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이슬, 천 번의 칼바람을 품은 꽃…지리산 노고단의 겨울 선물 상고대

정유미 기자
새벽녘 지리산 노고단에서 만난 상고대가 장관이다. 상고대는 섬진강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노고단을 넘어오면서 나뭇가지에 들러붙어 생긴 서리꽃이다. 눈이 가지에 내려앉은 눈꽃이나, 눈꽃이 녹으면서 얼어붙은 얼음꽃과는 다르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새벽녘 지리산 노고단에서 만난 상고대가 장관이다. 상고대는 섬진강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노고단을 넘어오면서 나뭇가지에 들러붙어 생긴 서리꽃이다. 눈이 가지에 내려앉은 눈꽃이나, 눈꽃이 녹으면서 얼어붙은 얼음꽃과는 다르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누구에게나 가보고 싶은 산이 있다. 오르다보면 온갖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산. 지리산도 그 중 하나다. 어머니의 품처럼 둥그스름하고 넉넉한 산자락, 기름진 들판을 휘감으며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섬진강, 너른 들판을 가진 지리산은 하늘이 내린 천혜의 선물이다. 눈꽃보다 고결하고 우아한 서리꽃 상고대를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서 만나고 왔다.

올해는 왜 그리 겨울비만 내리는지,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을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혹시 지리산 최정상 노고단(1507m)에 가면 어떨까 싶었다. 지리산 할머니 산신을 모셨다는 노고단이라면 새하얀 설경 속에 온갖 번뇌와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여전하시네요.” 노고단 재난구조대 김성원 반장(64)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하자 “올겨울에는 지리산에 눈이 오지 않는다”며 “해돋이를 보기는 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이맘때면 노고단에 눈이 50㎝ 이상은 쌓여야 하는데 유독 올해는 눈이 없다는 것이었다. 갈수록 지구온난화가 심해져 겨울이 겨울답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천 개의 이슬, 천 번의 칼바람을 품은 꽃…지리산 노고단의 겨울 선물 상고대

지리산에서는 일기예보가 필요없다. 비가 올지, 폭설이 쏟아질지, 눈꽃이 필지 인간이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곳이 지리산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로 올라갈 때만 해도 날이 맑았다. 목적지 600m를 남기고 갑자기 안개가 몰아치더니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어둠이 짙게 깔렸다. 두렵고 무섭기까지 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겨울산은 오르기는 힘들어도 도전해볼 만하지 않은가.

오전 6시30분. 노고단 대피소에서 정상까지 400m가량을 계단으로 올랐다. 해마다 눈이 1m 이상 쏟아지는 이곳도 돌계단이 훤히 드러나 있다. 뿌연 안개를 헤치고 찬바람에 실려가듯 계단을 하나둘 오르는데 궁금증이 생겼다. 왜 하얗고 복스러운 눈꽃 하면 덕유산과 함백산을 꼽는지 궁금했다. 옆에 있던 노고단 대피소 최근수 계장(56)이 “조금이라도 더 오르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덕유산은 곤돌라를 타고 정상 가까이 갈 수 있고, 함백산은 차를 대놓고 눈꽃을 찍을 수 있다. 지리산 노고단도 성삼재까지는 차로 갈 수 있으니 많이 힘든 산길은 아니다. 눈꽃이나 상고대도 비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사진찍기는 더 힘들다는 것이었다.

날이 좋으면 반야봉은 세 걸음, 천왕봉은 다섯 걸음이면 닿을 듯한데 아직도 하늘이 새까맣다. 드문드문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는 치장하지 않은 어머니 같았다. 바람 부는 대로, 눈보라 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내어주기에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없다 싶었다.

오전 7시30분. 노고단 정상을 향해 잘 다듬어놓은 나무데크를 오르는데 갈기갈기 종이를 찢듯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캐나다에서 만났던 시속 50㎞가 넘는 눈보라보다 혹독했다. 하늘을 휘감아 도는 바람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몸은 휘청거렸다. 잣나무, 구상나무 등 나무 하나하나에도 눈길을 주고 싶었지만 찬바람이 막아섰다. 바람소리가 천둥소리만큼 컸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이 이럴까. 새벽 5시부터 연하천에서 걸어왔다는 40대 여성은 “올해는 지리산에 눈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며 “노루, 산토끼 등도 많이 사는데 전혀 못 봤다”고 말했다.

마침내 노고단 정상에 섰다. 온도계를 보니 영하 18도.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칠 때마다 온몸이 흔들렸다. 살얼음을 대패로 갈아도 이보다 날카롭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매운 바람이었다.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고 입술은 바짝 타들어갔지만 달려드는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머릿속은 맑아졌다. 졸다가 서당 스승에게 회초리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40분. 지리산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불꽃을 태우듯 피아골 자락부터 주홍빛으로 물들더니 그 빛이 산자락에 녹아내렸다. 이미 해가 뜬 것이다. 갑자기 등 뒤에서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더니 하늘이 열렸다. 블랙홀에 빠져들 듯이 눈보라와 안개가 사라졌다. 뒤늦게 얼굴을 내민 지리산의 태양은 온전히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신비로웠다.

지리산의 영험한 기운을 마음껏 받고 싶었지만 채 20분을 버티지 못했다. 발을 동동거리며 내려오는데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설경을 만났다. 지리산 자락에 핀 상고대는 바닷속 산호초 군락을 닮았다. 찬바람에 안개와 이슬이 얼어 나무에 들러붙은 것이 상고대다. 보송보송 솜털 같은 눈꽃과 다르고, 햇살에 녹은 눈이 얼어붙은 얼음꽃과도 달랐다. 나뭇가지마다 하얗게 붙은 상고대는 자연이 빚어낸 예술작품이었다.

눈꽃보다 더 아름다운 상고대를 만나니 반야사에서 홀로 책을 읽던 젊은 스님의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지금은 어떻게 지낼지, 상고대가 해맑은 스님 눈동자와 닮았다.

살포시 앉았다가 살며시 흩어지는 상고대를 보고 싶다면 지리산에 가볼 일이다. 눈이 내리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순간의 아름다운 서리꽃 향연이 지금 지리산에서 펼쳐지고 있다. 지리산에 상고대가 피었습니다!

▶여행정보

■ 지리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노고단 정상을 11월부터 다음해 6월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만 개방한다. 지리산 노고단 상고대와 눈꽃은 2월까지가 가장 보기 좋다. 4월에도 상고대나 눈꽃이 피기도 하지만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다. 대피소의 하루 이용료는 1만원이며 생수와 초코바는 1000원씩이다. 모포는 2000원에 빌릴 수 있고 등산화는 무료로 대여해준다. 라면은 팔지 않는다.

■ 구례읍에서 지리산 온천으로 가다보면 알록달록한 유럽풍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디저트 카페 ‘구례 삼촌 쑥부쟁이’(061-781-7235)다. 구례 특화작물인 국화과 쑥부쟁이는 요즘 떠오르는 건강 식재료. 비타민C가 풍부한 기능성 식물로 체중 조절은 물론 혈압을 낮추고 기침과 천식에 좋아 감기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맛은? 쫄깃하면서도 박하처럼 시원하고 꽃향기는 오래도록 입안 가득 남는다. “구례에서 나고 자란 우리밀만 고집합니다. 머핀과 쿠키에 넣는 쑥부쟁이도 직접 농사지어 갈아 넣지요. 무항생제 달걀에 물은 한 방울도 넣지 않고 우유만 섞어요.” 요리 연구가이자 카페 대표인 이명엽씨(66)는 “머핀과 쿠키에 들어가는 야채는 직접 반죽해 쓴다”며 “최근에는 제주도 당근으로 만든 신제품을 내놨다”고 말했다. 아담한 그릇에 담긴 머핀은 부드러우면서도 달지 않았다. 초록색 쑥부쟁이가 붉은 당근과 만나 보기 좋고 영양도 그만이었다. 쿠키는 바삭바삭하고 고소한데 우리밀을 쓰고 몸에 좋은 견과류를 얹어 간식으로 먹기에 좋았다. 2층으로 올라가 세계 각국의 200여개 인형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도 재밌다. 사진을 찍기에는 더 좋다. 쑥부쟁이 효소차와 쑥부쟁이차는 3000~4000원, 커피는 3000원이다. 머핀은 3000~3500원, 왕쿠키는 1개당 1200~1500원. 문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구례 농업기술센터에는 국내 유일의 압화전시관이 있다. 압화는 꽃, 잎, 줄기 등을 눌러서 건조시킨 후 회화적인 느낌을 강조해 액자 등 생활소품에 이용되는 조형예술이다. 잠자리생태관에는 국내 최초의 잠자리 실품 표본, 모형, 사진 등 500여점과 지리산 곤충 표본, 곤충 사육법, 모형 만들기 체험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농경유물전시관에는 야생화, 허브, 수목 200종이 식재된 원예치료실과 함지박, 홍두깨 등 우리 고유의 농경유물 200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옥 민박을 하고 싶다면 ‘쌍산재’(061-782-5179)에 가보자. 총 6개 동인데 방은 2인실부터 있다. 한 가족이 대청마루 등 독채를 사용할 수도 있다. 가격은 1박에 8만~15만원. 취사는 금지다. 다만 전기밥솥과 식기류가 준비되어 있어 쌀과 반찬, 컵라면 등을 가져가면 밥을 해먹을 수 있다. 입실은 오후 2시부터, 퇴실은 오전 11시. 쌍산재 외에도 민박이 가능한 한옥은 24곳이 더 있다. 토지면이 16곳으로 가장 많다. 조선시대 부자로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무료로 나눠준 ‘운조루’(061-781-2644)는 사랑채 등 5채를 개방하고 있다. ‘곡전재’(010-5625-8444)는 5채 51칸 규모인데 안채를 제외한 4채에서 민박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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