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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

이재덕 기자 · 석예다 PD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영상]

지난달 8일 정오 경기도의 한 농장, 1살 돼지 새벽이가 진흙 웅덩이 속에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일로, 이날도 오전에 대여섯 번 진흙 목욕을 했다. 이곳은 온전히 새벽이를 위한 농장이다. 녀석은 배, 사과, 바나나 같은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 새콤한 건 질색이다. 딸기, 한라봉, 금귤, 천혜향 등을 후원자들이 보내주지만 녀석은 냄새 한번 맡고는 땅을 파 묻어버린다. 송곳니가 잘려 있어 딱딱한 음식은 꺼린다. 예컨대 당근, 오이는 먹어도 단호박은 먹기 힘들다. 활동가 효경씨가 “호불호가 강한 아이”라고 새벽이를 소개했다.

이곳은 ‘생추어리(Sanctuary)’라고 불리는 곳으로 동물권 운동단체 DxE가 조성한 농장이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동물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라는 뜻이다. 생추어리는 한국에서는 첫 시도이지만, 미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미국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시작됐다. 도축장·농장 등에서 병들어 주저앉은 소, 죽어가는 양, 돼지 등을 데려와 넓은 생추어리에서 본래 습성대로 평생 살게 한다. ‘절도’와 ‘구조’의 경계에 있는 활동이다. 한국의 DxE 활동가 중에는 외국 생추어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다.

새벽이는 지난해 경기도의 한 양돈장에서 태어났다. 어미 돼지들은 ‘스톨’이라는 틀 형태의 작은 공간에 갇혀 산다. 이곳에서 꼼짝달싹 못하고 옆으로 누운 채 새끼 돼지 십여 마리에게 젖을 물린다. 가끔씩 어미돼지에 치이거나 깔려 죽는 새끼 돼지도 있고, 체중 미달로 태어났다가 결국 도태돼 죽는 새끼도 있다. 한밤 중 활동가들이 몰래 그곳에 들어갔을 때, 어미 돼지 옆에는 새끼돼지 사체가 쌓여 있었다. 환풍기가 돌고 있었지만 분뇨 냄새가 진동해 숨이 턱턱 막혔다. 그들은 태어난지 얼마 안된 돼지 새벽이와 노을이를 품에 안았다. 현행법상 ‘절도’에 ‘건조물 무단침입’이지만 이들은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활동가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들이 벌인 행위를 공개한다. 농장주가 고소하면 처벌받을 수 있지만 해당 농장주는 처벌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어미 돼지와 새벽이의 우리에 붙어있던 ‘모돈 현황표’에는 새벽이가 2019년 7월 9일 태어나 바로 꼬리를 잘렸고 송곳니도 뽑혔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도 새벽이의 짧은 꼬리 끝에는 작은 점이 있는데, 동그랗게 말린 꼬리 끝을 강제로 잘라낸 자리에 피딱지가 굳어 생긴 것이다. 좁은 곳에 갇힌 돼지들이 스트레스로 다른 돼지들의 꼬리를 물어뜯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끊어낸 것이다. 갓 태어난 새끼 돼지에게 벌어진 일들은 모두 ‘질 좋은 고기’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축산 농가에서 이뤄지는 작업이다. 새벽이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농장주에 의해 거세를 당했다. 거세하지 않은 수퇘지는 고기로 먹을 때 ‘돼지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이유에서다.

한밤 중 동물권 활동가들이 몰래 양돈장에 들어갔을 때, 어미 돼지 옆에는 새끼돼지 사체가 쌓여 있었다.  현행법상 ‘절도’에 ‘건조물 무단침입’이지만 이들은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 DxE 제공

한밤 중 동물권 활동가들이 몰래 양돈장에 들어갔을 때, 어미 돼지 옆에는 새끼돼지 사체가 쌓여 있었다. 현행법상 ‘절도’에 ‘건조물 무단침입’이지만 이들은 “대규모 공장식 축산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 DxE 제공

새벽이가 ‘구조’후 살게 된 생추어리 전경

새벽이가 ‘구조’후 살게 된 생추어리 전경

양돈장 돼지들은 구멍이 뚫린 철판을 딛고 산다. 돼지들의 똥·오줌이 철판 구멍 밑으로 떨어지면 한데 섞여 악취가 난다. 그곳에서 데리고 나온 새벽이와 노을이는 둘 다 영양실조에 심각한 곰팡이성 피부염을 앓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새벽이는 건강한 편이었다. 노을이는 다리 한쪽을 쓰지 못했다. 활동가 은영씨가 말했다. “노을이는 얌전하게 약을 받아 먹는 반면에, 새벽이는 덜 쓴 약을 줬는데도 ‘나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새벽이와 노을이를 데려올 때도 그랬어요. 노을이는 가만히 품 안에 있었는데 새벽이는 소리를 빽빽 질렀죠. 그런데 아이들이 같이 살면서 서로 영향을 받다보니까 노을이도 어느 순간 떼를 쓰기 시작하더라고요. 새벽이는 부엌에만 오면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노을이도 언젠가부터 부엌에만 오면 새벽이와 똑같은 소리를 내면서 ‘밥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을이가 죽었다.

새벽이는 임시 보호소를 거쳐 지난 5월 생추어리에 왔다. 이사 날 새벽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진흙 웅덩이에 들어가는 일이었다. 활동가 향기씨가 말했다. “새벽이가 진흙목욕을 단순히 체온조절만이 아니라 ‘놀이’로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웅덩이에 들어가 몸을 뒹굴뒹굴할 때도 있고, 때론 그냥 가만히 누워있기도 하고요, 코로 진흙을 파면서 웅덩이를 더 넓히는 경우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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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은 호기심이 많다고 하던데 새벽이를 보니 이해가 됐다. 새벽이는 이날 오후 생추어리 농장 주변을 40~50분 정도 걸었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마음대로 다녔다.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 한쪽에 가득 쌓인 종이상자, 농장 옆에 주차된 농기계 등을 지날 때는 코부터 들이댔다. 햇볕이 강했던 이날 새벽이 생추어리에는 그늘막이 추가로 설치됐다. 산책 후 그늘막 아래서 향기씨가 새벽이 몸을 쓰다듬었다. 녀석이 편안한 듯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오는 날, 혹은 날이 저물면 새벽이는 볏짚이 두둑이 깔려있는 쉼터로 들어가 잠을 잔다. 아무리 급해도 쉼터 안에서는 절대 ‘볼일’을 보지 않는다. 쉼터 밖 한쪽 귀퉁이가 새벽이의 화장실이다. 생추어리 농장은 새벽이를 위해 규모를 키울 예정이다. 현재 새벽이가 사는 곳은 100평(3300㎡)인데 뛰어놀기 좋아하는 새벽이에게는 비좁다. 활동가들은 생추어리 농장 앞 300평(9900㎡) 밭을 빌려 확장하기로 했다.

양돈장의 돼지들은 6개월만 살고 도축된다. 하지만 새벽이는 이달 초 한 살 생일을 맞았다. 돼지 평생인 10~15년을 이곳에서 살게 된다. 새벽이가 가장 잘 따르고 곁을 내어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한 향기씨다. “새벽이는 닭과 오리, 병아리, 기러기 새끼들이 수박 조각을 얻어먹으러 오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줘요. 약한 동물들에게는 공격을 하지 않아요. ‘상대가 날 무서워하는구나’ 싶으면 가만히 서서 먼저 올 때까지 기다려줄 줄도 알고요. 다만 모르는 인간에게는 방어적인데 그게 인간의 업보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속상해요. 새벽이에게 ‘자꾸 이러면 세상에 너랑 나랑 둘만 남겨질 수도 있어. 나는 모든 걸 케어해줄 능력은 안돼. 새벽아, 너도 다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단다’라고 말해줘요.”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영상]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영상]

지난해 온라인 상에는 DxE의 행동이 ‘절도인가, 동물 구조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향기씨는 새벽이의 인스타그램 계정 링크 ▶(www.instagram.com/dawn_thepig)에 새벽이 사진을 올릴 때마다 ‘#느끼는존재’라는 해시태그를 남긴다. 새벽이란 이름의 돼지가 개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존재라는 설명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거나 불편해 한다. 적어도 “일상의 균열을 내고, 의문을 던지는 활동을 한다(활동가 섬나리씨)”는 이들의 의도는 일단 성공한 듯 하다. 새벽이 생추어리 후원자도 모집(후원자 모집 링크 ▶ forms.gle/j6Rm57RwahopmSdA7)하고 있다.

향기씨가 말했다. “새벽이는 이미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요. SNS를 통해 새벽이를 본 사람들은 ‘돼지도 저런 걸 좋아하네’,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라는 말을 해요. 새벽이가 새벽이 답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동물들이 다 각자 개성이 있고 고유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별 생각 없이 먹던 돈가스나 삼겹살에 불편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분명 있어요. 새벽이는 ‘동물들이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장식 축사에 살면서 죽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요. 새벽이는 그 누구보다도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동물권 활동가라고 생각해요”

[관련 기사] 국내 최초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가다…‘고기’와 다른 삶 꿈꿔도 될까요 (기사 링크 ▶ https://bit.ly/3eO3BeN )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영상]
‘구조’ 돼지 새벽이, ‘생추어리’ 적응기[영상]

※자세한 내용은 기사 내 첨부한 영상이나, 유튜브 계정 '이런 경향'(www.youtube.com/thekyunghyangtv)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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