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철수작전, 이 도시도 구할까

김보미 기자
영화 <덩케르크>는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1940년 영국군이 철수작전을 그린 실화를 다뤘다. 화면 속 등장하는 백사장 역시 도버해협에 면한 덩케르크의 말로레방 해변에서 촬영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덩케르크>는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1940년 영국군이 철수작전을 그린 실화를 다뤘다. 화면 속 등장하는 백사장 역시 도버해협에 면한 덩케르크의 말로레방 해변에서 촬영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얀 백사장에 불안한 표정의 군인들과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요트 등 소형 선박을 몰고 간 시민들. 프랑스의 작은 해안도시 ‘덩케르크(Dunkerque)’를 주목하게 한 장면이다. 1940년 5월 영국군의 열흘간 철수작전을 담은 영화 <덩케르크>는 지난 13일(현지시간) 영국에서 첫 개봉 이후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지금까지 2억3413만달러(약 26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영화 제작비(1억달러)의 2배가 넘는 실적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20일 개봉한 지 열흘만에 200만 관객을 모았다.

2차대전에서 독일군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 방어선을 뚫고 도버해협까지 밀어붙였다. 수세에 처한 영국군 등 연합군은 프랑스 최북단 해안에 몰려들었다. 작전명 다이나모. 해안의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과 프랑스군 33만명을 시민들이 요트와 어선까지 동원해 구출한 이야기는 이곳 주민이면 누구든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일화다.

영화 <덩케르크>의 흥행은 70년 넘게 구전돼 온 이 도시의 ‘덩케르크 정신’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화물선이 오가는 항구, 철강과 탄화수소를 실어 나르는 중공업의 허브 대신 관광도시로 거듭날 기회를 잡은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보다 실사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말로레방을 비롯한 덩케르크 해변에서 촬영하는 6주간, 지역 주민 2000여명을 엑스트라로 투입했고 현지 기술직 고용까지 포함해 500~700만유로(65억~92억원)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태어나 자란 주민 파올로 로페즈(40)는 “영화 덕에 도시는 재발견의 기회를 잡았고 이를 놓치면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가디언에 말했다. 시는 ‘덩케르크 1940 박물관’의 전시공간을 2배로 늘려 재개장한 상태다.

프랑스에서 북해로 나가는 길목. 벨기에와 10㎞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국경 마을인 덩케르크는 지중해의 마르세유, 노르망디 북부 르아브르에 이어 프랑스 제3의 항구도시다. 인구 9만의 작은 도시지만 복합하게 얽힌 지정학적 위치는 많은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다.

플랑드르어로 ‘언덕(dune)의 교회(kerke)’라는 의미인 덩케르크에 대한 기록은 11세기부터 등장한다. 중세 때 중요 군사기지, 무역항으로 개발돼 운하와 철도가 거미줄처럼 얽힌 교통의 요충지다. 이 때문에 수세기 전부터 치열한 전장으로 기록돼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잉글랜드와 스페인, 여러 합스부르크 왕가가 도시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네덜란드 17개주가 에스파냐에서 독립을 위해 대항했던 80년 전쟁 초반인 1577년부턴 네덜란드 반란군 측에 점령됐으며, 1583년엔 파르마 공작이 이끈 스페인 군대 통치가 시작돼 악명높은 ‘덩케르커스 함대’의 기지 역할도 했다. 1646년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으나 프랑스와 영국이 1658년 스페인에 맞서 동맹을 맺은 뒤 양국의 합의로 영국령이 됐다.

덩케르크 도심에 세워진 해적왕 장바르의 동상. 위키피디아

덩케르크 도심에 세워진 해적왕 장바르의 동상. 위키피디아

지난했던 영토전쟁은 1662년 영국의 찰스2세가 32만파운드를 받고 프랑스에 팔면서 끝이 났다. 땅을 사들인 프랑스 루이14세는 해적들의 기세가 날로 치솟자 이 도시를 요새화된 항구로 만들었다. 지금도 도심 광장의 이름으로, 숱한 전쟁에도 파괴되지 않은 동상으로 남아있는 해적왕 장바르는 당대 영웅이었다. 탁월한 전술로 유명했던 그는 신분이 낮아 군인이 될 수는 없었지만 루이14세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의 ‘인증’을 받은 해적이었다. 인근 해상에 파견돼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싸웠고, 1694년 6척의 함선으로 발트해에서 네덜란드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을 130척을 붙잡은 일화는 유명하다.

덩케르크는 1848년에 철도가 뚫리고 북부 탄광과 연결되면서 원자재 산업의 거점이 됐고, 철강과 조선뿐 아니라 정유와 화학, 식품가공의 도시로 성장했다. 산업과 물류가 집적된 탓에 두 번의 세계대전 당시 집중 포화를 당해 도시의 70%가 파괴됐으며 미국이 해군 항공기지를 뒀던 1차대전 때 이곳에선 서로를 첩자로 의심하는 ‘스파이 광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주민들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우선도시화지구(ZUP)를 지정해 주변도시들의 재정비 사업을 시작하자 덩케르크 시민들은 지역간 불균형을 우려했다. 또 국가 중심의 도시개발로 이곳의 상징인 항구가 더 큰 도시로 편입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커졌다. 건축가들과 주민들은 마을 복원 계획을 스스로 꾸려 도시간 합병을 추진하는 국가주의 정책과 맞섰다. 지역의 사회·경제단체들이 결합된 ‘그랜드 덩케르크’가 구성됐고, 1968년 덩케르크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인 도시공동체를 선언했다. 지금도 이 일대 17개 코뮌, 20만명의 구성원들이 행정구역으로 나뉜 지역 구분을 넘어 ‘덩케르크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 해안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열린 ‘덩케르크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채우고 있다. 프랑스 포털(france.fr)

프랑스 북부 해안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열린 ‘덩케르크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채우고 있다. 프랑스 포털(france.fr)

프랑스 북부 해안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열린 ‘덩케르크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복장을 하고 모인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채우고 있다. AFP

프랑스 북부 해안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서 열린 ‘덩케르크 카니발’을 즐기기 위해 다양한 복장을 하고 모인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채우고 있다. AFP

프랑스에서 가장 별나기로 유명한 축제인 ‘덩케르크 카니발’도 오랜 지역축제의 형식을 이어오고 있다. 1676년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는 어부들을 응원하기 위해 3일간 열렸던 잔치다. 장바르 찬가와 플랑드르어 전통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장이 교회 첨탑에 올라 청어 450㎏를 군중들을 향해 던지는 전통도 남아있다. 올 2월에도 4만명이 카니발에 참가했다.

오랜 공동체의 역사에도 도시 인구는 매년 1000명씩 인구가 줄고 있다. 오래된 산업은 한계가 있고, 철수작전으로 각인된 백사장으로 관광객을 모으는데는 한계가 있는 탓이다. 난민들의 길목이 된 인근 도시 칼레에서 넘어오는 이민자 문제도 안고 있다. 그래서 최근 젊은 사진작가들을 초청해 도시 곳곳을 새로운 시각으로 담은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또 덩케르크시는 내년 9월부터 시내버스를 무료로 운영하는 등 전쟁 후 재건 당시 자동차 중심으로 짜여진 도시 구조도 바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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