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결혼하는 날 김유정 문인비 앞에서 문학에 목숨 바치겠다고 맹세”

강진구 기자

소설가 이외수와 춘천·화천 여행

소설가 이외수씨가 지난달 27일 강원 화천 감성마을을 찾은 ‘70인의 동행’ 답사단을 환영하기 위해 흰색 바지에 울긋불긋한 무대의상을 입고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 1970~1980년대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소설가 이외수씨가 지난달 27일 강원 화천 감성마을을 찾은 ‘70인의 동행’ 답사단을 환영하기 위해 흰색 바지에 울긋불긋한 무대의상을 입고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 1970~1980년대 대중가요를 부르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강원 춘천의 김유정 문학촌에서 이외수 문학관이 있는 화천의 감성마을로 향하는 내내 이외수 소설 <황금비늘>(1997)의 ‘무어’를 떠올렸다. 상상 속의 물고기 무어는 댐이라는 종신형 감옥에 갇혀 지내는 여느 물고기와 달리 안개 낀 날 황금빛을 뽐내며 춘천 지역의 3개 댐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무어’는 춘천에서 36년간 작품활동을 하다 화천으로 떠난 이외수 작가의 분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황금비늘>에는 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으면서도 제대로 저항할 줄 모르는 나약한 주인공의 극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지난달 27일 경향신문 ‘70인의 동행’ 나들이에 동참한 39명의 답사단은 각자 이외수 작가에게 사인을 받을 책 한권과 함께 저마다의 반전을 가슴에 품은 채 감성마을로 향했다. 어린 딸을 데리고 나온 40대 아빠를 제외하고 대부분 50대를 훌쩍 넘긴 중년과 노년층들이었다. 각자가 살아온 삶을 풀어내자면 장편소설 한권쯤의 분량은 너끈히 될 베테랑들이었다.

오전 8시 서울 양재동에서 답사단을 태우고 출발한 버스는 감성마을로 가기 전, 김유정의 유명세 때문에 동네 전체가 문학촌이 돼버린 실레마을로 향했다. 금병산 자락의 마을 지형이 떡시루를 닮아 실레마을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토속적이고 해학적인 언어로 풀어낸 <봄·봄> <동백꽃> 등 김유정의 작품 12편이 탄생한 곳이다.

김유정 문학촌에 작가의 유품은 단 한점도 보관돼 있지 않다. 그럼에도 해마다 수십만명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있다. <봄·봄>의 점순이가 주인공을 꾀던 숲, <만무방>의 노름터 등 김유정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체취가 마을 곳곳에 묻어있기 때문이다. 김유정 생가 역시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현지 주민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지만 작가의 생전 체취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만석지기 부잣집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김유정의 집은 산골마을에선 좀체 볼 수 없는 통나무 기둥으로 지어졌다. 직사각형 구조로 된 생가는 집 밖으로 나 있어야 할 굴뚝이 안마당 한편에 불쑥 솟아 있었다. 어떤 전통가옥에서도 볼 수 없는 구조의 굴뚝에 대해 해설가는 “대부분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절 음식 연기가 집 밖으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김유정 집안의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수 문학관에 가기 전 강원도립화목원에 들른 답사단이 초여름의 푸른 녹음과 활짝 핀 꽃을 둘러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이외수 문학관에 가기 전 강원도립화목원에 들른 답사단이 초여름의 푸른 녹음과 활짝 핀 꽃을 둘러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parkyu@kyunghyang.com

해설이 끝나자마자 김유정의 따뜻한 기운을 담아가려는 듯 답사단 일행은 삼삼오오 굴뚝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기 바빴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산책하기 좋은 5월의 하늘이었다. 따사로운 오전의 햇살이 내려앉은 생가의 초가지붕에는 산새 한마리가 내려와 열심히 벌레를 쪼아대고 있었다. 해설가의 열띤 강연 속에 산만하지만 생동감 있는 청소년들의 재잘거림이 어우러지면서 김유정의 이야기는 먼지를 뒤집어쓸 틈이 없었다. 아마도 김유정이 22살에 고향에 내려와 야학당을 짓고 꿈꾸던 실레마을의 봄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정작 김유정은 연애도, 작품에 대한 평가도, 생전에 제대로 된 봄을 한 번도 누리지 못하고 29살에 요절했다. 김유정 문학촌에는 연희전문 시절 90일간 쉼 없이 연애편지를 보냈던 당대의 명창 박록주의 사진 한장이 그의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유정 문학촌을 빠져나온 일행은 춘천시내를 둘러싼 의암호변 도로를 따라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의암호는 춘천을 호반의 도시, 문학의 도시로 만든 젖줄이라고 할 수 있다. <황금비늘>에서 현실계와 환상계를 넘나드는 모티브가 되는 안개 역시 의암호가 만들어낸 춘천의 상징 중 하나다. 소양강 처녀상 옆 소양1교를 건너 강원도립화목원 옆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3명의 어머니들과 한자리에 앉게 됐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여고 3학년 때 충격적인 공수부대의 만행을 목격한 50대, <봄·봄>에 나오는 ‘점순’과 이름이 같아서 김유정 소설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는 70대 답사객과 그 여동생에게 물었다.

“이외수 작가와 김유정 작가가 서로 통하는 게 있을까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더니 70대 답사객이 “두 분이 잘 통할 것”이라고 했다.

식곤증이 몰려왔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더니 버스는 춘천댐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5번국도를 타고 화천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로 오른편으로 짙푸른 5월의 녹음을 머금은 북한강 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후 3시쯤 드디어 감성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답사객들은 이외수 작가가 어떤 모습으로 일행을 맞아줄까 들뜬 표정이었다. 작가의 손님맞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었다. 감성마을 입구에서 이외수 문학관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113개 자연석으로 이뤄진 시석림(詩石林)에 새겨진 글들을 읽으며 고요한 산책길을 걷던 일행은 갑자기 흘러나온 추억의 팝음악 소리에 일제히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그의 소설 <벽오금학도>에 나오는 학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이외수 문학관 앞에서는 이미 작은 라이브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반주는 ‘찾아가는 추억의 음악다방’ DJ 하심씨가 맡았고 초대가수는 이외수였다. 흰색 바지에 울긋불긋한 무대의상을 입고 마이크를 쥔 가수 이외수는 ‘기다리게 해놓고’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 1970~80년대 대중가요 4곡을 연거푸 선보였다. 가창력과 상관없이 72살의 나이에 2번의 항암수술까지 이겨낸 이 작가의 열정적인 무대는 그 자체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고 감동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내 안에는 천마리의 늑대가 있다”고 했듯이 작가 이외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작가였다. 그는 문학뿐 아니라 미술, 방송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스스로의 오감과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아닌 가수로서 나타난 그의 손님맞이 역시 ‘이성’에 억눌린 인간의 다양한 ‘감성’과 ‘오감’을 일깨우려는 그의 복선이 깔린 무대로 보였다. 언뜻 보면 경박스러워 보이는 행동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가벼움에 절망 속의 무서운 고독을 이겨낸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무거운 깨달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개미처럼 땅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는 문학관 전시실 입구에는 춘천교도소에서 가져온 감방문이 세워져 있다. 감방문에는 “포기하지 말라. 절망의 이빨에 심장을 물어뜯겨 본 자만이 희망을 사냥할 자격이 있다”(<하악하악> 73쪽)는 글귀가 적혀 있다. 흔히 그의 오감소설은 야성-<들개>(1981), 광기-<칼>(1982), 일탈-<꿈꾸는 식물>(1978), 신비-<벽오금학도>(1992), 환상-<황금비늘>(1997)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그가 감방문으로 스스로를 9년간 가둔 채 탈고한 작품이 <벽오금학도>와 <황금비늘>이다. 화천군에서 나온 해설가는 “이 감옥문에 갇혀 9년간 작품활동을 하면서 <들개>, <꿈꾸는 식물>, <칼>에서 보여준 우울함과 암울함에서 벗어나 하늘나라 선계가 등장하는 등 글이 굉장히 밝아졌다”고 했다.

이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친필원고 등이 전시된 전시실을 둘러본 후 답사객들은 다시 이 작가와 마주했다. 이 작가는 문학관을 찾은 독자들에게 “문학과 예술은 인간에게 내면적 아름다움을 가르침으로써 사랑을 느끼게 만들고 행복을 쟁취하도록 해주는 징검다리”라고 했다. <들개>와 <꿈꾸는 식물> <칼>에 나오는 잔혹한 현실의 고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사랑꾼’으로 변신한 이 작가의 모습은 다소 낯설 수도 있다. 그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물질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떠야 한다고 했다. 이 작가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경제가 죽었다’는 얘기를 72년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경제력 10위 국가가 된 지금 과연 우리는 행복해졌냐”고 반문했다. 그는 “고추가 가장 매울 때는 내 눈이 아니라 자식 눈에 고추가 들어갔을 때며 이것이 마음의 눈이고 이 눈을 떠야 진실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반만년 우리의 역사를 지켜온 정신도 선비정신이나 양반정신이 아니라 남이 쓰는 물건만큼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장인정신에 있다는 말도 했다.

그의 좌우명 ‘죽는 날까지 쓰는 자의 고통이 읽는 자의 행복으로’도 작가로서 장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좌우명은 29살에 폐병으로 요절하기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은 채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 김유정의 작가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 작가에게 ‘김유정의 작품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는 “춘천여성회관에서 결혼하는 날 김유정 문인비 앞에서 선배님에게 부끄럽지 않게 평생 문학에 종사하고 문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선서했다”고 말했다.

그는 감성마을로 찾아온 독자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작가의 노래’를 들려줬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작가가 되어/ 꽃피고 눈 내린 지 어언 3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원고지에 묻히면 그만이지.”

[명사 70인과의 동행] (48) “결혼하는 날 김유정 문인비 앞에서 문학에 목숨 바치겠다고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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