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회 김정은은 히틀러? 트럼프는 흐루시초프?

이대근 논설주간
김정은과 트럼프. 김용민 화백

김정은과 트럼프. 김용민 화백

김정은과의 회담은 재앙을 부르는 유화책인가?

김정은·트럼프 회담 전망에 대해 두 개의 상반된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첫째, 대북 유화책 경계론이다. 자칫 체임벌린·히틀러 정상회담 때 체임벌린이 대독일 유화책을 쓰는 바람에 세계대전을 막을 기회를 놓친 것처럼 김정은의 수에 넘어가 유화책을 쓰면 재앙이 올 것이라는 불길한 관측이다. 보수세력은 유화적 대응을 하면 북한이 핵능력을 완성할 시간만 벌어 명실상부한 핵 국가로 우뚝 서게 될 것을 우려한다.

둘째, 역사적 전환론이다. 동서 진영 냉전기에 데탕트를 가져다 준 1972년 닉슨·마오 간 베이징 회담이나, 냉전을 종식시킨 레이건·고르바초프 간 1989년 몰타 회담과 같이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히틀러·체임벌린 회담은 비관론을 대표한다면 닉슨·마오 회담은 낙관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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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만남의 참혹한 결과

김정은·트럼프 회담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관론에서 낙관론으로 옮겨가는 추세이다. 그러나 두 정상간 담판 성격의 회담이라는 특성 때문에 낙관을 장담하지도 못한다. 조심스러운 기대감 표시 정도가 현 정세에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잘못된 만남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현대사의 잘못된 만남에서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 잘못된 만남은 체임벌린·히틀러 회담 외에 케네디·흐루시초프 간 첫 회담을 들 수 있다. 데이비드 레이놀즈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의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정상회담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분석해 본다.

히틀러. 김상민 기자

히틀러. 김상민 기자

·체임벌린·히틀러 뮌헨 회담의 교훈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사이 뮌헨 회담은 한 번에 끝난 회담이 아니다. 체임벌린·히틀러는 독일 베르크호프, 고테스베르크에서 회담을 두 차례 했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추가로 참석한 가운데 세 사람이 뮌헨에서 3자 회담을 했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간 1938년 뮌헨 회담은 현대사를 대표하는 실패한 회담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일에 유화책을 쓰면 히틀러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체임벌린의 낙관론이 보기 좋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유럽 지배 야망을 꺾을 수 있는 계기였는데 체임벌린이 히틀러 달래기에 집중하느라 그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38년 뮌헨 회담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 대독 유화 정책의 배경

1938년 유럽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바야흐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2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도 영국도 다시 전쟁에 뛰어들 여건이 되지 못했다. 히틀러는 언제나 전쟁할 생각이었지만 나치 군장성들은 전혀 전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독일 군부는 히틀러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독일내 온건 군부세력은 영국 처칠의원을 만나 히틀러를 제외하고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영국이 히틀러의 외국 침략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를 해야만 히틀러총통의 행동을 저지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다시 전쟁을 겪고 싶지 않다는 정서가 광범위했다. 만일 전쟁을 하면 독일 전투기가 런던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적지 않은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 영군 군 합동기회원회는 1936년 10월 개전 첫 주 1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독일의 공습 능력은 과장된 것이다. 독일은 당시 전투기를 띄워 런던을 폭격할 능력이 없었다. 독일의 런던 대규모 공습은 폴란드 등을 점령한 뒤에나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만 생각한 히틀러는 우선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렸다. 체코의 주데텐 지역 거주 독일인을 구출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우선 주데텐을 독일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당시 체코는 프랑스 및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독일을 자극했다. 독일 내에는 체코를 전격적으로 침공할지, 서서히 소멸시킬지 등 방법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프랑스 정부내에서도 독일, 체코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체코와의 동맹 의무를 준수할지, 동맹을 포기하더라도 독일과 평화를 유지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영국 내에서도 히틀러의 의도가 무엇인지 두고 판단이 엇갈렸다. 히틀러는 단지 1차 대전 종전이 독일에 가혹한 배상을 강요한 베르사이유 조약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2의 나폴레옹이 되려는 것인가? 마치 김정은 핵무기 개발이 정말 핵보유국 지위를 누리기 위한 것인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 카드인지 관측이 분분했던 것과 같다.

영국 내 일부는 이런 전망도 했다.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고 체코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참전할 경우 영국도 참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현 시점에 독일에 경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각 소장파는 해군 기동훈련을 통해 확고한 결전의 태도를 보이자고도 했다. 이들은 1차 대전 직전 1914년 7월의 위기 때 영국 정부가 강력한 대독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면 독일이 전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미적거리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체임벌린은 왜 히틀러를 구슬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그러나 체임벌린은 체코 때문에 전쟁 치르는 것을 영국 여론이 탐탁치 않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와 회담하려는데는 국내정치적 이유도 있다. 이듬해인 1939년 가을 총선에서 대패가 예상되던 그에게는 외교적 성공이 필요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1937년 총리 취임 전부터 유럽 평화 구상에 몰두해 있었다. “수억명의 목숨이 절반은 미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끔찍하다.”

그의 접근법은 히틀러를 잘 구슬려 체코 합병에 만족하고, 더 이상 침략할 의사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한 체임벌린은 히틀러와의 첫 정상회담을 매우 극적으로 추진했다. 히틀러에게 만날 수 있는지 사전 의향을 타진하기는 했지만, 체임벌린은 방문 날짜를 미리 알리지 않고 전격 독일을 방문했다.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13일 독일 외무부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 ‘내일 독일로 출발하니 만날 수 있는 시기와 장소를 알려 달라.’ 지방에 있던 히틀러는 깜짝 놀랐다. “영국이 참전을 엄숙하게 선언하기 위해 방문하는 구나.” 히틀러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체임벌린은 회담 개최 사실도 출국 진전에 발표했다. 체임벌린·히틀러 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에는 기쁨의 물결이 넘쳐흘렀다. 한 기자의 증언. “이처럼 극적이고 짜릿하고 또 감동적인 뉴스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신문의 사설이 회담을 환영했다.

■ 전쟁 않는다는 히틀러의 거짓말

히틀러를 만난 체임벌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체코에 살고 있는)300만명의 주데텐 독일인들이 독일 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신 요구가 거기에 그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묻는 말입니다. 혹시 당신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려는 건 아닙니까?”

히틀러는 말했다.

“내가 관심 있는 문제는 주데텐 독일인 뿐입니다,”

독일과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는 다른 지역를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한 것이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이렇게 설득했다.

“당신은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즉각 모든 필수 사항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틀러가 물었다.

“주데텐 독일인 지역을 독일 제국에 할양하는 문제에 영국이 동의합니까?”

체임벌린이 대답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찬성이지만 우리 내각은 물론 프랑스 측과 상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2시간 만에 주데텐을 히틀러에 양보하기로 하고 내각의 묵시적 동의하에 프랑스 승인 받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리고 히틀러는 미쳤다는 생각도 바꿨다.

뮌헨에서 체임벌린, 히틀러, 달라디에는 주데텐을 독일에 넘기는 것으로 합의했다. 뮌헨에서 체임벌린과 히틀러 두사람은 별도의 양자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영국과 독일이 향후 교전하지 않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뮌헨 회담에 열광한 영국·프랑스인

달라디에는 프랑스인의 반응이 어떨지 불안에 떨면서 귀국했으나 비행기 문이 열리자 마중 나온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미쳤군.” 체임벌린 환영은 더욱 성대했다. 비행장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 붓는데도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다음 날에도 총리관저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가 연설을 했다. “나는 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 왔다고 믿습니다.” 회담이 다음해 총선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체임벌린의 처지는 트럼프 같다. 악재가 많은 트럼프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북미회담으로 성과를 내야만 한다.

히틀러는 뮌헨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이 합의 때문에 전쟁을 못했다며 체임벌린에 속았다고 말했다. “체임벌린은 나의 의심을 녹이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늘어놓았다. 그가 베르크호프까지 일부러 찾아온 목적은 단 하나,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김용민 화백

김용민의 그림마당. 김용민 화백

■ 김정은은 히틀러가 아니다

히틀러가 전쟁할 생각이 없다고 체임벌린을 속인 것처럼 김정은이 트럼프를 속일까? 김정은이 비핵화 할 생각이 없거나 단지 시간 끌기를 위해 트럼프를 만나고, 트럼프는 체임벌린처럼 속은 줄도 모르고 회담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평화가 왔다’고 허풍을 떨게 될까?

만약 북미회담이 실패하면 김정은·트럼프 다 타격이 크다. 회담 결렬 되고나서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에 매진한다고 해봤자 미래가 없다. 제재와 압박은 더 거세질 것이고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을 더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앞으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언제 예방공격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핵만 갖고 살아가야 한다. 경제 도약을 꿈꾸는 김정은에게는 갈 수 없는 길이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역시 회담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도중에 박차고 나가겠다고 했지만, 회담 성과 없이 돌아가면 중간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뻔하다. 결렬 책임이 북한에 있다고 돌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실질적 핵무력 완성을 위해 치닫는 북한을 예방공격해야 할지도 고민스러운 과제일 것이다. 예방 공격은 곧 한반도 전쟁을 의미한다. 과연 트럼프는 수 많은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전쟁을 감행할 수 있을까? 중국, 러시아는 물론, 한국도 반대하는 전쟁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의 미국위협이 현실화하는데 트럼프가 아무 것도 안할 수는 없다. 뭔가는 해야 하는데 할 것은 마땅치 않다. 이같이 회담 결렬은 김정은, 트럼프 모두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공한 회담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절박성이 두 사람 모두에게 있다. 그렇게 성공한 회담이 되도록 양측이 최대의 노력을 한다면 성공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 만나면 상대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도 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나기 전만 해도 히틀러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대화를 거듭하면서 그를 ‘협상 가능한 합리적 인물’이라고 느꼈다. 미친 사람도 만나보면 괜찮아 보이는 것이다.

김정은·트럼프는 서로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바로 그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면 ‘생각 보다 멀쩡하다’는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타협의 여지도 생긴다. 김정은 통치 7년을 돌아보면 결코 미친 자의 통치라고 볼 수 없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북한의 상황을 아버지 보다 더 낫게 개선했다. 트럼트도 가끔 미친 짓을 하기는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매우 이성적이었다. 한반도 문제에서 트럼프는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언어를 구사했다. 그에게 한반도 문제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만나면 겉보기 보다 좋은 사이가 될 수 있다.

·케네디·흐루시초프 회담의 교훈

김정은 트럼프 회담에 교훈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역사적 회담은 케네디·흐루시초프 회담이다. 우선, 두 사람은 준비 안 된 회담을 했다. 냉전이 한창일 때 합의할 사항이 없는데도 두 사람은 무조건 만났다. 미국내에서 회담 비판론이 나오자 미국정부는 “의견 교환일 뿐 주요 문제에 대해 협상하거나 합의를 도출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아무런 합의 도출도 전제하지 않은 정상에서의 환담”이라고도 했다. 말하자면 예비회담, 탐색적 대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회담을 갖기로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1961년 1월 취임한 케네디는 그해 4월 쿠바 피그스만 침공의 실패를 흐루시초프와의 회담에서 만회하려 했다. 흐루시초프는 냉전 초기의 고립감에서 탈출해 서방을 상대로 소련이 이제 핵 위협에 끄떡없는 강대국임을 과시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1961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담을 했다.

■ 두 사람은 만나자 마자 이념논쟁을 했다.

“공산주의는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역사발전의 필연 법칙에 따라 승리할 것입니다.” 흐루시초프는 협박했다.

“그것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케네디가 응수했다. 케네디가 취임한지 5개월도 안 된 1961년 6월 3일 빈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념 논쟁을 했다.

“미국이 (베를린 문제로)소련을 모욕하려고 하는데 용납할 수 없습니다.” 흐루시초프가 화를 냈다.

“베를린에 대한 소련조치를 미국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케네디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쟁이든 평화든 미국 마음대로 결정하시오.” 흐루시초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애초 의견 일치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핵실험, 베를린, 베트남 등 모든 현안에서 대립했다.

만일 김정은·트럼프가 상대 체제에 시비를 걸며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회담을 시작한다면 매우 위험하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 다행히 북한과 미국은 소련과 미국 관계처럼 진영을 대표하는 세력이 아니다. 이념 논쟁을 할 이유가 없다. 특히 트럼프는 협상가이다. 김정은도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다.

흐루시초프와 케네디

흐루시초프와 케네디

■ 케네디를 아들 취급한 흐루시초프

흐루시초프는 애숭이 대통령을 몰아부쳤다. 정상회담 전 흐루시초프는 “내 죽은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케네디 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실은 흐루시초프 장남과 케네디는 동갑이었다. 케네디는 흐루시초프보다 23살 어렸다. 흐루시초프는 첫날 회담을 마치고 참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는 영 경험이 없고, 미숙하기까지 해.”

회담 내내 흐루시초프의 노골적 감정적 언사에 케네디는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말하는 것과 비슷했다. 오로지 주기만하고 받지는 못했다.” 회담을 마치고 케네디가 탑승한 공군 1호기는 “월드 시리즈에서 패한 야구팀이 탄 비행기 같았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딸 이방카 보다 어리다. 이게 바로 트럼프가 조심해야 할 포인트다. 김정은은 한 체제의 절대 권력자 곧 수령이다. 트럼프 보다 권력이 세다는 뜻이다. 김정은을 쉽게 보거나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핵폐기만 강요하고 체제보장책을 굳이 내놓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것이다.

■ 회담 이후 몰락한 흐루시초프

회담을 마친 뒤 흐루시초프는 희희낙락했다. 소련이 서베를린을 압박해도 케네디가 전쟁을 감수할 확률은 5%도 안 된다고 자신하며 서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분리장벽을 설치했다. 케네디가 장벽의 현실을 받아들이자 흐루시초프는 다음 도박을 했다.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 미국을 위협한 것이다. 잘못된 회담이 지구 종말을 재촉할 핵 전쟁위기까지 몰아간 셈이다.

그러나 우습게 본 케네디가 쿠바 봉쇄로 소련과 정면으로 맞서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흐루시초는 미사일을 철수해야 했다. 이런 굴욕 때문에 흐루시초프는 당내 기반이 흔들리면서 2년 뒤 실각했다.

■ 회담 이후 과시적이 된 케네디

회담에서 기세 눌린 케네디는 흐루시초프에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미국의 국력을 과시하는 장으로 인식해 베트남전을 본격화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서는 해상 봉쇄로 흐루시초프를 압박, 쿠바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북미 긴장 관계 속... 한반도는?   김상민 기자

북미 긴장 관계 속... 한반도는? 김상민 기자

■ 김정은·트럼프 준비됐을 때 만나라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만나기로 하면서 회담 전망에 대해 한 때 비관론이 나온 바 있다. 특히 미국내 온건 대화파 인사들 사이에서 김정은·트럼프 회담 위험론이 제기됐다. 반면 강경파들은 만나서 핵을 페기시켜야 한다며 환영하는 쪽이다. 대화파와 강경파가 교차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독특하고 이례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트럼프가 말할 것처럼 회담 도중 뛰쳐나가면 최악의 상황이다. 그 정도로 준비 안 되어 있고 이견 있는 회담이 예상된다면 아예 만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만나겠다는 의지가 여전하다. 두 사람이 그런 마음가짐이라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디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벼랑 끝에서 만나는 것 보다 정상에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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