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1623년 5월 22일 강화도 교동에서 깜짝 놀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나 위리안치된 광해군의 아들(폐세자 이질)이 땅굴을 파서 심야탈주극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사건입니다. 폐세자 부부가 26일간 가위와 인두로 파낸 땅굴의 길이는 70자, 즉 21m였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조선판 쇼생크탈출이었습니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폐세자는 무사히 탈출했지만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조정은 벌집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습니다. 페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공론이 모였습니다.

‘더는 골육간 참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인조와 일부 신료들의 부정적인 견해도 있었습니다.

‘죽이자’는 공론에 참여했던 신료들 가운데 번복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근을 잘라야 한다’는 반정 공신들의 주장에 페세자는 자진의 명을 받았습니다.

페세자는 ‘본시는 한뿌린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 새장을 벗어나 마음대로 왕래하고파’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폐세자의 부인이 목을 맸고, 광해군의 부인마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광해군 혼자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6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해군을 박정하게 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싸가지없는 궁비는 광해군이 꾸짖자 ‘영감이 무슨 낯으로 날 야단치냐’고 쏘아붙였습니다. 얼핏 ‘사이다 발언’으로 치부될 수도 있었지만 당대의 여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런 궁녀는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쑥덕공론이 나왔습니다. 광해군은 쫓겨난 후 18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광해군과 그 일가의 최후를 한번 들여다 보았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1회는 ‘조선판 쇼생크 탈출 광해군 일가의 비극’입니다.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