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다방…한국 다방문화의 산실

윤대헌 기자

서울시는 종로·을지로에 있는 전통 점포 39곳을 ‘오래가게’로 추천하고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지도를 제작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전문가의 조언과 평가는 물론 여행전문가, 문화해설사, 외국인, 대학생 등의 현장방문 평가도 진행했다. 서울시가 ‘오래가게’를 추천한 것은 ‘도시 이면에 숨어 있는 오래된 가게의 매력과 이야기를 알려 색다른 서울관광 체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경향신문은 이들 39곳의 ‘오래가게’를 찾아 가게들이 만들고 품고 키워 온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 스물여섯 번째 가게는 ‘학림다방’이다.

황동일 시인의 헌시 ‘학림다방’.

황동일 시인의 헌시 ‘학림다방’.

‘이 초현대, 초거대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1970년대 혹은 1960연대로 시간 이동하는/흥미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데가/몇 군데나 되겠는가?/그것도 한 잔의 커피와/베토벤쯤을 곁들여서….’

‘학림(學林)다방’ 입구에 세워 놓은 시인 황동일의 헌시 ‘학림다방’의 마지막 구절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서울 도심에도 시간이 멈춰진 곳이 있다. 우리나라 다방문화의 산실이자 서울미래유산인 ‘학림다방’이 그렇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자리한 학림다방은 1956년 신선희씨가 처음 문을 열었으니, 그 연륜이 환갑을 넘는다. 다방 이름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축제였던 ‘학림제’에서 따왔고, 현재 4대 사장인 이충렬씨(62)가 1987년에 인연을 맺은 후 31년째 운영 중이다.

대학로 대로변에 자리한 ‘학림다방’.

대학로 대로변에 자리한 ‘학림다방’.

1975년 문리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가기 전까지 학림다방은 ‘제25강의실’로 불릴 만큼 서울대생들의 단골집이었다. 후에는 천상병·이청준·황지우·김승옥·전혜린·김지하·황석영·홍세화·김민기 등 문화예술계의 걸출한 인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으니, 세월 속에 갇힌 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충렬 사장은 “처음 1년은 위탁경영 방식으로 운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학림’이 아니라서 실망을 했고, 옛 단골도 달라진 분위기에 하나둘씩 발길을 돌렸다. 어떻게든 원상복구가 최우선이었다. 그래서 1988년 다방을 아예 인수해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유선방송 음악을 클래식 LP판으로 바꿨고, 웨이터도 없앴다. 학림다방은 ‘추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학로는 ‘청춘의 거리’다. 선술집과 다방이 즐비했던 이곳에서 학림다방의 인기가 유독 남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장은 “과거에는 학림다방을 중심으로 대학다방·낙산다방 3곳이 트리오를 이뤘다. 대학다방은 교수들이, 낙산다방은 법대생들이, 그리고 학림다방은 문리대생들이 주로 찾았는데, 단골들의 지인이 하나둘씩 늘면서 지인에 지인까지 더해져 항상 손님들로 북적였다. 게다가 단골 중에 한 사람이 유명세를 타면 그를 보기 위해 찾았던 사람들이 또 단골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DJ부스 안 추억의 레코드판.

DJ부스 안 추억의 레코드판.

복층으로 이뤄진 2층에는 대낮인데도 빈 좌석이 없을 만큼 손님들로 가득하다. 얼핏 봐도 대다수가 젊은이들이다. 고전과 현대가 맞물린 공간에는 빛 바랜 레코드판이 벽면에 빼곡하다.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 주면 노래를 틀어주던 DJ박스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DJ는 없다. 찻값을 계산하는 계산대로 쓰인다. 허름한 탁자와 소파, 선반 위의 낡은 영사기와 카메라…. 1988년부터 작성된 방명록에는 추억이 가득하다. 잠시나마 향수에 젖는다.

이 사장은 “초창기 학림다방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건물은 철거돼 지금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다. 과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이것저것 소품을 갖다 놓았지만,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학림다방은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 이면에 아픔을 품고 있다. 수필가 전혜린은 1965년 1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하루 전날 학림다방을 찾아 “나는 두렵다. 그리고 나는 죽고싶지 않다. 생은 귀중하고 단 하나다. 그리고 나는 실컷 살지 못했다”는 메모를 남겼다.

1981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대표적 공안사건인 ‘학림사건’의 발원지도 이곳이다. 민주화운동단체인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진 곳이 바로 이 다방이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학림사건으로 이름 붙여졌다. 당시 반국가단체 조직범으로 몰려 무고하게 고문받고 옥살이를 했던 이들은 결국 2000년대 들어서 무죄 선고와 함께 일부 국가배상으로 마무리됐다.

학림다방의 고풍스러운 소품.

학림다방의 고풍스러운 소품.

지식인들의 토론장이요 공연 연출가와 무명 배우들의 뒤풀이 장소로 애용됐던 학림다방. 오랜 세월 동안 세대와 세대를 잇고 있는 이곳에 추억과 사랑, 아픔과 슬픔이 커피향처럼 짙게 배어 있다.

이곳은 먹거리가 다양하다. 커피와 각종 건강차는 물론 조각케이크와 파르페, 아이스크림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술도 판다. 무엇보다 대학로에서 커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이 사장이 직접 로스팅해 블렌딩해서 만들어지는 커피는 원두를 많이 사용해 맛과 향이 진하고 그윽하다. 이 모두 커피를 사랑하는 이 사장의 노력 덕이다.

이 사장이 학림다방을 처음 운영할 당시만 해도 이곳의 커피는 ‘믹스커피’였다. 그 당시에는 대기업에서 선보인 믹스커피가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한데 1987년 어느 날, 일본기업에 다니는 한 임원이 커피맛을 본 후 “다방 분위기는 좋은데 커피맛이 좀 아쉽다”라며 자신의 집으로 이 사장을 초대해 로스터로 원두를 볶아 커피를 대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로스터기 앞에 서 있는 이충렬 사장.

로스터기 앞에 서 있는 이충렬 사장.

그 맛을 본 이 사장은 그 임원을 따라 일본에 가서 로스터를 구입했고, 커피 만드는 법도 배웠다. 늘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제대로 된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때부터 그는 직접 원두를 볶고 갈아 뜨거운 물을 부워 추출하는 ‘핸드드립커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장은 지금도 하루에 수십 잔을 마시며 커피공부에 열심이다.

이 사장의 커피맛에 반한 번역문학가 이덕희씨는 지난해 고인이 되기 전까지 학림다방을 찾아 커피를 마셨고, 백기완 선생은 거의 매일 아침 방문해 커피 한 잔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한단다.

학림커피

학림커피

학림다방은 분점도 있다. 다방 건물 옆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아담하고 깔끔한 ‘학림커피’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학림커피의 탄생은 유명세 때문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됐지만, 무엇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배경이 된 후 젊은이들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이후에는 줄을 서야 할 판이다. 하지만 단골들이 자리를 잃자 몰려드는 손님들을 보면서도 이 사장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이 사장은 “학림다방이 유명해져 찾은 이들이 많아진 것은 좋지만, 모처럼 방문한 단골들이 자리가 없어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 왠지 죄를 지은 마음이다. 그래서 로스터를 들여놓은 자리를 개조해 학림커피로 만들었다. 학림다방은 지금 아들이 운영하고, 나는 주로 이곳에서 커피를 만들며 단골들의 말벗이 돼 주고 있다”고 말했다.

깔끔한 분위기의 학림커피.

깔끔한 분위기의 학림커피.

파란색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에 로스터가 자리하고, 우측은 아담한 카페가 공간이다. 깔끔한 테이블과 분위기는 학림다방과 차이가 나지만, 왠지 모르게 학림다방의 핏줄이 흐르는 듯 포근하다.

이 사장이 정성스레 내린 커피 한 잔을 맛 보니 문득 생각이 든다. ‘학림다방이 100년 가는 가게가 되려면 커피의 질을 높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추억을 더한다면 금상첨화다’라는 그의 말이….

한편 학림다방이 자리한 대학로 인근에는 동숭아트센터를 비롯해 낙산공원, 마로니에공원,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이화마을, 쇗대박물관, 서울한양도성길2코스 등이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대학로에는 크고 작은 공연장이 밀집돼 있어 모처럼 한 편의 공연을 관람하고 학림다방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가지면 안성맞춤이다.

마로니에공원 입구

마로니에공원 입구

■ ‘학림다방’은?

개업연도 : 1956년 / 주소 : 종로구 대학로 119 / 대표재화금액 : 비엔나커피 6000원, 대추차 5000원, 크림치즈케이크 6000원 / 체험요소 : 음료와 케이크 시음 / 영업시간 : 오전 10시~오후 11시 / 주변 관광지 : 대학로, 동숭아트센터를 비롯해 낙산공원, 마로니에공원, 이승만대통령기념관, 이화마을, 쇗대박물관, 서울한양도성길2코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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