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화백 “둘리의 인기는 바로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죠”

유인경 선임기자

26년만에 TV 돌아온 ‘아기공룡 둘리’

꽃미남도 아니고 갑자기 등장한 신인스타도 아닌 돌아온 아기공룡 한 마리가 텔레비전 시청시간의 사각지대를 없앴다. 1983년 만화잡지 ‘보물섬’에 연재를 시작, 87년 KBS에서 만화영화로도 방영된 <아기공룡 둘리>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1월부터 SBS TV에서 매주 목요일 오후 4시에 방영되는 둘리는 돌아오자마자 옛명성을 되찾았다. 그 시간대에 방영되는 만화영화나 다른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1%, 혹은 0.5% 정도로 애국가나 화면조정 시간의 시청률보다 낮지만 둘리는 4%를 기록했다. 특히 만화영화전문 채널인 투니버스에서 특집 프로로 방영되었을 때는 케이블채널로서는 경이적인 4%란 시청률을 자랑했다.

김수정 화백 “둘리의 인기는 바로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죠”

이미 만화, TV 만화영화, 극장 만화영화, 뮤지컬로 제작되고 캐릭터가 담긴 상품만 20여년간 2000여종이 만들어졌으며 만화 주인공으로는 최초로 주민등록증까지 발급받은 둘리. 양볼이 볼록하면 ‘둘리’란 별명을 얻을 만큼 둘리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처음 만화책으로 둘리를 만났던 청소년들은 이제 30, 40대의 중년층이 돼 둘리를 구박하는 고길동 아저씨에게 더 애정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젠 그 아이들이 둘리를 친구로 받아들인다. 이번 TV 애니메이션의 대본 집필부터 제작까지 모든 분야를 책임지는 총감독을 맡은 둘리의 원작자 김수정 화백(59)은 이런 성공이 기쁘면서도 방영시간대며 정부 측의 만화시장에 대한 무심함에 서운함도 크다. 김 화백은 “이번 애니메이션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에만 시달리는 대한민국 어린이들에게 꿈과 재미를 선물하려고 만든 것”이라면서도 “한국의 가장 인기있는 만화이자 대표적인 캐릭터인 둘리가 실패한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내일도 없고, 집사람에게 애걸복걸해 제작비를 마련한 내 미래도 막막하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만화 주인공 하나 잘 만들어 평생을 따뜻하게 산다고 부러워하지만 ‘아기공룡 둘리’를 지금껏 국민 캐릭터로 살리기 위해 김 화백이 기울인 노력도 만만치 않다. 김 화백을 역삼동 ‘둘리나라’ 사무실에서 만나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은 아기공룡 둘리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이유, 그리고 한국에서 만화가로 사는 법에 대해 들어봤다.

가장 둘리다운 둘리로 만들었다

-시청자들이 둘리의 복귀를 반기면서도 ‘요리 보고 조리 봐도…’로 시작되는 주제가, 성우 목소리, 심지어 둘리의 얼굴과 성격까지 달라졌다고 당혹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둘리를 가장 둘리답게 만든 작품입니다. 만화잡지 ‘보물섬’에서 만화로 선보인 둘리는 별로 착하지도 않고, 고길동 아저씨에게 반항도 하고 숱한 말썽도 부리는 어린이예요. 애들이 마냥 착하기만 한가요? 그런데 KBS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질 때 담당 PD가 일본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엄마를 그리워하고, 다소 소녀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 그걸 본 시청자들은 갑자기 둘리 성격이 까칠해졌다고 오해할 겁니다. 체육대회 응원가로도 불렸던 유명한 옛주제가는 그대로 쓰려고 하니 저작료 등 비용이 더 들어가서 새로 곡을 만들었고, 성우들의 경우 처음에 담당했던 분들이 이젠 나이가 드셔서 어린이 목소리를 더이상 내기도 힘들고 둘리가 앞으로 계속 만들어지려면 새 목소리를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화, 애니메이션, 극장영화 등 모두 성공했는데 왜 돌아오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렸나요.

“96년에 발표한 극장용 <얼음별 대모험>은 당시에 호평을 받았고 관객도 많이 들었어요. 이제야 밝히는 얘기지만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미국 워너브라더스 영화사에서 5 대 5의 제작비 분담으로 투자 제의가 있었죠. 그때 편당 제작비가 30만달러 정도였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에 900원 정도여서 그럭저럭 제작비를 맞출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외환위기가 터진 겁니다. 갑자기 환율이 1달러에 1700원, 2000원까지 올라가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 사이에 디지털 기술을 제대로 배울 생각에 새로 대학에도 들어갔고, 만화가협회 회장도 맡느라 10여년이 흘렀군요. 그래도 다시 둘리를 제대로 만들고 싶어 3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습니다. 다시 만화영화 만들자고 제안한 방송사가 SBS밖에 없어서 KBS가 아닌 그곳에서 방영을 하는 겁니다.”

-둘리의 첫 탄생과는 2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이번 작품 제작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역시 돈이죠. SBS와 투니버스가 투자를 하긴 했지만 편당 1억1000만원 정도니까 30억원 가까운 돈을 마련하는 게 힘들었죠. 우선 집사람을 설득해 종잣돈을 마련했지만 비디오시장도 죽어서 국내 시장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쉽지 않아요. 수출과 캐릭터 판권 사업에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둘리 시청자들이 3세대로 구분되는데 그들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키느냐였어요. 83년 무렵의 만화로 둘리를 만난 1세대, KBS 만화영화를 본 2세대, 그리고 극장영화를 본 3세대들이 각기 다른 느낌으로 둘리를 기억하거든요. 또 83년 만화에선 냉장고도 그저 긴 직사각형에 줄 하나 그리면 됐지만, 이젠 양문개폐형이 대부분이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도 다 달라져 그런 소품까지 다 꼼꼼하게 바꾸는 작업도 쉽지 않았어요. 가수지망생인 마이콜이 원작엔 조용필, 전영록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젠 원더걸스나 비로 바꿔야 하고…. 하지만 얼마 전에 비오는 날 빨래판을 들고 노래하는 장면에서 송창식의 ‘가나다라마바사아’란 노래를 그대로 부르게 했더니 1세대들이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무엇보다 용기를 얻은 것은 작품을 준비하며 8세 아이에게 만화를 보여줬는데, 26년 전 첫독자들이 웃었던 부분에서 같이 웃더라고요. 세대를 초월한 재미를 주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최근 둘리의 방영분 가운데 악마가 ‘어리수~’ 하면서 물장풍을 쏘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 ‘쥐를 잡자 찍찍찍’이란 주문을 외우는 장면이 있더군요. 어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한 모종의 풍자가 아니냐는 의혹도 품더군요. 둘리가 갑자기 시사만화가 된 건 아닐 테고….

“그건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나름이죠. 이번 작품에는 새로 작곡한 노래들이 많이 등장해요. ‘예쁜 송아지’란 제목의 노래는 ‘사료값는 금값, 소값는 똥값…’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어떤 이들은 이걸 ‘광우병 노래’라고 제목까지 바꾸지만 작가가 일일이 설명을 할 수도 없고….”

불량만화에서 국민 캐릭터로

-처음 둘리를 그릴 때 지금처럼 수십년 동안 사랑받고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나요.

“처음 캐릭터를 구상할 땐 뭔가 물건은 되겠다 싶었지만 이렇게 반응이 클 줄은 기대하지 못했죠. 80년에 처음 둘리를 구상했는데 당시엔 제가 단행본만 그릴 때라 제대로 된 매체에서 소개하고 싶었어요. 3년 후 당시 최고의 작가 17인이 모여 작품을 소개한 만화잡지 ‘보물섬’이 탄생했는데 처음엔 참여도 못했어요. 길창덕 선생이 아프셔서 연재를 중단한 자리에 대타로 들어갔는데 첫회엔 3위, 2회엔 2위를 하더니 3회째부터 1위를 했죠.”

김수정 화백 “둘리의 인기는 바로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처음엔 불량만화라고 비난을 받았다면서요.

“당시엔 만화가 정말 홀대를 받던 시절이었어요. 어린이날에 불량만화를 수거해서 화형식을 할 정도의 분위기였으니까요. 검열도 엄격해서 만화에 아이가 모자를 삐딱하게 쓰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어른을 놀려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 검열 지침이었죠. 그래서 사람이 아닌 공룡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는데 그래도 어른은 너무 폭력적이고, 아이들은 되바라지고 예의를 모른다며 욕을 먹었습니다. 둘리만이 아니죠. 성교육 만화인 ‘귀여운 쪼꼬미’를 발표했을 땐 성이란 자라면서 절로 알게 되는데 왜 애들에게 쓸데없이 보여주느냐며 YWCA 주부모니터 모임에서 비난했는데, 3년 뒤엔 어린이 성교육에 기여했다고 YWCA에서 상을 줬어요. 하긴 21세기인 지금도 신화를 그렸는데도 음란하다고 만화가 이현세씨를 범죄자 취급하는 세상이니 어떻게 우리나라 만화가 발전하겠습니까.”

-그래도 30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세대를 초월해 둘리가 사랑받는 비결은 뭘까요.

“둘리가 공룡이긴 하지만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제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동심의 세계와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황 때문에 공룡으로 탄생시켰는데 1억년된 공룡이 만화에 나오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밋밋할 것 같아서 둘리가 초능력을 쓴다는 설정을 넣었을 뿐 본격 판타지나 모험만화가 아닙니다. ‘호이호이’ 하고 주문을 해봤자 대부분 실패하고 기껏 구박하는 고길동 아저씨를 골리는 정도죠. 별다른 능력이 없으니 결국 고길동과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고요. 언제나 짜증을 내지만 그래도 먹여살려주는 고길동을 중심으로, 매사에 불만이 많지만 이해심 깊은 도우너, 서커스에서 탈출한 타조 또치, 유학간 부모와 떨어져 고모부집에 얹혀 사는 희동이, 가수지망생 마이콜 등 가족과 이웃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안에서 아이들이 원하는 꿈과 환상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기공룡 둘리>에는 판타지보다 밥상에서 밥먹는 이야기, TV를 보며 하는 이야기가 주였고 가끔 판타지도 넣었죠. 사실 둘리의 초능력은 조미료 역할일 뿐, 중요한 건 둘리와 고길동을 중심으로 한 가정사예요. 그러니 모두 자기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거죠.”

“솔직한 성인에로 그려보고픈데, 사회가 허락 할까요?”

- 둘리가 돌아오면서 둘리의 나이 논란이 있었어요. 주민등록증에 나온 나이는 83년생이니 26세다, 만화에 등장할 때 7·8세 수준이니 34세다, 원래 1억년 전에 태어났다 빙하가 녹으면서 되살아났으니 1억살이다 등….

“둘리는 그냥 일곱살 정도 어린이예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죠. 주민등록증에 나온 숫자는 보물섬에 처음 연재된 날짜이고 만화에 나오는 고길동의 집주소인 도봉구 쌍문동은 제가 고향 경남 진주에서 상경해 자취하던 동네예요.”

- 영원히 나이들지 않는다면서도 ‘소년챔프’란 잡지에 ‘베이비 사우루스 돌리’를 연재할 때 둘리는 콧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중년아저씨가 되어 다방에서 아가씨 엉덩이도 쓰다듬고, 대머니가 된 고길동과 카바레도 가던데요. 또 둘리 사연을 만화화해서 성공한 김파마는 아내를 잃고 구닥다리 만화가로 신세 한탄만 하고.

“그건 <아기공룡 둘리>의 외전 같은 이야기인데 반응도 안 좋았어요. 그때 제가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서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이혼 뒤에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 몸까지 아프던 시절이라 괜히 둘리를 괴롭힌 것 같아요. 이젠 재혼해서 가정적 안정도 찾고 늦둥이딸이 태어날 때부터 둘리 인형과 함께 자라서인지 둘리를 무척 좋아해서 딸아이와도 함께 볼 새로운 작품을 만들 용기가 생겼습니다.”

- 둘리는 만화로서만이 아니라 한국 캐릭터 산업의 한 획을 그은 대표적 상품인데요.

“그동안 2000여개의 제품에 둘리 캐릭터가 들어갔어요. 인형부터 자동차 CF까지 등장했으니까요. 우리나라 캐릭터 시장이 1조원 정도인데 둘리 캐릭터가 1000억원 정도 규모이고 둘리나라의 순수익은 30억원 정도입니다. 캐릭터가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면 올해 여든 한살이 된 미키마우스의 경우 디즈니에서 벌어들이는 캐릭터 수입은 연간 수조원이에요. 87년에 동아연필에서 둘리문구세트를 만들었는데 당사 문구시장에서 동아연필의 점유율이 17%였다가 둘리 캐릭터 이후에 60% 이상 장악했어요. 캐릭터 하나가 시장 판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 관리를 제대로 하기 위해 97년에 ‘둘리나라’란 회사를 만들었죠. 얼마 전 둘리 만화영화가 독일 방송에서 시청률 15%를 기록했는데 그나라에선 엄청난 시청률이래요. 이젠 미키마우스처럼 서양에서도 사랑받는 캐릭터가 될 날이 오겠죠.”

만화는 훌륭한 문화콘텐츠

- 농대 축산과 출신인데 만화가가 된 사연은 뭔가요.

“11남매 가운데 8번째인데 어릴 때 형들을 따라 만화방에 처음 간 날, 제 인생이 결정났어요. 만화를 보는데 매우 황홀하고 즐거워서 집에 돌아와 빈 노트에 낮에 본 만화를 그대로 옮겨 그렸습니다. 혼내려던 형들이 오히려 재능있다고 칭찬을 했어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장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따라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도왔어요. 신문배달, 우산장수, 아이스크림 판매상 등 30개가 넘는 직업을 가졌는데 그 경험이 만화를 그리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이 시절의 이야기를 만화로 옮긴 것이 <일곱 개의 숟가락>인데 드라마로도 제작됐죠.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면 제가 직접 미니시리즈로 만들고 싶어요.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농대를 갔지만 중퇴했지요. 당시엔 군정(軍政)이라 모든 브리핑은 군대식 차트로 했는데 제가 진주시 차트 대부분을 그리고 돈을 벌었어요. 그래도 만화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어 서울로 와서 강철수 화백을 찾아가는 등 고생을 하다 83년 월간지 보물섬에 둘리를 그리면서 유명해졌죠. 이후 <홍실이> <오달자의 봄> <작은 악마 동동> 등이 모두 사랑을 받았습니다.”

- 83년에 만났을 땐 버스타고 다니면서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는데 요즘도 버스를 탑니까.

“당시엔 시장에 나가 상인들을 보거나 버스 안 사람들, 바깥 풍경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죠. 또 여고생 이야기인 <오달자의 봄>을 그릴 땐 여고생 조카의 일기장도 몰래 훔쳐보고, 여고생 독자들을 만나 빵을 사주면서 에피소드를 수집했는데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집중하면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 김수정 만화의 애독자들은 신혼부부가 등장하는 <신인부부>, 만년 대리의 애환을 담은 <날자 고도리> 등 성인만화에도 사랑을 보냈는데 지난 10년간 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나요.

“제가 게으른 탓도 있고 우리나라 문화의 빈곤 탓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만화시장이 지금은 대부분 인터넷으로 옮겨 가서, 단행본으로 발표하거나 만화전문 잡지를 통해 작품을 소개할 시장이 없어졌어요. 만화를 그려봐야 독자들에게 전달할 통로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만화를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엄청나게 긴 습작시간, 그리고 선생님 밑에서 문하생 시절을 보내고, 신인 만화가를 뽑는 대회 등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만화전문지나 각종 잡지에 만화지면이 많았거든요. 소년지, 여성지, 시사지에 다 연재만화가 있어서 독자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준이 결정났지만 지금은 그저 인터넷뿐이에요. 물론 인터넷에서 강풀 같은 훌륭한 작가도 탄생했지만 전반적인 만화의 수준은 너무 낮아졌습니다. 만약 둘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캐릭터이고, 제가 대표적인 만화가라면 문화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정부나 부처 장관들이 뭔가 만화시장 활성화를 위한 길을 터줘야 하지 않나요. 어찌보면 지난 10년을 만화가로서는 허송세월을 한 셈이니 개인적으로나 만화계로나 손해죠.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작가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보면 정말 부러워요. 그 분은 나이들어서도 정말 훌륭한 작업을 하고 세계적으로 일본의 만화산업을 알리는 애국자 역할을 하니까요.”

- 기회가 주어지면 꼭 그리고 싶은 만화 주제가 있나요.

“성인 에로 만화예요. 20여년 전에 <신인부부> 등에서 성을 묘사할 땐 그저 이불 덮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만으로 성을 묘사했는데, 이젠 좀더 솔직하고 더욱 건강한 성인만화가 나올 필요가 있어요. 음란만화가 아니라 만화적인 상상력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만화 말입니다. 제목도 생각해두었어요. <방 있습니까>라고. 앞으로 10년 정도 더 일할 생각이고 그 동안 3편쯤은 더 만들 수 있는데 사회문화적 환경이 따라줄지 의문입니다.”

- 얼굴과 옷차림은 여전히 청년스럽지만 한국나이로 육순인데 나이들었다, 세월이 흘렀다는 걸 언제 느끼나요.

“5년 전 다시 대학에 진학했을 때 신입생 MT를 가서 저도 모르게 술마시는 여학생들에게 ‘적당히 마셔라’라며 아버지 같은 교훈을 늘어놓고 있더군요. 같은 신입생인데 말입니다. 또 전엔 긴 파마 머리라 별명이 김파마였는데, 숱이 점점 줄어들어 머리를 짧게 잘랐더니 마이콜 같다고 별명이 마이콜로 바뀌었어요. 제가 12년 전에 재혼해 늦둥이딸이 여섯살인데 얘는 아빠가 마흔 살인 줄 알아요. 딸을 위해서, 그리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이왕이면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몸이 건강하고, 영원한 동심을 가져야 제가 꿈꾸는 것 즉 아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만화를 더 많이 그릴 수 있을 테니까요.”

김수정 화백 “둘리의 인기는 바로 우리들 모습이기 때문이죠”

김수정은 누구인가

소년한국일보에 ‘폭우’로 데뷔…따스함 담긴 만화 꾸준한 인기

1950년 경남 진주에서 6남5녀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11남매 생활체험과 중학교 때부터 진주시장에서 비닐우산, 아이스크림을 파는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다채로운 경험이 그의 만화 속에 따스하게 그려져 나이를 초월한 팬들이 많다. 경상대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만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작정 상경해 소년한국일보에 <폭우>로 데뷔했다. 주요작품으론 <오달자의 봄> <홍실이> <쩔그렁쩔그렁 요요> <미스터 제로> 등이 있고 2000~2001년에는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지냈다. 애니메이션·캐릭터전문회사 (주)둘리나라의 대표이기도 하고 이번 <돌아온 아기공룡 둘리>에선 모든 부문을 담당하는 총감독 역할을 맡았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만화를 통한 웃음과 유쾌함을 공유하는 것이 자신의 만화철학이다. 20세 연하인 부인 류미희씨의 내조와 늦둥이딸 시하의 재롱 덕분에 총감독의 피곤함을 잊는 단다. TV 만화의 호응으로 둘리 캐릭터 상담도 폭주하고 ‘마이콜 콘서트’ 등 다채로운 행사의 제안이 들어와 다시 한번 행복한 봄날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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