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김정은이 아니라 트럼프,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

이대근 논설주간

북미 정상회담 회담 취소와 재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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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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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을 못 믿었던 트럼프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회담 취소 사유로 거론한 것은 딱 한 가지이다. 바로 “가장 최근 북한이 발표한 성명에 담긴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이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그의 성격을 감안할 때 회담을 취소한 중요한 이유는 편지에 쓴 대로 분노와 적대감일 것이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분노와 적대감을 해명하는 공손한 담화를 발표하자 회담을 재개하기로 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회담 취소가 그것 하나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회담 준비가 잘 진행되는 상황이었다면, 단지 이런 적대감 때문에 취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대감이 회담 취소의 촉진 요인이었다면, 배경적 요인은 따로 있다고 봐야 한다. 바로 북미정상회담의 본질적 사안인 북한 비핵화 가능성에 대한 회의였다. 트럼프는 북한이 북중 정상회담을 두 차례 한 뒤 중국의 지원을 믿고 당초와 달리 태도를 바꿨다고 의심했다. 북한이 핵을 폐기할 생각을 않은 채 북중 관계 개선을 통해 대북 압박 체제를 붕괴시켜 다른 우회로가 있는지 찾고 있다고 트럼프는 판단한 것이다. 북측이 지난 주 정상회담을 위한 사전 협의에 응하지 않은 것도 그런 변심의 결과로 보았다. 북한은 미국이 사전 협의 장소에서 3일간이나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미국측이 접촉을 위해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이런 북측의 태도는 미국으로 하여금 핵폐기 의사를 의심케 했고, 회담이 실패할 수 있다는 비관론을 키웠다. 결국, 북한이 회담을 깨기 전에 미국이 먼저 깨자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북한의 의도를 잘못 읽은 것이다.

지난 24일(현지시간)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공개 서한.

지난 24일(현지시간)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예정됐던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공개 서한.

회담 취소의 다른 요인은 북한이 미국을 갖고 놀도록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자존심 문제였다. 트럼프는 북한이 먼저 회담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김정은에게 쓴 편지에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렇게 먼저 회담 하자고 매달린 쪽은 북한인데 거꾸로 미국이 북한에 매달리 게 되는, 북한 우위 상황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회담 취소 예상 못하고 밀어 부친 북한

북한은 미국을 믿지 못하고 미국은 북한을 믿지 못한다. 이렇게 상호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회담장에 나가봤자 상대가 쉽사리 양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이 보기에 미국의 선 핵폐기 고집은 너무 컸다. 회담 전 이걸 흔들어 놓아야 했다. 그래서 김정은-시진핑의 회담에 이어 5월 16일 대남 및 대미 공세 차원에서 북미간 실무 협의 거부, 남북고위급 회담 취소 등 강수를 두었다. 북한과 미국간 상대를 압박하는 한 판의 게임이었다. 물론 이 게임은 기정사실화 된 회담을 취소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어야 가능하다. 적어도 북한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취소라는 의외의 수를 씀으로써 북한을 놀라게 하고, 결국 북한의 기를 꺾었다.

트럼프가 회담을 재개한 것은 핵 폐기에 관한 북한의 의지를 느꼈다는 뜻이다. 김계관은 담화에서 “조선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고 다짐했다. 북한은 이미 핵 미사일 실험 중지, 미국인 3명 석방, 풍계리 핵 실험장 폭파 등 선의의 선제적 조치를 한 바 있다. 비핵화 의지가 없다면 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북미간 판문점에서 의제협상을, 싱가포르에서 회담 진행 관련 협상을 하게 된 것도 회담 재개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트럼프의 벼랑 끝 전술에 북한이 맞 대응하지 않고 트럼프의 공로를 치하하며 공손한 태도를 보인 것이 결정적이었다. 마주 보고 차를 모는 치킨 게임에서 먼저 핸들을 돌렸다는 것은 그만큼 트럼프의 위신을 살려주면서라도 비핵화 회담을 하고 싶다는 의사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회담을 재개하기로 했다고 해서 북미간 북핵 해법에 관한 이견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북한은 핵을 폐기하고, 미국은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는 최종 목표만 확인했을 뿐, 어떻게 양측이 주고받기 하며 입장을 조화시킬지 방법은 아직 못 찾고 있다.

회담이 깨질 만큼 여전히 이견이 크다

■같고도 다른, ‘완전한 비핵화’와 ‘CVID’

김용민 화백

김용민 화백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과 다시 정상회담을 갖고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다. 이전에 정부는 ‘완전한 비핵화’가 곧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을 비난할 때 CVID에 의한 리비아식 모델을 공격했다. 완전한 비핵화를 하면서 CVID는 안하는 방법이 있을까? 완전한 비핵화, 정부의 CVID, 미국의 CVID가 다른 것인가?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 구상, 즉 ‘단계적, 동시적’ 방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반면 미국의 CVID는 선 핵폐기 후 보상을 의미한다. 정부의 CVID는 핵폐기 방법론의 선후를 거론하지 않은 채 단지 최종 상태만을 주목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김정은이 다시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고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해도 미국과의 절충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핵 폐기 우선인가, 동시적인가?

‘선 핵 폐기 후 보상’을 주장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한 김계관의 5월 16일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북한의 입장은 단계적, 동시적이다. 북미회담에서 포괄적 합의를 하고 이행은 단계를 밟아가되 단계마다 북미가 각자의 책임을 동시에 수행하자는 방안이다. 김계관은 5월 25일 담화에서도 “첫 술에 배가 부를 리 없겠지만, 단계별로 해결해나가면 지금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핵폐기,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 철회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북한의 말 대로 단계적일 수 밖에 없다. 트럼프도 이 점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트럼프는 5월 22일 “(비핵화 조치에 필요한) 물리적 이유들 때문에 아주 짧은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괄 타결(all in one)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의 ‘단계적’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시간과 미국의 ‘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는 여전히 시차가 있다. “(미국은) 김정은이 싱가포르 회담에서 비핵화에 합의하고 6개월 내로 핵무기의 일부 반출, 핵물질 생산 시설의 폐쇄와 자유로운 사찰 등 첫 이행 조치의 실행 일정을 잡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트럼프 행정부 당국자, 뉴욕타임스 5월 20일). 미국은 속도전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북한이 속도를 내도록 유인할 수 있는 북한 체제 보장 방안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트럼프가 말하는 ‘아주 짧은 시간’은 북핵을 폐기하는 속도에 관한 것 뿐이다. 핵무기는 북한이 체제 안전을 위해 70년에 걸쳐 확보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체제 안전장치 없이 먼저 핵폐기의 중대 조치를 취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무엇을 믿고 6개월 내 핵을 폐기하나? 이 질문에 미국은 대답이 없다. 북한의 요구는 핵폐기 조치를 하면 미국도 호응하는 조치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합리적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은 믿을 수 없으니 일단 먼저 핵을 폐기한 뒤 무작정 기다려보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으니 미국의 선의를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못 믿는다고 선 폐기를 요구하면서 북한에게는 미국을 믿고 따르라고 한다면 결코 공정한 거래라고 할 수 없다.

트럼프는 즉각 큰 합의, 단기간내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기를 원하면서도 그게 가능한 조건과 방법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전략 부재. 트럼프를 제외하고 온 세계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거다. 트럼프의 전략이 있다면, 북한의 무조건 굴복이다. 사실 그게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기는 하다. 복잡한 거래와 주고받기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아무리 핵폐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해도 자기의 체제 안전을 걸고 도박을 할 용기까지는 없을 것이다.

■최종 단계에 관한 그림이 서로 다르다

김용민 화백

김용민 화백

북한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최종 단계는 미국이 구상하는 것과 다르다. 체제 보장의 수단인 핵을 폐기하는 것인 만큼 핵 아닌, 다른 수단에 의해 체제 보장책이 미리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입장이다. 핵과 미국의 체제 안전 보장이 동시 교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사 간다고 방을 빼고 나왔는데 정작 옮겨 살 집이 없다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월 27일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어제 다시 한번 분명하게 피력을 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불분명한 것은 비핵화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비핵화를 할 경우 미국에서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체제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걱정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이 핵폐기 결단을 했으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일단 방을 빼고 나오면 미국이 알아서 살 집을 마련해 줄 테니 믿고 나오라는 것이다. 절대 신뢰하는 친구간에는 이런 거래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 대 국가의 거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김정은 믿을 수 있다, 믿을 수 없다

한국인 상당수는 김정은의 핵폐기 결단을 믿고 있다. 한국정부의 비핵화 정책도 그런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수시로 남북 접촉을 하면서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 미국 내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속고 있다는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도 미국내 별 이견이 없다. 미국에서는 김계관이 CVID를 비판하면 “거 봐라, 핵폐기 안하겠다고 했잖아”라고 반응한다.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비판해도 같은 반응을 한다. 김계관은 5월 16일 이런 주장을 했다. “미국이 우리가 핵을 포기하면 경제적보상과 혜택을 주겠다고 떠들고있는데 우리는 언제한번 미국에 기대를 걸고 경제건설을 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거래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취지를 설명하면 이렇다. ‘경제 지원을 구걸하려고 핵을 포기하는, 비굴한 북미회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불가피하게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됐으므로, 미국이 적대 정책을 포기해야 우리의 핵도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에서는 이 주장을, 북한이 비핵화를 거부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방북 취재를 한 바 있는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도 트럼프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최선의 전략은 북미정상회담을 미루고 대북 경제 제재를 강화해 김정은이 수용 가능한 조건을 들고 협상장에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밖에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믿을 수 없으니 트럼프가 북미회담 기대감을 낮추라고 하는 조언도 적지 않다.

미국내 이같은 북한 비핵화 비관론은 김정은 불신 외에 트럼프 불신이 가세한 결과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비핵화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니 누가 믿겠냐는 식이다. 미국에서 핵폐기 가능성을 믿은 사람은 오직 트럼프 한 명인 것 같다. 어쩌면 그가 미국 대통령이고, 그것도 여론이나 참모를 무시하는 독불장군이라는 사실이 다행인 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알아야 할 세 가지


■첫째, 트럼프의 비핵화 전략이 없다

트럼프는 비핵화 빅딜, 빅뱅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흥분할 뿐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완전한 핵폐기까지 일정한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이 순탄하기 위해서는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트럼프는 이제 알아야 한다. 정교한 비핵화-북한 체제 보장, 비핵화-경제 보상 로드 맵을 짜야 한다. 미국 정부내의 북한 문제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트럼프가 싱가포르 회담 전격 취소는 그가 홀로 결정할 때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북한이 미국정부에 분노와 적대감을 표출한 것은 비핵화 입장을 거두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북한 전문가라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해석을 그대로 믿고 취소를 결정했다가 번복해야 했다.

■둘째, 북한은 압박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김상민 기자

김상민 기자

트럼프와 미국 내 오피니언 리더들은 북한이 미국의 압박에 못 견딘 나머지 핵 포기를 선언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경제 재재에 관해 말하자면 북한은 아직 버틸 수 있는 더 많은 시간 여유가 있다. 1년, 혹은 2년까지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제재에 의한 굴복론’은 김정은이 왜 지금 비핵화하려는지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김정은은 스스로 국가전략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대북 제재와 압박은 전략 전환의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압박 때문에 북한이 선회한 것으로 믿는 트럼프는 김정은이 의심스러운 태도로 나오는 경우 압박을 더 강화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선 핵폐기 후 보상의 논리도 완전 핵 폐기 할 때까지 압박을 유지함으로써 핵 폐기를 유도하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압박 유지는 북한의 경로 이탈을 막는 효과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북한을 비핵화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는 없다.

만일 트럼프가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했음을 이해한다면, 유연하고 다양하며 효과적인 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북한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스스로 비핵화의 길로 가도록 트럼프가 유인책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비핵화 속도를 내려면 채찍만이 아니라 당근도 필요하다.

■셋째, 종전 선언은 핵폐기를 가속화 한다

문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이 성공할 경우에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 종전선언이 추진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핵폐기 완료 이후 북한 체제를 보장해준다면 북한은 비핵화에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핵폐기를 유인할 수 있는 일정한 보장이 필요하다. 완전 핵 폐기까지의 기간 동안 체제 보장을 해준다면 북한은 적극적으로 핵폐기에 나설 것이다. 종전 선언은 바로 그런 잠정적인 체제 보장 효과를 노릴 수 있는 방안이다.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면 그 취지에 맞게 한미연합훈련 규모 축소나 취소 등 적절한 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에 나서면 소망스러울 것이다.

탑 다운 방식의 장점과 약점


■탑 다운의 장점- 지도자의 결단에 의한 돌파

최고 지도자의 회담을 산의 정상에 빗대 처음으로 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만든 처칠은 정상회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 적수 사이의 위험스러운 만남, 강렬한 의지에서 터져 나오는 극적인 행동으로서 장엄한 새로운 전망을 펼치는 한판 승부, 지도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벌이는 순간, 지도자의 명성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결정하는 건곤일척의 기회, 일단 시작하면 물러서기가 거의 불가능한 여행.”

정상회담의 가장 큰 장점은 결단력 있는 리더십에 의해 난제를 돌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처럼 지도자의 결심이 문제 해결을 좌우하는 체제인 경우 더욱 그렇다. 북한에 관해 오랫동안 불신해온 미국적 상황에서는 실무차원의 접근으로 북한 문제를 푸는 일은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북미간 북핵 협상 사례가 잘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은 한반도 70년의 과제, 북핵 개발 30년의 과제를 돌파하기에 적절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동서진영 간 데탕트를 가져온 닉슨-마오쩌뚱 회담, 닉슨-브레즈네프 회담이 좋은 예이다.

■탑 다운의 약점- 디테일에 약하다

닉슨 전 미국대통령(오른쪽)이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과 축배를 들고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닉슨 전 미국대통령(오른쪽)이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서기장과 축배를 들고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흔히 비핵화 여정이 순탄할지는 디테일에 숨은 악마를 잘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런데 탑 다운 방식이 다른 방법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돌파하는 이점이 있지만 디테일을 다루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1972년 5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닉슨은 키신저 국가안보 보좌관과 함께 참석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을 대동하지 않았다.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협상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주요 쟁점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었다. 브레즈네프는 ICBM 수량과 미사일 격납고 규모에 대해 소련입장과 정반대되는 입장을 내놓는 실수를 했다. 양국간 미사일 방어 기지의 수자를 두고 두 사람이 입씨름 할 때 키신저가 끼어들자 브레즈네프가 말했다. “당신은 입 다물고 있으시오. 대통령과 내가 이 현안을 결정하겠소.” 그런데 다음 날 그로미코는 회의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엉망진창이었다. 그로미코가 다시 나서야 했다. 키신저는 이 문제를 두고 “정부 수반이 복잡한 문제를 협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안보좌관이었던 키신저 자신도 소련과의 막후 협상에서 실수를 했다. 정상회담 전 밀명을 받고 공적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국무부를 배제한 채 소련측과 단독 비밀 협상을 할 때였다. SALT 협상에서 잠수함발사탄도 미사일 감축문제를 빠뜨린 채 합의했다. 브레즈네프나 키신저가 해당 분야 전문 부서와 전문가를 배제한 채 협상한 결과였다.

트럼프가 비핵화의 세부적인 과제를 잘 안다고 보기는 어렵다.존 볼턴은 북핵 문제 해결에 안 맞는 인물이다. 국무장관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폼페오는 비핵화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비핵화의 세부적인 문제를 다 꿰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주한미국 대사는 물론 실무 책임자인 국무부의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도 공석이다. 설사 빈 자리를 다 채우고 있다 해도 트럼프는 좀처럼 전문적인 의견을 묻지도 않고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탑 다운의 약점에, 트럼프 리스크 까지 겹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이대근 논설주간

이대근 논설주간

일괄타결에 성공한다 해도 회담 이후 비핵화를 이행하는 과정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 철저한 공정관리(process control)가 필요하다. 트럼프 리스크는 비핵화 과정에 얼마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려면 탑 다운의 이점은 살리되 차곡차곡 치밀하게 세부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바텀 업의 장점을 활용해야 한다.

김정은이 핵 폐기의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트럼프가 몇 가지 조건만 맞춰주면 핵을 내려 놓고 개혁의 길로 가겠다는 것이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이다. 그런데 비핵화의 방법을 찾지 못해 핵폐기라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8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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