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회 김정은·트럼프, 루비콘 강을 건너다

논설주간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합의문에 서명을 마친 뒤 나란히 서명식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때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등에 잠시 손을 올리자 트럼프 대통령도 곧이어 같은 동작으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합의문에 서명을 마친 뒤 나란히 서명식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때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등에 잠시 손을 올리자 트럼프 대통령도 곧이어 같은 동작으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정말 밋밋한 공동성명이었다, 그러나

■ 후속 협상에 달린 북미회담의 성패

미국 내 오피니언 리더들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실패로 규정하고, 트럼프 대통령을 집중 비판하고 있다. 과연 트럼프는 몰매 맞을 만큼 성과 없는 회담을 했을까?

공동성명에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은 맞다. 북핵 현안과 직접 상관없는 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제외하면, 새로운 북미 관계,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4.27 판문점선언 재확인 및 완전한 비핵화 세 가지가 전부다. 이런 내용은 정상회담 전에 공식, 비공식적으로 수 없이 언급되었던 것인 만큼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구상 가장 오랜 적대관계를 유지해왔던 두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처음 만나서 이런 정도의 합의를 한 것은 괜찮은 성과이다. 처음 보자마자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관계의 장애물인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후속 협상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갖도록 한다”고 했으면 첫 만남 치고 결코 느린 속도라고 할 수 없다. 후속 협상에서 성과를 내는지 지켜 본 다음에 비판해도 늦지 않다.

■ “시간이 없었다”

공동성명이 기대와 달리 밋밋한 것은 트럼프가 솔직하게 말한 대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30년 묶은 문제를 풀 로드맵을 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작업을 요한다. 우선 행동해야 할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을 먼저하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무엇이 알맞은지, 상호 조치가 등가인지, 동시적인지 등 따져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마 시간이 충분했다고 해도 책상에 앉아서는 로드맵을 완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핵 폐기 시한이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그건 로드맵을 완성할 정도로 진전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에 핵 폐기의 시작부터 완료까지의 복잡한 시간표를 작성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부분이라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가면, 상응하는 구체적 조치가 담겨야 한다. 그런데 비핵화, 북미 관계 정상화, 평화 체제 전환 등 모든 쟁점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일부를 구체화하면 연쇄 작용을 통해 다른 문제도 구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새로운 관계’라는 막연한 표현을 보자. 그걸 북미 관계 정상화로 구체화했다면 그에 맞춰 비핵화의 진전도 공동 성명에 담아야 한다. 하지만 상호 조응 조치에 관한 이견을 정리해서 세부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면, 추상적인 표현을 쓸 밖에 없다.

6·12 북미정상회담 공동합의문에 담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명.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공동합의문에 서명했다.싱가포르 AFP=연합뉴스

6·12 북미정상회담 공동합의문에 담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명.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공동합의문에 서명했다.싱가포르 AFP=연합뉴스

■ 북미 협상 5개월 학습의 결실

트럼프 행정부는 한동안 빅뱅의 속도니, 일괄타결이니 핵을 폐기해 미국 테네시의 오크리지로 가져와 핵 무덤에 묻겠다느니, 6개월 내 폐기 완료하겠다느니 하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쳤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이 비핵화로 입장을 선회한 이유를 오해했다. 비핵화가 김정은의 비핵 발전전략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미국 주도 압박의 결과라고 믿었다. 그래서 미국은 최대의 압박을 계속하면 핵 폐기를 강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면, 미국이 비핵화 유인책을 심각하게 고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대북 보상은 핵 폐기를 완료하고 나서 생각해 볼 일로 치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 ‘이대근의 단언컨대’ 팟캐스트 듣기
그러나 미국은 북미 접촉을 시작하면서 그런 구상의 비현실성을 깨달은 것 같다. 북한이 미국의 상상 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북핵 문제는 그런 식으로 풀릴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북미 간 이견과 대립은 심화되고, 싱가포르 회담 취소 사태까지 낳았다. 사실 미국이 북측과 접촉하면 할수록 논리상 밀릴 수 밖에 없다.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핵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최대한의 지위를 확보하고 최대한의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런 북한 앞에서 미국은 비핵화 입장을 평가해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회담에서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미합중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수뇌회담이 조미관계 개선에로 이어지리라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올해 초부터 취하신 주동적이며 평화애호적인 조치에 의하여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하여도 군사적 충돌의 위험이 극도에 달하였던 조선반도와 지역에 평화와 안정의 분위기가 도래하게 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 다음에는 미국이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 대화와 협상을 하기로 했으면서 압박만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과 트럼프가 당장 북한을 굴복시킬 것처럼 호언장담했지만, 실제 세상에 내놓은 북미 공동 성명이 그런 분위기와 전혀 다른 내용이 된 이유이다. 미국은 결국, 5개월의 학습 과정을 거쳐 단계적·동시적 해결이라는 북한의 접근법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트럼프가, 회담이 과정의 시작이고 비핵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단계적 접근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회담 후 “비핵화가 20%만 진행되어도 불가역적이 된다”고 한 것도 단계적 해법의 불가피성을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미사일 엔진 실험장 폐쇄와 한미연합훈련 중단의 공약을 주고받은 것도 북한의 동시적 접근법과 다르지 않다. 공동 성명도 새로운 관계 - 평화체제 축 - 비핵화의 세 과제를 명시, 이들이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연계성은 동시적 해법의 당위성을 말해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2일 오전 9시(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만나 역사적인 ‘세기의 회담’을 시작했다. 두 정상은 이날 단독정상회담에 이어 확대정상회담, 실무오찬을 이어가며 비핵화를 비롯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여정의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다. 사진은 이날 카펠라 호텔에서 트럼프(오른쪽)와 김정은이 함께 복도를 이동하는 모습.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2일 오전 9시(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만나 역사적인 ‘세기의 회담’을 시작했다. 두 정상은 이날 단독정상회담에 이어 확대정상회담, 실무오찬을 이어가며 비핵화를 비롯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여정의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다. 사진은 이날 카펠라 호텔에서 트럼프(오른쪽)와 김정은이 함께 복도를 이동하는 모습.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 한반도 비핵화에서 북한 비핵화로 진전
북한은 4.27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라고 표현한 것과 달리 북미 공동성명에서는 비핵화의 주체가 북한임을 분명히 했다. 아마 미국측이 선 비핵화를 요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성의표시로 보인다.

■ 4.27 판문점 선언 재확인의 의미
북미 공동 성명은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함으로써 비핵화에 관한 한국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과거 남북한이 대화를 진전시키면 미국이 한국을 의심하고, 한미 공조체제를 강화하면 북한이 대북 압박 의도라고 비판하고, 북미 대화를 하면 미국이 한국을 소외시키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이 모두 남한의 주도적 역할을 공인함으로써 한미간 비핵화 공조를 한다고 해서 북한으로부터 의심받을 여지가 사라졌다.

또한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따라 재개될 남북 경협을 보장하고 촉진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진행되면 미국의 대북 경제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는 은근한 신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싱가포르 AFP=연합뉴스

김정은과 트럼프 거래의 진실

■ 미국 논리를 뒤집은 공동성명

북핵 문제에 관한 미국의 기존 입장은 북한이 문제국가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문제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는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 미국이 국제사회를 대표해 북한에 들어가서 핵무기를 폐기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북한이 이런 작업에 적극 협조하면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에 나사고, 북한체제 안전도 보장해주며, 나아가 북미 관계도 정상화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핵화 - 한반도 평화체제 - 북미 관계 정상화의 순서이다.

그러나 북한의 논리는 정확히 역순이다. 즉, 북미관계 정상화 - 한반도 평화체제 - 비핵화이다. 북핵 문제는 미국의 그릇된 정책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미국이 북한이라는 주권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대북 적대시 정책을 추구했고, 그 때문에 북한이 부득불 안전을 위해 핵 억지력을 보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북핵의 억지력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을 무력화하거나 미국이 스스로 적대 정책을 철폐한다면 북한이 핵무장할 이유도 사라진다. ‘비핵화를 위한 핵보유’의 논리다. 그런데 다행히 핵 억지력의 효과로 미국이 적대 정책을 그만둔다니 북한도 핵을 가질 이유가 없게 됐다. 북한은 주권 국가로서 핵무기를 계속 보유할 수도 있지만, 핵 보유의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판단에 따라 자주적으로 핵 폐기 결심을 했다. 비핵화는 누구의 강압과 제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공동 성명은 정확히 어긋나는 두 논리 가운데 북한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우선 공동 성명은 두 나라가 동등한 주권 국가임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두 나라는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으니 새로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새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핵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화체제 전환이 불가능하므로 북미가 함께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이런 공동 성명의 내용으로만 보면, 김정은의 일방적인 승리가 분명하다.

■ 왜 공동성명은 미국입장을 뒤집어 놓았나?

공동성명에 미국의 논리가 반영되지 않은 것은 당연히 미국의 논리가 북한에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때 절대 핵 포기 하지 않겠다던 북한이었다. 그런데 선제적으로 비핵화 하겠다고 북한이 먼저 큰 결단을 내린 마당에 미국이 자기 논리를 강요하기는 어렵다. 미국으로서는 그런 입장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게 비핵화에도 실질적 도움이 된다. 북한 헌법은 핵보유국임을 명시했고, 노동당은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채택한 바 있다. 비핵화하려면 이걸 모두 파기해야 하고, 그걸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북한 입장이 반영된 공동성명이 나온 배경이다. 북한이 공동성명을 비핵화로 가는 통로로 삼겠다면 미국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아니,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승리는 곧 트럼프의 승리이기도 하다. 공동 성명이 북한의 논리 구조를 따랐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승리이지만, 김정은이 스스로 비핵화의 길로 가도록 유인했다는 점에서는 트럼프의 승리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공동성명은 김정은과 트럼프가 윈윈한 결과물이다.

■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준 선물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과 트럼프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는 거래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북미정상 회담에서 김정은에게 안긴 선물은 두 가지다. 바로 한미연합훈련 중단과 북한체제 인정이다. 특히 트럼프는 정상회담 과정, 그리고 회담 이후 줄기차게 미국이 북한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나아가 김정은의 리더십을 칭찬하며, 북한 인권 문제로 북한을 압박하지 않았다는 미국내 비판도 반박함으로써 사실상 북한에 체제 안전 보장을 제공했다. 이는 트럼프가 북한이라는 국가를 사실상 정치적으로 승인하고, 김정은 정권의 안정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것은 분명 북한에게 ‘사변적인’ 일이다. 북한이 이례적으로 북한 주민을 상대로 북미정상회담 성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을 보더라도 북한과 김정은에게 정상회담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다. 김정은이 집권 7년 반 만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못한 업적을 이룬다면 권력의 정통성은 강화될 것이다.

■ 김정은이 트럼프에 준 선물

물론 김정은이 선물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김정은은 비핵화 의지를 확인해줌으로써 트럼프를 안심시켰다. 미군 유해 송환이란 선물도 안겼다. 미군 유해 송환은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라는 점에서 중간 선거에 더 할 나위없는 호재이다. 김정은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엔진 실험장 폐쇄 약속 역시 적지 않은 선물이다. 엔진 실험장 폐쇄 약속은 북한의 대미 위협 제거를 실행하겠다는 것이므로 미국 내 트럼프 비판론을 잠재우고 비핵화의 진전을 과시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업무오찬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 AP=연합뉴스

역사적 첫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업무오찬을 마친 뒤 산책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 AP=연합뉴스

■김정은과 트럼프의 정치적 품앗이- 공화국 창건 70주년과 중간 선거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공화국 정부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월 9일을 국가적 대경사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따라서 늦어도 7월, 8월 중 가시적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로 인해 이 짧은 시간 동안 경제적 성과를 내놓기 어렵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대외관계로 눈을 돌리는 수 밖에 없다.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 관계에서 돌파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런데 김정은은 트럼프와 역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한데 이어 북측의 입장을 반영한 공동성명도 내고, 두 정상간 직접 전화 통화 약속도 했으며, 평양과 워싱턴 교환 방문에 합의한 것은 물론 북한 체제 인정도 받았다. 9월 9일의 업적으로 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트럼프도 11월 중간 선거에서 북한 핵무기 위협 제거의 성과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북한이 엔진 실험장 폐쇄로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을 폐기하는 조치를 한다면, 트럼프에게 적지 않은 업적이 될 것이다.

이렇게 두 정상은 순수하게 국내정치적인 사정만으로도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이유가 있다. 만일 ‘9월의 성과’가 ‘11월의 성과’로 이어진다면 북미관계 개선과 비핵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CVID가 사라진 이유

CVID는 북한이 잘못된 행동을 했고 그 잘못을 외부 세계의 강제로 해결하겠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공동성명은 그 반대 논리, 즉 미국이 먼저 대북 적대 정책을 폐기하고, 그에 따라 북한 스스로 비핵화를 결단하는 방향으로 되어 있다. 북미 대화가 진행되는 한 더 이상 미국 쪽에서 CVID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북미가 대립할 때는 대북 압박용으로 CVID라는 개념이 중요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비핵화 입장을 확실히 했다. 공동 성명은 “김정은 위원장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한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약속을 재확인했다”고 명시했다. 북한이 이같이 비핵화 의사가 확인된 이상, 일종의 기 싸움 성격을 띠고 있는 ‘CVID 압박’은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 향후 과제는 CVID 같은 공허한 개념 논쟁이 아닌, 언제, 어떻게 비핵화 할 것이냐 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는게 바람직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오르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정된 시간보다 약 30분 빠른 이날 오후 6시30분(현지시간·한국시간 오후 7시30분)쯤 전용기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싱가포르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뒤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오르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예정된 시간보다 약 30분 빠른 이날 오후 6시30분(현지시간·한국시간 오후 7시30분)쯤 전용기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싱가포르 로이터=연합뉴스

싱가포르 회담 성과는 따로 있다


■ 성과 1 - 김정은·트럼프 간 초기 신뢰 구축

조선중앙통신은 싱가포르 회담 전 날인 11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력사상 처음으로 진행되는 조미수뇌회담에서는 달라진 시대적 요구에 맞게 새로운 조미관계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문제,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문제들을 비롯하여 공동의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한 폭넓고 심도 있는 의견이 교환될 것이다.” 이는 12일 오후 발표한 공동성명의 문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북미가 12일 회담 당일 오전까지 실무 협상을 하는 등 의제 합의에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조선중앙통신 보도로 미루어 성명의 문안은 두 정상이 싱가포르 도착 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회담에서는 공동성명의 마지막 4항 미군 유해 송환 합의만 추가되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이는 이번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공동성명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워싱턴 포스트도 트럼프 조직에 오랫동안 활동했던 인물을 인용해 트럼프가 싱가포르에 간 것은 “협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트럼프의 초점은 직접 만나는 것, 유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북미는 일찌감치 공동 성명에 원론적인 내용을 담는 것으로 정리하고, 정상간 신뢰를 쌓는 문제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성명에는 “상호 신뢰 구축이 비핵화 촉진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갔지만. 결과적으로 북미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두 지도자간 초기 신뢰 구축이다.

김정은은 회담에서 “내 책상의 핵 단추를 없애 버리게 한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의 역량” “ 전 세계 사람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존경해야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서 트럼프와 좋은 관계를 갖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미국언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다. 트펌프 역시 “나는 그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이 정말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트럼프는 “1분만 이야기 하면 진정성을 알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서로 잘 알게 됐다. 나는 상대가 거래를 원할 때와 원하지 않을 때를 잘 안다.”

텍스트에 갇히기보다 텍스트를 넘어 회담 전후 양 정상의 태도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1994년 북미간 제네바 합의는 핵동결 로드 맵을, 2005년 6자간 9·19 공동성명은 핵 동결 및 폐기 로드 맵을 담고 있다. 하지만, 북미는 서명하고 돌아서자마자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갈등하고, 성실히 합의 이행을 하지 않았고, 속이기까지 했다.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은 자신이 성실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약화시켰고, 결국 합의는 깨졌다. 아무리 책상에 앉아 로드 맵을 잘 만들었다 해도 불신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번 공동 성명에 비핵화 조치에 관한 구체적 합의는 전혀 없었지만, 회담이 끝난 뒤 두 정상이 서로를 존중하고 합의 외의 조치를 상호 약속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두 정상 간 초기적 신뢰 구축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김정은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린지 그레엄 공화당 의원은 “아부로 핵무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아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 해결에는 탑다운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이상 이번에 축적한 정상 간 신뢰를 바탕으로 향후 정상간 협상을 하면 그만큼 성공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공동성명이나 로드 맵 보다 두 정상간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핵 검증 및 폐기 과정에서 잘 드러날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핵 포기 의지가 강하다 해도 미국이 핵 검증을 위해 북한 의 모든 군사시설과 민감 지역을 샅샅이 뒤지도록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주권 국가도 상대에게 그와 같은 무제한적인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는 않는다. 그러므로 핵 검증 및 폐기 과정에 불신과 의심이 고개를 들 수 있고, 그로 인해 완전한 비핵화가 실패할 수 있다. 상호 신뢰가 없으면 핵 폐기를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감췄다고 의심받는 핵관련 물질과 시설을 찾고 숨기는 숨바꼭질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제네바 합의처럼 파탄날 수 있다.

그러나 신뢰가 굳건하다면, 숨기고 찾는 숨바꼭질 대신 북한은 숨김없이 신고, 검증, 폐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조치를 믿음으로써 핵 폐기 과정의 종료를 선언할 수 있다. 일부 전문가는 북한이 잠재적 핵 국가로서의 능력 까지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일단 북미간 핵 폐기 종료 선언을 하면 잠재적 핵능력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종료 선언은 곧 북미간 국교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으로 이어지면서 ‘잠재적 능력’의 쓸모를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특히 평화체제가 공고해지면 잠재적 능력을 가졌다 해도 능력을 발휘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불필요한 능력을 조용히 제거할 수도 있다. 또 잠재적 능력은 주변국이 평화관리에 유념하도록 경각심을 주는 자극제의 기능도 할 수 있다.

■ 성과 2 - 종전 선언 효과

본래 종전 선언의 의도는 핵 폐기 완료까지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으로 간주하고, 핵 폐기 과정에 북한에 잠재적 체제 보장을 함으로써 핵 폐기를 지속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미 모두 핵 폐기 기간을 최대한 짧게 하자는데 뜻이 모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종전 선언의 절박성은 떨어진다. 게다가 트럼프가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발표하는 등 북한 체제 보장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 종선 선언은 이제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기는 어렵게 됐다. 북미 대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나타난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남북미 3국이 종전 선언을 이미 약속했으므로 없는 일로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종전 선언을 한다면, 본래의 효과 보다 당사국들이 만나 비핵화의 의지를 다지는 상징적 행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성과 3 - 로드맵 없는 로드맵

공동 성명 밖을 보면 공동성명의 안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로드맵 작성은 못했으나 공동성명 밖에서는 이미 로드맵 작성된 듯 비핵화 과정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북미가 북한 미사일 엔진 실험장 폐쇄와 한미연합 훈련 중단을 맞교환하고 정상간 상호 방문하기로 하는 것은 물론 후속 회담을 통해 비핵화를 가속화한다는 합의도 했다. 북미가 알맹이 없는 합의를 하고도 알맹이 있는 실천을 하는 이상한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북미 양측에 눈에 보이지 않는 로드 맵, 마음의 로드맵이 있는 듯하다.

이대근 논설주간

이대근 논설주간

그러므로 현 북핵 국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텍스트 밖, 컨텍스트를 잘 살펴봐야 한다. 북한은 국가 발전 노전의 전환, 핵 실험장 폐쇄, 북한내 완전한 비핵화 합의 공개 등 비핵화를 위한 내부 조치를 취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 요구 보류, 연쇄 정상 회담을 통한 비핵화 의지 표명, 트럼프에 대한 우호적 제스처 등 대외적 조치도 하고 있다. 핵시설 폐쇄의 물리적 조치와 노선 전환 등 정책적 조치도 동시에 하고 있다. 회담 전의 언행과 회담 후의 언행도 다르지 않다. 말과 행동도 일치한다. 비핵화를 의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듯하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있기는 하다. 북한 최고 지도자의 결심이다. 김정일은 “나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세상은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한국의 미래를 예언하는 트럼프

한국의 금기사항을 트럼프가 거침없이 깨고 있다. 북한 핵 폐기를 위해 주한미군도 철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한미동맹, 주한미군이 북한 위협 요인이므로 그걸 제거하면 북한 문제도 해결되는 것 아니냐는 단순 명쾌한 계산법이다. 물론 돈 안 드는 해결책을 찾은 결과일 수도 있다. 주한미군 감축 혹은 철수로 비용도 절약하고, 북한 문제도 해결하는 일거양득이라고 판단했을 법 하다.

한국인은 이런 식의 접근법에 전혀 익숙치 않아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일이다. 한국시민들도 고민해야 한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