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삶이 흔들리자 우정도…노동계급 붕괴가 불러낸 인종차별, 그 근원을 들춰낸 세밀한 시선

문학수 선임기자

스웨트

린 노티지 지음·고영범 옮김|알마|212쪽|1만6000원

안정된 삶이 흔들리자 우정도…노동계급 붕괴가 불러낸 인종차별, 그 근원을 들춰낸 세밀한 시선

2000년 1월 어느 날이다. 미국 펜실바니아 공장지대 레딩타운의 오래된 바(Bar)에서 음악이 울려퍼진다. 실내는 낡았지만 쾌적하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산타나의 ‘스무스’(Smooth)가 점점 고조된다. 착착 감기는 리듬에 맞춰 신시아와 트레이시가 신나게 춤을 춘다. 신시아는 마흔다섯 살의 흑인, 트레이시는 동갑내기 백인이다. 둘은 다정한 친구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친밀한 감정이 녹아 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제시는 완전히 술에 취해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있다.

희곡 <스웨트>는 2000년과 20008년을 오가며 진행된다. ‘화제의 책’을 소개하는 이 지면에서 희곡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스웨트>는 문제작이다. 린 노티지(56)는 오늘날 영미권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특히 계급과 인종 문제가 끊임없는 작가적 화두다. <기쁨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1995>는 아내를 잃고 독일 여성을 새 아내로 맞은 흑인 남성 이야기다. <속옷>(2003)에서는 사람들의 속옷을 꿰메며 살아가는 흑인 여성의 삶을 다룬다. 첫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줬던 <폐허>(2008)는 내전의 콩고를 배경으로, 가해자인 남성들을 상대로 술과 몸을 팔면서 서로를 보호해주는 여성들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건 그렇고 베라 스타크를 소개합니다>(2011)에서는 1930년대 은막 스타였던 여배우를 시중드는 흑인 여성 스타크의 70 평생을 조명한다.

‘스웨트’(Sweat)를 직역하면 ‘땀’이고 좀더 의미를 확장하면 ‘노동’이다. 신시아와 트레이시, 제시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삼총사’다. 25년간 서서 일하느라고 “엄지발가락에 박힌 옹이가 사과만큼 커질”(신시아) 정도로 고된 나날이지만, 그래도 퇴근 후 술자리에서 하루의 피곤을 잊곤 했다. 하지만 2000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되고 미국 제조업체들이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면서 세 사람의 삶은 동시에 흔들린다.

작가는 새로운 장을 시작할 때마다 지금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문’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억만장자 포브스가 공화당 경선을 포기했다”든가, “레딩에서 화재가 발생해 엄마와 다섯 자녀가 홈리스가 됐다”라든가, “26세 남자가 우드워드 스트리트의 바를 나서다가 총에 맞았다”라든가, 심지어는 농구팀의 준결승전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개인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사회적 운명’에 대한 암시다.

‘오래된 바’는 친구들의 쉼터였으며 같은 공장 노동자인 그들이 연대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인 그곳은 극의 후반부에 ‘파국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적 차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안정된 삶이 흔들리자 우정도 함께 무너진다. 노동계급의 붕괴와 인종 문제를 연결하는 작가의 시선이 세밀하다. 흑인 여성작가 노티지는 이 작품으로 2017년 두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생동하는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재미, 가슴 아릿한 감동, 비극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가의식 등을 두루 갖춘 문제작이다. 한국 국립극단이 4일부터 무대에 올리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취소됐다. 국립극단 측은 “10월 중 온라인 공개 예정”이라고 밝혔다. 안경모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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