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회 길 잃은 외교안보, 대전환하라

이대근 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2017년 외교부와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20170823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2017년 외교부와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20170823 청와대사진기자단

■ 다섯 번의 경로 이탈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 외교정책이 길을 잃었다. 북한은 남한을 상대하지 않는다. 사드 조기 배치 결정으로 한국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미국은 미국 마음대로 한다. 외교난맥은 박근혜 정부의 유산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그 난기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중삼중의 파고에 휩쓸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외교안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전략, 의지, 참모진용 세 가지 모두 갖추기를 바랐고 그럴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 지난 현재 안보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외교안보 정책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 임기 초 중차대한 시점에 벌써 여러 번 경로를 이탈한 결과다. 실망스럽다.

경로 이탈 Ⅰ-준비된 방미에서 조기 방미로

문재인 대통령은 방미 문제에서부터 외교안보 정책의 첫 단추를 잘못 뀄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외교안보 자문을 했던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민족화해>(2017. 7.8>에 기고한 ‘다시 돌려받은 남북관계 운전석 국익우선의 실용주의 적극 펼쳐야’에서 방미를 둘러싼 논쟁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대선 전 참모들 사이에서 ‘조기 방미’ 대 ‘준비된 방미’로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일찌감치 워싱턴에서 가서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하자는 조기 방미 의견과 일정이 촉박하고,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고려해 좀 더 준비한 뒤 9월 이후 방문하자는 의견이 맞선 것이다. 그런데 준비된 방미의견이 3대 7로 우세했음에도 취임 직후 조기 방미로 바뀌었다.

조기 방미론의 이유로 거론된 것은 세 가지다. 미국과의 협의라는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북한을 먼저 방문할 수도 있다는 후보의 발언이 국내외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 북핵 문제 해법에 한미 양국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점, 사드 배치 논란을 해소할 필요성이다. 그럼에도 문대통령 취임 직후 전문가들 사이에서 조기 방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물론 한국 보수층과 미국 내에서는 조기 방미 주장이 대세였다. 한미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의구심을 씻어주는 게 시급하다는 그 이유였다.

모든 문제는 조기 방미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기 방미는 여러 가지 사정상 무리였다. 우선 외교부 장관이 임명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미 한미 방위비 분담, 한미 자유무역협정, 사드 배치 등에 대해 자기 입장을 확고하게 정해 놓고 있었다. 조기 방미했다가는 트럼프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정부는 한미 현안을 다루지 않고 상견례 수준의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목표를 정하고 조기 방미하기로 했다. 한미동맹에 대한 신뢰를 과시하는 정도면 상관 없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사실 방미 목적을 그렇게 제한한다면 조기 방미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방미 전에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사드 배치 문제로 한국을 몰아친 것이다. 사드 배치 문제는 실타래처럼 엉킨 한반도 문제를 풀어갈 핵심 열쇠다.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대통령도 사드 완전 배치를 미뤄 시간을 벌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북핵 문제에서 진전을 이루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을 위해서는 최소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사드 배치에 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사드 문제를 유예함으로써 버는 시간동안 북핵 상황을 진전시킬 북핵 해결 방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셋째, 미국과 중국에 휘둘리지 않고 미국과 중국을 설득하면서 타협으로 이끌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특히 트럼프의 압박에 겁먹지 말고 원칙을 내세우며 당당히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그런 준비를 못했던 것 같다.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 지역에 대해 약식 환경영향 평가가 아니라 정식으로 일반 환경 영향 평가를 하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트럼프가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고 반발하자 문대통령은 너무 쉽게 사드 배치를 약속, 일반 환경 영향 평가 절차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방미하기도 전에 사드 카드를 버린 것이다. 이렇게 사드 배치 약속을 하고서야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당초 의도대로 상견례 자리가 아니라 한국이 미국에 공물을 바치는 행사로 전락했다. 대신 한국이 받아온 것은 한반도 평화 통일 문제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모호한 수사학이었다.

이후 한국의 외교안보 현실은 박근혜 정부가 남긴 외교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경우는 더 악화되기도 했다. 조기 방미의 실패가 낳은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로 이탈 Ⅱ-사드 배치 유보에서 조기 배치로

문재인 후보는 2016년 7월 사드 기습 배치 결정 때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국익을 충분히 고려한 종합적인 북핵 문제 해법을 마련하고, 그 틀 속에서 ‘사드 문제’를 비롯한 종합적인 위기관리 방안이 제시되어야 마땅하다.” 2017년 1월에는 “한미간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을 그렇게 쉽게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사드 배치 수용 의사를 밝혔다. 다만 “이 문제를 다음 정부로 넘기면, 차기 정부가 국회 비준을 포함한 공론화 과정도 갖고 중국과 러시아를 대외적으로 설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2017년 3월 자신의 입장을 다시 정리해서 발표했다. “순리대로 다음 정부로 넘겨주면 긴밀한 한미 협의, 한중 협의 등 여러 가지 레버리지를 활용해 안보와 우리 국익을 함께 지켜내는 합리적 결정을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언젠가 사드를 배치하겠지만, 상당 기간 사드 배치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북핵 문제에 진전을 이루고 주변국을 설득할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이 공약을 무시하고 환경영향 평가 결과와 상관없이, 그리고 국회 비준 절차 없이 사드를 배치하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했다. 북한이 7월 28일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 14형을 두 번 째 발사했을 때는 한 발 더 나아갔다. 환경영향평가를 하지도 않은 채 사드를 먼저 임시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문 대통령의 주요 정책을 쉽게 폐기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외성 때문에 한미정상 회담 과정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사드를 임시 배치하기로 한미간 이면합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드 배치의 전략적 모호성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렛대이며 주변국 관계 개선의 열쇠였다. 그러나 사드카드를 너무 빨리 던져버림으로써 다양한 가능성을 품는 불확실성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으로 바꿔 놓았다. 사드 문제가 갖고 있는 북핵 문제와 한반도 안보 위기 해소의 잠재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 결과, 겨우 100일 만에 한국은 북미 및 미중 대결 구도에 갇히고 손발이 묶이고 말았다.

경로 이탈 Ⅲ- 베를린 구상에서 핵잠수함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베를린 구상은 화려하지만, 대결과 긴장의 연속인 한반도 현실에 바로 적용하기는 어려운 내용을 다수 담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적용 가능한 세부 실천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베를린 구상은 박근혜 정부의 드레스덴 선언처럼 남북 대결 상태에 대한 정부 책임론을 피하려는 알리바이용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데 베를린 구상 발표 이후 정부의 대응은 대체로 대북 강경 조치다. 북한이 호응하지 않고 도발적 태도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므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지만, 문제는 맞대응 말고는 대책이 없다는데 있다. 실천 계획을 내놓지 않은 채 남북이 강경 발언을 주고받는 현상만을 놓고 보면 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남북관계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 기회, 방법, 여건조성 같은 소프트웨어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것은 북한 겨냥한 미사일의 탄두 중량 무제한, 핵 잠수함 도입 등 하드웨어다. 정부 스스로 베를린 구상을 핵잠수함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구상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경로이탈 Ⅳ- 남북대화, 지렛대에서 껍데기로

현 정세에서 남북대화를 하면서 북핵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북핵이 한반도 안보 문제의 핵심이자 동북아 최대 현안이 된 마당에서 북핵 문제를 논의하지 않은 채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나름의 북핵문제에 관한 구상을 갖고 최소한 북미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은 남북관계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주도하는데 필요한 지렛대로서도 중요하다. 남북대화와 북핵의 기계적 분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만일 기계적으로 분리해 놓고 남북대화만 하자고 하면 북한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최근 북한의 최대 관심은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 여부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하지 않고 빈손으로 남북교류만 하자고 하면, 더구나 유엔 대북 제재로 대북지원을 할 수 없는 조건이므로 북한이 남북대화와 교류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물론 남북 대화에서 북핵 문제를 제외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즉, 북미간에 북핵 문제를 두고 대화와 협상이 진행 중이어서 북핵 문제는 북미에 맡겨놓고, 한국은 남북대화를 통해 선순환을 촉진하도록 한미간 역할 분담하는 경우이다. 이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상황이 아니다. 북핵문제 해결의 당사자인 한국이 남북대화든 뭐든 북핵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설 계기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문대통령은 8월 7일 트럼프와의 통화에서 그런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내가 제안한 (남북)대화의 본질은 적십자 회담을 통한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적 조치와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핫라인 복원, 남북 군사 당국자 간 회담 두 가지”라면 북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화제의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북핵 해결의 주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여야 한다고 미국에 넘겼다.

경로이탈 Ⅴ-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어 대한민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하였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 통일 문제에서 전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 정상 회담 이후 트럼프 자신의 입으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트럼프의 마음속에 정말 북한 문제의 주도권을 한국에 넘겨줄 생각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트럼프의 언행으로 미뤄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지지한다는 말은 한국이 그런 의견을 내놓더라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지지거나 의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주도적 역할이란 그저 남북대화 시도를 양해해 줄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추측된다.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당사자를 꼽으라면, 일방적으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하거나 ‘화염과 분노’와 같이 대북공격 의사를 공공연히 피력한 미국이다. 왜 약속과 달리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을까? 우선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문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전후, 즉 한반도 안보와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시기 동안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자신에 대한 트럼프의 오해를 씻는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사드 조기 배치, 대북 압박 강화 등 트럼프의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트럼프가 문 대통령을 신뢰하게 되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트럼프가 문 대통령을 신뢰하기로 했는지 의문이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운전석에 앉을 수 없다. 한국은 지금 목적지로 갈 자동차도 준비하지 못했다. 설사 어떻게 해서 미국이 내준 차를 탈 수 있다 해도 남은 자리는 조수석 밖에 없다. 트럼프의 아량으로 운전석에 앉는 행운이 찾아온다 해도 조수석에 앉은 미국의 지침과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정한 목표를 향해 미국이 만든 지도를 더듬으며 가야 하다. 한국이 어느새 운전석에서 조수석으로 옮기고, 주도적 역할은 수동적 역할로 바뀌었다. 주도적 역할?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대근 논설위원

이대근 논설위원

■ 외교안보 난맥상은 왜?

문대통령의 상대적 무관심

문 대통령은 사회 경제적 쟁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안보 문제에 관한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다. 대선 토론회에 그런 특징이 잘 드러난 바 있다. “북한은 주적인가”라는 질문에 문 후보는 국방부가 할 말이지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답변을 한 바 있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북한은 군사적 위협을 한다는 측면에서는 적이지만 또한 동포로서 대화 및 통일의 상대이기도 하다는 이중성을 지닌 존재라는 정답이 있었다. 그러나 문 후보의 명료하지 않은 답변은 낡아빠진 주적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선 국면은 곧 대통령 부재 상태이기도 해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싸고 ‘코리아 패싱’ 논의가 한창이었지만 문 후보는 이 용어를 모른다고 답했다.

이런 상황은 문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안보 현안은 우선 관심사였을 것이고 그만큼 집중력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안보 문제의 중요성과 민감성에 합당한 집중력을 발휘하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 언뜻언뜻 비친다. 금기어나 다름없는 레드라인 발언이 대표적이다.

국내 여론을 의식한 임기응변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에 일일이 대응해 왔다. 신속하게 국가안전보장 회의를 열어 정부가 위협에 대비하고 있음을 시민에게 알린 것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미사일 도발 때 마다 핵 잠수함 도입을 언급하거나 한미간 미사일 지침을 개정해 한국 미사일의 탄두 중량을 무제한으로 늘리겠다며 ‘눈에는 눈’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을 겨냥한 첨단 무기 도입은 북한 도발이 초래하는 막연한 불안을 신속하게 달래고 정부가 무엇인가 하고 있음을 알리는 가시성을 위해서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국내 여론 관리 측면에서는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런 대응은 대북정책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대북정책도 사안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 유연성이 지속성, 일관성 자체를 훼손할 정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특히 핵잠수함 도입은 한국의 비핵화 입장과 충돌할 여지가 있다.

노무현 정부의 반미 트라우마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할 말은 했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부시 행정부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용산 미군기기 이전 비용 부담 등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실제 미국 요구를 들어주었으면서도 몇 마디 말 때문에 동맹 우선을 평가받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고, 거친 말의 대가를 값비싸게 치렀다고 할 수도 있다.

문대통령이 트럼프에게 너무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노무현 정부처럼 반미 정부라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한 결과가 아닐까? 문 대통령은 미국에 너무 끌려 다니고 있다.

트럼프 달래기 우선

문 대통령은 트럼프의 의심을 풀어주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일단 트럼프 하자는 대로해주고 나면 다음 차례가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다음 차례가 올까? 트럼프에 한번 약점 잡혔는데 다음에는 그 손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트럼프가 문 대통령의 대접에 만족해서 다음에는 양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한반도 안보와 평화를 맡겨도 괜찮은 건가?

전략의 부재

7월 4일 북한의 ICBM 발사에도 문 대통령은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그에 따른 남북 대화도 제의했다. 그러나 베를린 구상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ICBM을 발사하자 사드 임시 배치, 독자적 대북 제재 검토를 발표했다. 북한의 괌 주변 포격, 트럼프의 전쟁 암시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때인 8월 7일 한미정상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대북 원유 공급 중단이 빠져서 아쉽다, 지금은 제재와 압박을 해야지 대화할 때가 아니다, (대북제재가) 북한이 견딜 수 없는 순간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때로는 대화와 유화적 제스처를, 때로는 북한 미사일 발사에 감정적 대응을 하거나 놀랄 만큼 대북 강경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에 맞는 최상의 조치와 언어 구사가 될 수는 있지만, 북핵 문제의 중대성과 복잡성에 합당한 전략적 접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사드 문제에 화난 트럼프를 달래느라, 도발한 김정은에 맞대응하느라 사건과 상황에 끌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정 사건과 상황에 매몰되면 대증요법, 임기응변으로 흐르게 된다. 최근 북한이 미사일 쏠 때마다 대북정책이 바뀐다는 말이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 대통령 100일을 단순화하면, 사건 하나하나에 일대일 대응을 하느라 한반도 평화의 대전략을 놓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강경과 온건, 남북관계 중시와 대북 제재 강화 사이를 오간다는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한미 동맹을 우선할 수도 있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뒤로 미뤄둘 수도 있다. 국내 보수 여론의 지지를 받기 위해 전술적 후퇴를 할 수도 있다. 상황이 복잡한 만큼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전략 구상아래 주도적으로 선택할 결과일까? 문제는 전략이 없이 눈앞의 상황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지금 외교안보 정책은 길을 잃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어디로 나가야 할지 오리무중이다. 이 길도 아닌 것 같고, 저 길은 막혀 있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전략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면 전략이 없는 것이다. 한반도 안보 위기와 북핵 문제는 트럼프의 유별난 언행과 변덕, 김정은의 도발, 국내 여론 동향 때문에 함부로 다뤄야 할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전략가의 부재

문재인 정부에 전략가가 없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다자외교 무대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이고, 송영무 국방장관은 무장이었다. 서훈 국정원장이 유일하게 전략가라고 할 수 있지만 국정원장으로서의 한계가 있다.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가 될 수는 없다. 이 결과 자연스럽게 외교 관료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문재인 정부 100일의 외교안보 정책이 과거 정부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외교안보 정책이 바로 외교 관료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차대한 시기의 외교안보정책이 캐비닛에 들어 있는 과거의 관행과 문서대로 추진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대통령이 외무고시 중심의 외교부를 개편하고자 하는 점을 고려하면 역설적이다.

☞ ‘이대근의 단언컨대’ 팟캐스트 듣기

■ 해결책은 있는가?

도전적이고 과감하게 하라

그동안 외교 관료들이 주도한 관료적인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 관료적이란 과거에 반복해서 실행해 보았던 것, 그래서 위험 부담이 적지만 창의적이지는 않을 것을 말한다.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단계적, 점진적인 방법론을 말하기도 한다. 관료적 접근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이며 덜 위험한 상황에는 적합하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한반도 안보 위기와 북핵 문제는 전통적 해법과 접근으로는 풀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엉켜 있다. 그럼에도 관료 주도의 외교안보정책을 추구했고 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다. 박근혜 정부 때 보다 주변 정세가 더 악화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베를린 구상은 과거 논의 결과를 잘 정리한 것이기는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실효성, 현실성, 과단성이 없다. 베를린 구상을 하나의 원칙으로 두되 그걸 실천하기 위한 세부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금은 돌파해야 할 때다.

■ 상황에 종속되기보다 상황을 주도하라

당장 혼돈 상태에 벗어나야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실천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트럼프가 아니라 그 누가 압박한다 해도 양보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핵심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천명함으로써, 한국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을 각인시켜야 한다. 지금 미국은 물론 북한, 중국, 일본 모두 한국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

■ 당장 외교안보 참모를 바꿔라

도전적이고 과감한 돌파, 상황 주도하기는 현재와 같은 외교 관료 중심의 참모를 두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문 대통령은 일단 진용을 갖췄으니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가보자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환경이 고착되고 나면 너무 늦었다고 후회할 수 있다. 아직 여지가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한다.

초기 실패는 교훈이 되고 그 교훈이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다면, 초기 실패는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성공을 위한 보약, 지금 먹어야 한다.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를 교체, 문대통령이 제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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