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다리 르포

‘왜 휴일에 쉬지 못합니까?’…50년 전 설문은 지금도 유효했다

김경학 기자·유명종 PD

평화시장 인근서 마주한 사람들…“당신의 일은 안녕합니까”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40분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품은 채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가 택한 장소는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가서 약속장소·쉼터로 유명하고, 일자리 정보 교환도 많이 이뤄져 일명 ‘인간시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5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은 이들이 오가는 삶의 터전이다. 평화시장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전태일다리(왼쪽 사진)와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40분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품은 채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가 택한 장소는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가서 약속장소·쉼터로 유명하고, 일자리 정보 교환도 많이 이뤄져 일명 ‘인간시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50년이 지난 현재도 많은 이들이 오가는 삶의 터전이다. 평화시장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전태일다리(왼쪽 사진)와 인터뷰에 응한 시민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전태일이 만든 내용 그대로
시민들에게 설문지 돌려 보니
“지금 물어도 이상하지 않다”
“현재도 노동법 안 지켜 문제”

일을 하며 살아내는 사람들
노동환경·처우 열악하지만
그럼에도 나아질 거라 믿어

반세기가 지났다. ‘50년’이란 절대적인 시간도 길지만, 그 사이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는 어느 국가·사회의 것보다 빨랐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알고 있을까. 50년 전과 지금의 노동환경은 얼마나 달라졌고, 또 어떻게 변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전태일 50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달 14일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그곳을 찾았다.

서울 중구 평화시장 5번 출입구 쪽 바닥에는 동판(표지석)이 있다. 전태일이 분신했던 자리다. 그 앞에는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다. 청계천 복원 당시 ‘버들다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전태일다리’로 더 많이 불린다. 다리 한가운데 전태일 동상이 있기 때문이다. 동상과 표지석이 설치된 것은 2005년으로 전태일재단(당시 전태일기념사업회)과 노동시민사회단체 등이 35주기 행사를 하며 만들었다. 표지석이 하나 더 있는데 이는 서울시 차원에서 만들었다.

오전 10시. 전태일다리에선 1시간 뒤 열릴 ‘전태일 추모의 달’ 선포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전태일 50주기 행사위원회가 주최하는 이 선포식에는 청년·코로나19 피해 노동자 등이 참석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이라는 가사가 담긴 ‘전태일 추모가’도 울려 퍼졌다.

오후 1시,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를 오갔다. 원단이나 의류 부자재 등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한두 개씩 들고 바삐 걷는 이들이 다수였고, 수레로 짐을 옮기는 이들도 있었다. 행인들 다수는 20·30대였다. 젊은 세대에게 전태일은 어떤 사람일까. 부모님이 운영하는 의류 도매점에서 일하는 신모씨(21)는 전태일을 알고 있었다. “이곳을 자주 지나다니는데 10살 때쯤 큰 동상이 있어서 부모님께 여쭤봤어요. 부모님이 ‘근로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해서 사회에 알린 분’이라고 말씀해주셨지요.”

전태일다리 양쪽에는 벤치가 6개씩 놓여 있다. 상인들은 벤치에 앉아 잠깐 쉬기도 하고, 전화를 하며 업무도 본다. 16세 ‘시다’로 평화시장에 첫발을 들여 ‘재단사’가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모범업체 ‘태일피복’ 설립을 추진했다. 한쪽 눈을 기증해서라도 투자를 받으려 했지만, 결국 좌절했다. 의복업체를 운영한 지 6년째인 조진성씨(31)는 청년 자영업자 입장에서 5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조씨는 “금전적인 부분이 가장 힘들다. 분기마다 국가(또는 지자체)에 사업 지원 신청을 하는데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원 요건을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안 되는데, 자금이 없으니 실적이 크게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그러다 보니 항상 제자리에서 맴도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오후 2시. 다리 위엔 행인만큼이나 많은 오토바이가 지나다녔다. 의류 자재를 운반하는 강학청씨(60)는 “전태일의 숭고한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날 산업환경이 많이 바뀌고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전태일과 같은 열사가 나와 잘못된 건 잘못됐다 말하고 고쳐져서, 모든 분들이 대우받고 사는 그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태일다리와 가장 가까운 카페 주인 윤기인씨(59)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했다. 30년 전 헌책방으로 영업을 시작했던 윤씨는 책을 읽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10년 전 업종을 바꿨다. 그는 청계천 복원으로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긴 점을 아쉬워했다. “환경이 깨끗해지고 경치가 정리된 건 좋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리) 밑으로만 다니잖아요. 주변 상점들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전태일다리 아래’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청계천변인 다리 아래엔 산책이나 조깅을 즐기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자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50년 전 돌렸던 설문지를 건넸다. ‘왜 휴일에 쉬지를 못합니까?’ ‘1일에 몇 시간 일을 하십니까?’ ‘그만한 시간이면 당신 건강에 어떤 영향을 줄 것 같습니까?’ 등의 50년의 간극이 무색할 정도로 당시의 질문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에 응답자들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서비스업에 종사한다는 우모씨(47)는 “지금 물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문항들”이라며 “(50년 전과 비교해) 바뀐 건 없는 것 같다. 조금씩 개선은 되고 있겠지만, 체감은 잘 못하겠다”고 말했다. 패션업계에 종사하다 휴직 중인 원모씨(47)는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노동법을 안 지켜서 문제”라며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노동자로 일하는데, 학교에서 (노동법 같은 건) 왜 안 가르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전태일 100주기가 되는 50년 뒤라면 상황은 좀 달라질까. 인공지능(AI) 등의 발달로 아예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씨는 “사실 제가 하고 있는 일 자체가 기계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다. 항상 ‘언제든 인력을 감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5시.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다리 위보다 아래 청계천변을 지나는 행인이 늘었다. 거의 매일 청계천을 산책한다는 40대 후반 A씨는 “다리 밑으로만 다니니까 죄송하게도 동상이 위에 있는 것도 몰랐고, 기념적인 인물의 다리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정혜연씨(21)와 김수정씨(21)도 전태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두 사람은 미용실 정규직 스태프 일을 하다 올해 초 퇴사했다. 급여는 적은데 쉬는 날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김씨는 “주 5일 일하긴 하지만 배우면서 하는 일이라 휴무일에도 나가야 하고, 새벽에 퇴근할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월 급여는 100만원가량이었다. 50년이 지나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노동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오후 8시, 화려한 조명이 감도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쪽과 달리 부자재 위주인 다리 쪽 상가는 오가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25년차 직장인 문모씨(47)는 대구에서 놀러왔다고 했다. 그는 경쟁이 치열한 지금의 노동환경을 우려했다. “지금도 ‘너무 못 참겠다’며 투신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잖아요. 우리(세대)가 투쟁해서 쟁취했던 것들이 자식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싶어요. 사업주나 기업주에게 너무 많이 빼앗기는 (이런 환경을) 물려주기 싫은 게 솔직한 부모 마음이에요.”

오후 10시, 다리 아래를 걷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법학전문대학원생 장은진씨(30)는 한 달에 한두 번씩 산책하러 나온다. 그는 50년 전에는 노동 현실이 법을 따라가지 못했는데, 현재는 법이 다양해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점을 지적했다. 장씨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택배노동자나 (유튜버 등) 노동자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경우도 많아지며 경계가 애매해지고 있다”며 노동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제안도 했다. “돈만 있으면 노동을 쉽게 살 수 있다는 인식이 너무 강한 것 같아요. 코로나19 때문에 배달을 많이 이용하는데 너무 편리하더라고요. 편리함에 익숙해지니 노동하시는 분들의 가치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노동의 가치를) 구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다음날 오전 6시40분, 날이 밝자 다리 위에선 조윤호씨(35)가 간밤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종로구 소속 5년차 환경미화원인 그는 전태일다리를 1년째 청소하고 있다. 매일 아침·오후, 두 차례 동상을 마주하는 조씨의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청소와 관련한 민원이 늘고 빠르게 응대해야 하며 휴게실까지 거리가 멀어 힘든 면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앞으로 노동환경이나 처우가 더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24시간 동안 전태일다리 위와 아래에서 만난 이들은 대부분 일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왔거나 살아내고 있었다. “전태일은 요즘으로 치면 ‘잘 나가는 정규직 재단사’였다. 봉제업이 잘 나가던 시절이라 마음만 먹었으면 아마 사장이 돼서 돈을 많이 벌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보다 처우가 좋지 않은, 시다와 미싱사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12㎞ 넘는 거리를 걷고 뛰며 퇴근했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오로지 ‘나’만 생각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는데 전태일의 나눔·연대의 정신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한석호 전태일재단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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