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백제 무령왕릉(재위 501~523년)의 유물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서기 514년에 타계한 22대 지증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에 반해 왕이 숨진 해와 달의 기록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숨진 당시 1개월간의 해돋이 각도를 컴퓨터로 추적해 그 각도를 이용하여 분석한 결과 서기 479년에 타계한 20대 자비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한 결과로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다. 올해로 발굴조사 30년을 맞이했지만 천마총에 대한 연구는 그 이상의 진전이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경주 고분공원 내의 고 신라 무덤을 보다 새롭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조사할 기회가 마련되면 지금까지의 연구로 축적된 노하우로 조성연대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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