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서원 유사들과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자 서원 유사들과 관계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중종실록>에 사관의 평을 빌려 언급된 ‘서원의 효시’ 기사는 다음과 같다.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안향(1243~1306)의 옛집터에 사당을 세워 봄·가을에 제사지내고 이름을 백운동 서원이라 했다.”

안향이 누구인가. 이땅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이다. 주세붕은 안향의 사당만 지은 것이 아니었다. “서원 좌우(동·서재)에 유생들이 거처할 것을 마련했고, 유생들의 배움터, 즉 학교를 세웠다”고 했다. 서원은 ‘약간의 곡식을 저축하여 밑천은 간직하고 이자를 받아’ 운영했고, 고을 백성 중 똘똘한 자들을 모아 교육시켰다“고 덧붙였다. 서원터를 닦으려고 흙을 파내다가 우연히 구리 300근을 발굴했다는 기사가 흥미롭다. 요즘으로 치면 서원 조성을 위한 구제발굴에서 구리 300근이라는 유물을 확인했다는 기사가 아닌가. 그렇게 수습한 구리를 서울로 가져가 유교 경전 뿐 아니라 정주(程朱·송나라 유학자인 정호·정이 형제와 주자를 일컬음)의 서적까지 구입해서 장서각(도서관)에 두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550년(명종 5년) 2월 11일 주세붕의 뒤를 이어 풍기군수가 된 퇴계 이황(1501~1570)이 막 왕위에 오른 명종(재위 1545~1567)에게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은 격려해줘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명종은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손수 짓고 편액(액자)과 서적, 노비까지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계승(紹)하여 닦는다(修)’는 뜻이다. 소수서원(백운동서원) 같은 서원을 임금이 손수 이름을 써서 액자(額)를 내린(賜) 서원이라 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주자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주세붕

물론 서원은 주세붕의 창작품이 아니었다. <명종실록>은 “주세붕은 남송의 유학자 주문공(주자·1130~1200)의 백록동 서원을 모방해서 서원을 만든 것”이라 했다. 주자는 이곳에서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1017~1173)를 제사 지냈는데,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은 바로 주자의 백록동 서원을 벤치마킹 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왜 서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서원이 아닌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을까. 물론 한국의 서원이 중국의 서원을 벤치마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서원은 중국과 다르다. 즉 중국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관료양성을 위한 준비기구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서원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이런 기능은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도 달랐다.

■은거했지만 불의에는 분연히 일어난 서원

이황은 서원의 기능을 두고 “은거하며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를 강론하며 학업을 익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보다 한적인 들판이나 고요한 물가에서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천하의 의리를 살피면서 덕과 인을 쌓고 익혔기 때문에 서원에서 공부하는 것”이라 했다. 아무래도 국학(성균관·학당)이나 향교 등은 과거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황의 언급을 정리하면 서원은 입시(과거)준비나 하는 곳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서원에서는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고 이끌어갔으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분연히 일어섰다. 단적인 예로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이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6월 4일 항일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무성서원(전북 태인)이었다.

그랬으니 유네스코는 “서원들이 성리학 가치에 부합되는 지식인을 양성했고, 지역의 대표 성리학자를 사표로 삼아 제향(제사를 지냄)했으며, 무엇보다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했다”고 평가했다. 또 “신청유산이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도 꼽았다. 즉 16세기 서원들이 처음 생길 때부터 정형화한 건축유형은 후대의 서원 건축에 모델이 되었다. 서원은 크게 제향과 강학, 휴식 공간으로 나뉜다. 제향공간의 중심은 사당이며, 이곳에서 선현들을 위한 제사가 베풀어진다. 강학공간은 학습의 전당인 강당과 동·서재(기숙사)를 포함한다. 휴식 공간은 머리를 식히고 심신을 고요히 유지하는 수신의 영역이다. 각 공간은 지형과 경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뚜렷한 건축전형을 완성했다. 입지를 고를 때부터 무척 신경썼다. 그뿐 아니라 서원은 교육과 제향 외에도 장판각을 통해 책을 펴내고, 서적을 보관하는 도서관 역할을 했으며. 각 지방의 향약을 기준으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윤리에 어긋나게 행동한 자를 교화하는 기능도 겸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 문화재. 문화유산 13곳과 자연유산 1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 문화재. 문화유산 13곳과 자연유산 1곳이다. |문화재청 제공

■당쟁의 소굴이 된 서원

하지만 순기능만 발휘된게 아니었다. 정치주도권이 사림으로 넘어간 선조 연간(1567~1608)에만 60곳 이상이 생겼고, 그 중 22곳이 사액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붕당의 당파형성은 학연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각 당파는 당세의 확장을 위해 지방별로 서원을 세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향촌사림으로서도 서원을 통해 중앙관료와 연결을 맺어 입신출세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니 우후죽순 생길수밖에 없었다. 1741년(영조 17년)이 되자 서원과, 서원의 역할까지 한 사우 등을 합해 1000곳(정확히 909곳)에 이르게 됐다.

자연히 서원의 페해가 부각됐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서원이 각각 색깔을 정해 구별하고 당파를 모으고 다른 당을 공격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부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서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고발하고 있다.(‘인사문·서원’)

이익은 특히 한 사람을 위해 여러 곳의 서원을 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우암 송시열(1607~1689)을 배향하는 전국의 서원(사우 포함)이 무려 44곳에 이를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00리 쯤 되는 작은 고을에 서원(사당 포함)이 수십곳에 이른다”면서 사원의 폐해를 낱낱이 고한다.

우후죽순 남설(濫設)된 서원은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도 가문과 학파의 성세를 자랑하는 짓에 지나지 않게 됐다.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됐으며, 세금과 부역 등을 면제하는 국가의 지원은 국가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가면갈수록 서원무용론을 넘어 서원철폐론이 대두되었다. 결국 1871년(고종 8년) 3월20일(음력) “백세토록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명을 하달한다. 이것이 유명한 흥선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폐령이다.

■미우나 고우나 조선을 지탱한 성리학 교육의 전형

물론 한국의 서원이 남긴 폐해 역시 반드시 만면교사로 삼아야 할 역사이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의 된서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한국의 서원은 누가 뭐라해도 조선을 지탱해온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자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지역의 인물을 제향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롤모델을 제시했고, 강학을 통해 학문을 계승했다. 그들은 교육에 필요한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교육시스템과 물리적 시설을 완성했다. 또한 사회교화와 정치활동 등 각종 활동의 근거지로 활용하면서 성리학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유네스코 세계위는 “신청유산은 한국의 성리학 발전과 서원유형의 정립과정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서원 9개로 구성됐다”고 평가했다. 유네스코는 또 16~17세기 건립된 신청유산들이 지금까지 원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보존·계승되었음을 인정했다. 특히 서원을 거쳐간 인물들이 남긴 전적이나 문집, 기문, 목판도 잘 보호·관리되고 있고, 제향의식도 창건당시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서원

이번에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곳 중 대표적인 9곳이다. 소수서원(경북 영주·1543년·안향)을 비롯해 남계서원(경남 함양·1552년·정여창), 옥산서원(경북 경주·1573년·이언적), 도산서원(경북 안동·1574년·이황), 필암서원(전남 장성·1590년·김인후), 도동서원(대구 달성·1605년·김굉필), 병산서원(경북 안동·1613년·류성룡), 무성서원(전북 정읍·1615년·최치원, 신잠 등), 돈암서원(충남 논산·1634년·김장생) 등이다. 9곳의 서원은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는 공통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특징도 지니고 있다.

예컨대 가장 먼저 설립된 소수서원은 한국 서원의 강학과 제향과 관련된 규정을 최초로 제시한 기본 모델이다. 맨처음엔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1243~1306)을 기렸다. 설립자 주세붕은 죽계사와 도동곡을 지어 배향된 선현을 제사지낼 때 부르게 했다. 두 곡은 안향과 중국의 유교선현인 공자·맹자 등을 찬양하는 이 서원의 교가인 셈이다. 소수서원의 또다른 특징은 방문자들의 출신, 관직, 이름 등이 적힌 방명록(심원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당시 소수서원을 방문한 인물의 문집에는 소수서원을 주제로 한 수천개의 문학작품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이 한국서원의 성지였고, 수많은 인물들이 성지순례에 나섰음을 일러준다.

남계서원의 주배향 인물은 경남 함양 출신 사림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정여창(1450~1504)이다. 서원에는 19세기까지 사림들의 기부내역과 관련된 장부인 <부보록>이 남아있다. 서원이 민간인인 사림주도로 자발적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한 서원이기도 하다.

옥산서원은 존재론·우주론 등의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고 토론을 주도했던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모셨다. 서원에는 19세기말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서명 상소인 만인소가 소장돼있다. 옥산서원에는 16세기 명필인 한호(1543~1605)와 19세기 명필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편액이 걸려있다.

도산서원은 제향인물(이황·1501~1570)의 강학처를 기반으로 건립됐다. 학문 및 학파의 전형을 이룬 대표적인 서원이다.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이황의 업적을 기념하고자 도산서원에서 7000여명이 참가한 특별과거를 치렀고, 여기서 거둔 3600장의 답안지를 직접 채점했다. 도산서원의 경관을 주제로 읊은 시문이 3000여점에 이른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모신 곳이다. 5살 연하의 인종(재위 1544~1545)의 세자시절 스승이자 벗이었다. 인종이 김인후에게 <주자대전>과 묵죽도(대나무 그림) 등을 하사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만에 의문사하자 문정왕후(1501~1565)와 왕후의 오빠인 윤원형(?~1565) 일파의 소행으로 믿었다. 김인후는 해마다 인종의 기일인 7월1일이 되면 뒷산에 올라 통곡했고, 평생 국정농단 세력(윤원형 일파)이 주는 관직을 거부했다.

도동서원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한 김굉필(1454~1504)을 모셨다. 성리학을 토대로 교육을 통한 후학양성에 집중한 사림이다. 서원은 제행절차의 하나인 음복례를 가장 엄격하게 진행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묘제와 서원 제향을 결합한 유일한 서원이다.

병산서원은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을 이끈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신 곳이다. 유명한 <징비록>과 <군문등록> 등도 병산서원에서 출판·인쇄했다. 한국 최초로 유생 수천명이 연명한 유소(儒疏·연명 상소)를 올렸고, 지역의 공론을 종합하고 산출하는 공론장의 기능을 수행한 서원이었다.

무성서원은 원래 태산현(태인) 군수였던 고운 최치원(857~?) 등을 모신 곳이었다. 특히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과 둔헌 임병찬 선생(1851~1916)은 바로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무성서원에서는 제향의례 전에 서원 입구에서 경내 건물 마당을 거쳐 제향공간까지 황토를 뿌리는 특이한 의식을 펼친다.

돈암서원은 17세기 조선의 예악 연구를 선도한 사림 김장생(1548~1631)을 기리는 서원이다. 이곳에서 예송논쟁과 같이 국가정책의 중요 이슈가 다뤄지기도 했다. 이 서원에는 김장생의 제자인 김집(1574~1656), 송준길(1606~1672), 송시열(1607~1689) 등 쟁쟁한 인물들이 추가로 배향됐다.

이들 9개 서원들은 성리학이 동아시아 전역에 확산되어 지역적인 특생을 지니며 꽃피운 중요한 사례라는 가치를 담고 있다. 건축학적으로도 한국 서원의 정형을 뚜렷하게 완성하면서도 각각의 독자성도 겸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적 가치가 뛰어나다,

(이 기사는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출고한 관련기사들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이기환의 팟캐스트 246회’를 들으시는 분들을 위한 참고자료입니다. 자세한 기사는 저의 블로그 ‘https://leekihwan.khan.kr/’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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