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6·18 최루탄 추방대회와 6·26 평화대행진

6월항쟁 전 과정을 국민과 함께한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연세대 2학년 이한열이었다. 6·10 국민대회 하루 전날인 1987년 6월9일 오후 5시 그는 ‘범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가, 교문 앞까지 진출했다. 건너편 길에서 전경들이 SY44탄을 무차별 대량 난사하자 학생들은 교문 안으로 몸을 피했다. 우박같이 쏟아지는 최루탄 중 직격탄 하나가 이한열의 머리를 때리는 순간, 그는 의식을 잃었다. 응급실로 실려간 그는 의식불명의 뇌사상태에 빠진 채 이후 27일간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최루탄’ 문제를 정국의 키워드로 올려놓게 된다.

전국에서 부상자가 속출하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6월11일 문동환·한승헌·성내운 등을 주축으로 ‘최루탄 희생자 대책위원회’를 구성, 최루탄의 폐해를 홍보하는 공청회를 열고 지역별로 최루탄 추방대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민가협 등 여성단체는 그 제조회사가 삼양화학으로 소득세 순위 4위에 이를 만큼 고소득을 올리고 있음을 추적해 폭로하고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했다.

[실록 민주화운동] 84. 6·18 최루탄 추방대회와 6·26 평화대행진

이미 16일부터 시민 봉기의 형태로 확전을 거듭한 부산에서는 18일 가톨릭센터를 거점으로 대청동·충무동·남포동 일대를 2만여 시위대가 장악하고 인근 공사장의 철근·벽돌 등으로 최루탄에 격렬히 대항했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 호헌철폐’라는 4·4조 음율의 함성과 함께 촛불을 들고 범일고가와 좌천동고가를 향해 전진했다. 경찰 저지선에서 비오듯 최루탄이 쏟아지고 연무가 자욱한 가운데 최루탄을 맞은 시민 이태춘이 고가에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기세는 마침내 저지선을 뚫고 KBS를 화염병으로 공격해 집기 일부를 태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도 시민 문철수가 직격탄을 맞고 이후 실명하게 된다. 시위는 밤새도록 계속돼 경찰 저지선이 여러 곳에서 무너졌다. 다음날 동틀 때까지 이어진 철야 시위에 외신들은 경악했다.

대구에서는 명덕로터리, 반월당, 대한극장 등 중앙통을 중심으로 시위대와 경찰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남산동·삼덕동 파출소가 전소된 것을 비롯해 경찰서장 차가 불타는 등 경찰이 주 공격대상이 됐다. ‘부모 형제에게 최루탄을 쏘지 마라’는 플래카드조차 최루탄에 맞아 찢겼다.

광주는 10일 이후 산발적으로 시위가 이어져 오던 중 이날 충장로 무등극장 앞에서 전남대생 중심의 대오에 시민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시위 열기가 시내 전역으로 확산됐다. 7만여명이 참여한 이 대오는 조를 바꾸면서 20일 아침까지 계속됐다.

이날 밤 일본의 주요 언론들이 그때까지 외신면 머리로 보도하던 한국 관련 기사를 일제히 1면 머리기사로 올리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 도쿄에 주재하고 있던 세계 언론사 특파원들이 일제히 한국으로 들어왔다.

국본은 심각한 고민에 직면했다. 80년 5·18의 악몽을 떠올리면서 위기감으로 고통스러워 했지만, 전국의 시위는 이미 국본의 지휘를 벗어나 지역적으로 각개약진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18일 이후부터 계엄설과 모종의 비상조치설이 광범하게 유포됐다. AFKN 방송 자막에 ‘외출 금지’ 공지가 흘렀다. 언론사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전하는 청와대 기류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징후들은 계엄의 조짐으로 해석될 만도 했다. 야당가에는 구체적으로 20일 새벽 4시 D데이설이 퍼졌다.

국본에 참여한 상도동(김영삼계)과 동교동(김대중계) 측에서 신중론을 제기했다. 자칫하면 대규모 희생을 부를 수도 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었다. 19일 밤, 남산이 바라보이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꼰벤뚜알 수녀원. 비밀리에 열린 국본 회의는 시종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마라톤 회의 끝에 이들이 채택한 것은 또 한번의 반격 카드였다.

전두환이 4·13 호헌선언 철회, 6·10 관련 구속자 및 양심수 전원 석방, 집회·시위와 언론자유 보장, 최루탄 사용 중지 등을 즉각 수용하지 않으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을 벌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부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22일에 이르러서야 24일 여야 영수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신민당 내 상도동·동교동 세력은 여야 영수회담에서 획기적인 민주화 조치가 있을 것 같으니, 대규모 평화대행진 계획을 유보하자고 제동을 걸었다. 22일 밤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따 수녀원에서 국본은 다시 공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 연석회의를 철야로 진행했다.

온 국민의 시선은 여야 영수회담으로 쏠렸다. 4·13 호헌 철회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23일과 24일은 전반적으로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집을 포위하고 있던 경찰 병력이 철수함으로써 김대중은 오랜 연금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전두환·김영삼간 영수회담에서 진전된 내용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의 날이 밝았다. 경찰은 전국 34개 지역에 6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서울 도심 7개 집결지에는 2만5천 병력으로 차단망을 구축했다. 그리고 특별정예부대 3개 중대를 긴급 편성해 격렬 시위가 예측되는 광주 전남도청 등지로 급파했다.

“침묵하고 있던 다수가 독재의 편이 아니라 민주 국민임을 확인했습니다. 지금 시기는 독재권력에게는 위기이지만 국민에게는 민주화의 기회이자 희망입니다. 이 도도한 행진을 홀로 가로막으려는 독재권력은 마침내 우리 국민의 민주헌법쟁취 행진에 함몰되고 말 것입니다.”(국본,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국본은 국민 행동수칙과 함께 부도심지 집결 전략을 제시했다. 서울의 경우 마포·강서구 주민은 동대문, 용산·동작·관악구는 시청, 은평·서대문·종로구는 안국동, 영등포·구로구는 영등포역 앞 등으로 정했다. 이 결과 본대회 장소는 파고다공원이었지만 서울 시내는 동시다발의 시위행진으로 뒤덮였다. 붉은 머리띠에 흰장갑 차림의 대학생들이 맨앞에 섰지만 참여자의 대부분은 시민들이었다. 시민들은 국본의 행동수칙대로 평화원칙을 준수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여성들이 색도화지에 구호를 적어 아코디언처럼 접고 펼치는 것을 반복하면 지나가던 차량은 경적을 연달아 울렸다.

최루탄 직격탄을 맞은 이태춘이 24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교구의 신부와 수녀, 신자 등 3,000여명은 이날 중앙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를 봉헌한 뒤 거리로 나섰다.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항쟁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대구·울산·포항·마산 등 영남의 대도시는 물론 진해·거창·안동·영천 등 중소도시에서도 서울과 비슷한 행진이 동시다발로 솟구쳐 올랐다.

호남의 도시에서도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광주·전주·목포·순천·여수·이리(익산)·군산 7개 도시에 60여만명이 모여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함성을 울렸다. 특히 광주는 80년 5월 이래 가위눌려 왔던 5·18의 참혹한 악몽으로부터 삽시에 깨어났다. 밤 10시쯤에는 광주 시내 전역에 30여만명이 운집, 광주 역사상 최고 시위 인파를 기록했다.

대전·청주 등 충청권과 춘천·원주 등 강원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누대로 친여적인 도시인 춘천에서는 20여분간 학생들이 강원도청을 점거해 전두환의 사진을 떼어내 팽개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주에서는 격렬한 시위 와중에 석교·영운파출소 등이 불탔다. 반도의 남쪽 끝 제주에서는 학생들이 거리 포장용 롤러 차량을 밀고다니며 경찰과 맞섰다.

경찰력은 중과부적으로 여러 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했다. 전국의 파출소 29곳과 경찰서 2곳, 민정당 지구당사 4곳이 불타올랐다. 경찰은 축소 보고에 여념이 없었지만 6·10대회의 3배가 넘는 인원인 1백만여명이 이날 평화대행진에 참여했다.

경찰력은 명백히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국민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물리력은 계엄군밖에 없었다. 80년 5월, 전두환은 3개 공수여단으로도 인구 70만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철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6월항쟁은 고립된 한 도시에서가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진행되고 있었다. 일선을 비워둔 채 전군을 시위 진압에 투입하지 않는 한 6월의 행진을 제압할 방안은 없었다. 게다가 국민들은 계엄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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