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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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녹두장군 최후의 순간

“‘군복을 입고 말을 탄 채 변란을 일으킨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는 <대전회통> ‘형전’ 조항에 따라 처형한다.” 1895년 3월29일(음력) 법무아문 대신 서광범이 주재한 선고재판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의금부가 법무아문 권설재판소로 바뀌고, 재판소 구성법이 공포된 지 4일 만의 사형선고였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근대 사법제도가 출범한 이후 첫 사형선고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전봉준은 “정부의 명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지만 바른길을 걸었던 자에게 대역죄를 적용한다니 천고의 유감”이라고 일갈했다. 다른 이들도 의연했다. 일본 신문 ‘시사신보’ 다카미 가메(高見龜) 기자의 참관기가 가슴을 저민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대개 혼비백산하는 법인데, 조선 사람은 배짱이 좋다. 동학의 거두 전(봉준)·손(화중)·최(경선)·김(덕명)·성(두한) 등은 매우 대담했다.”

전봉준과 동료들은 다음날 새벽 2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상처가 아물지 않아 꼼짝도 못했던 전봉준은 아리(衙吏)의 품에 안겨 사형장으로 갔다. 전봉준은 마지막으로 “종로 네거리에 내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피를 뿌리라”면서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고 외쳤다. 체포부터 사형 집행까지 전봉준의 일거수일투족을 본 강모(某)는 “풍문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맑고 수려한 얼굴, 정채 있는 눈매, 엄정한 기상, 강장한 심지 등…. 과연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대위인·대영걸이었다.” 전봉준 장군은 41살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대역죄를 뒤집어쓴 만큼 시신조차 찾기 어려웠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장군이 서거한 지 118년이 지난 2013년 8월 조광환 동학역사문화연구소장이 한 통의 제보메일을 받았다. 전북 정읍시 옹동면 비봉산 자락에서 ‘장군천안전공지묘(將軍天安全公之墓)’라 새겨진 비석(사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현장을 조사해보니 과연 무덤이 보였다. 인근 지역은 장군의 처(여산 송씨)와 장녀(전옥례씨) 등이 살았던 곳이다. 소고당 고단(1922~2009)의 가사집에 실린 ‘동학이야기’에도 장군의 유골 이야기가 나온다. “조장태라는 인물이 녹두장군(전봉준 장군)의 머리를 담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 따라 한창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짜 장군의 무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결과가 어떻든 전봉준 장군의 ‘의연한 최후’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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