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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사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전태일(전태일재단 제공)과 한미사 공장 위치로 추정되는 평화시장 2층 내부. /권도현 기자

한미사 공장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는 전태일(전태일재단 제공)과 한미사 공장 위치로 추정되는 평화시장 2층 내부. /권도현 기자

반세기 전 오늘, 평화시장 앞에서 한 청년이 온 몸에 불을 붙이고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열사가 죽은 지 50년, 평화시장에서의 생전 모습과 장례식, 그리고 사후의 모습들이 담긴 사진들을 사진 속 장소에 조심스럽게 얹어 보았다. 변화가 일상인 도시에서 50년 전 청년 전태일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열사와 가족들이 살던 쌍문동 208번지 판자촌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바보회’ 설립 당시 독사진을 찍었던 평화시장 옥상 뒤로는 쇼핑몰이 높게 솟았다. 열사의 분신 당시 옆에 있던 동료는 일흔살이 되었고, 그의 사후 조직된 ‘청계피복노조’의 조합원들은 대부분 환갑을 넘겼다. 그가 떠나고 많은 것이 변했지만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전태일을 기억하는 시민 50여명은 그가 배고픈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집까지 걸었던 길을 반세기가 지나 함께 걸었다.

평화시장 옥상, 바보회를 만들 즈음의 전태일(전태일재단 제공). /권도현 기자

평화시장 옥상, 바보회를 만들 즈음의 전태일(전태일재단 제공). /권도현 기자

1965년 17살의 ‘시다(견습공)’로 평화시장에 발을 들인 전태일의 눈에 어린 여공들이 들어왔다. 14시간 넘도록 햇빛 한줄기 들지 않고 먼지가 날리는 다락방에서 일하는 열세살 남짓의 소녀들이었다.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10여명의 재단사를 모아 1969년 6월 허름한 중국집에서 ‘바보회’를 만들었다. 기계 취급을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 번 못 하고 살아왔다며 지은 이름이다. 바보회 활동으로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해고됐고, 모임도 흐지부지 됐다.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 수도원 공사현장에서 일했던 전태일은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만든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쌍문동 208번지 전태일 열사의 집 인근에서 찍은 이소선 여사와 현재 서울 도봉구 삼익세라믹아파트 (전태삼씨 제공).  오른쪽에 보이는 112동이 전태일 열사의 집터가 있던 곳이다. /권도현 기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쌍문동 208번지 전태일 열사의 집 인근에서 찍은 이소선 여사와 현재 서울 도봉구 삼익세라믹아파트 (전태삼씨 제공). 오른쪽에 보이는 112동이 전태일 열사의 집터가 있던 곳이다. /권도현 기자

1987년 2월 20일 전태일 열사의 집 앞 이소선 여사와 가족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열사의 집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는 사유지에 만든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구청직원들이 집을 철거하면 전태일은 벽돌을 한 장씩 더 추가하여 공간을 넓혔다. 그렇게 그가 넓힌 공간에는 열사 사후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과 수많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 권도현 기자

1987년 2월 20일 전태일 열사의 집 앞 이소선 여사와 가족들(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열사의 집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는 사유지에 만든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구청직원들이 집을 철거하면 전태일은 벽돌을 한 장씩 더 추가하여 공간을 넓혔다. 그렇게 그가 넓힌 공간에는 열사 사후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과 수많은 민주화운동·노동운동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 권도현 기자

바보회를 만들 즈음 전태일은 자신의 버스비로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당시 쌍문동 집까지 약 13㎞가 되는 길을 3시간 넘게 걸어다녔다. 당시 시다로 일했던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69)는 형과 함께 퇴근을 하다 학교를 다니고픈 마음에 고려대학교 풀밭에 눕기도 했다. “어머니가 집 뒤 포도밭에 나와서 항상 우리가 올 때까지 기다리셨어요. 그 때 수제비를 먹었는데 미리 만들어 놓으면 다 불어트니까 우리 오면 만들어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셨던거예요. 어머니의 옷이 이슬에 다 젖어있었습니다. 그럼 난 어머니를 안아드리고 형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어요.”

지난 8일 열사 분신 장소인 서울 중구 평화시장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김영문씨. 전태일과 같은 평화시장 2층에서 일했던 그는 “태일이가 죽기 전 9월 같이 낙원극장에서 봤던 영화 ‘스잔나’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지난 8일 열사 분신 장소인 서울 중구 평화시장 앞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김영문씨. 전태일과 같은 평화시장 2층에서 일했던 그는 “태일이가 죽기 전 9월 같이 낙원극장에서 봤던 영화 ‘스잔나’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전태일과 함께 삼동회 활동을 했던 김영문씨(70)는 열사의 분신 당시 옆에 있었다. “저를 부르고 몇 발자국 떼더니 몸에 불을 붙였어요. 외투로 불을 끄다 안되니까 경비들이 소화기를 들고 왔죠. 온몸에 불이 붙어서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습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던 그는 금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신 직후 그는 열사의 집으로 달려가 이소선 여사를 병원으로 모셔왔다. 김씨는 열사가 생전에 말버릇처럼 “두세 명은 죽어야 개선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1970년 11월 21일 오열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운구를 운반하는 모습과 서울 도봉구 갈릴리교회(옛 창현교회)의 모습. 그의 관 옆으로 ‘삼백만노동자대표 전태일’이라는 띠가 보인다. / 권도현 기자

1970년 11월 21일 오열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운구를 운반하는 모습과 서울 도봉구 갈릴리교회(옛 창현교회)의 모습. 그의 관 옆으로 ‘삼백만노동자대표 전태일’이라는 띠가 보인다. / 권도현 기자

전태일 장례식 후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열사의 묘 앞 동네 친구들과 현재 열사 묘지의 모습(전태삼씨 제공). / 권도현 기자

전태일 장례식 후 경기 남양주시 모란공원 열사의 묘 앞 동네 친구들과 현재 열사 묘지의 모습(전태삼씨 제공). / 권도현 기자

1970년 11월 13일 “배가 고프다”며 눈을 감은 전태일의 장례식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톡릭성모병원(현 명동성당가톨릭회관)에서 숨진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고 말을 남겼다. 여사는 근로조건 개선 등 전태일이 요구했던 8가지 내용을 내걸고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이소선 여사에게 6000만원이 든 통장과 동대문다방 영업권리 등을 들고 와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종용하기도 했지만, 여사는 거부했다. 결국 11월 16일 당시 노동청장이 요구조건을 수락했고, 열사의 장례식은 11월18일 그가 다니던 창현교회(현 갈릴리교회) 인근 공터에서 열렸다. 그의 장례식에는 평화시장 동료들과 여공들, 쌍문동 주민들과 친구들이 참석해 열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1980년 4월 15일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체결을 위한 투쟁을 하기 위해 사무실 옥상에서 투쟁 준비를 하는 청계피복노조원들.과 현재 평화시장 옥상의 모습. /권도현 기자

1980년 4월 15일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체결을 위한 투쟁을 하기 위해 사무실 옥상에서 투쟁 준비를 하는 청계피복노조원들.과 현재 평화시장 옥상의 모습. /권도현 기자

1980년 4월 15일 청계피복지부 사무실 안에서 인금인상 및 단체협약체결을 위해 투쟁 중인 어린 여공들과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전태일 특별전시 ‘청계, 내 청春, 나의 봄’을 둘러보는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 / 권도현 기자

1980년 4월 15일 청계피복지부 사무실 안에서 인금인상 및 단체협약체결을 위해 투쟁 중인 어린 여공들과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전태일 특별전시 ‘청계, 내 청春, 나의 봄’을 둘러보는 청계피복노동조합원들. / 권도현 기자

전태일의 분신 2주 뒤인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세워졌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유신정권의 노동탄압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하고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열사 사후 50년이 지나 당시 청계피복노조에서 활동했던 노동자들이 지난 8일 전태일 기념관에 모였다. 이들은 전태일 특별전시에 걸려있는 ‘노동가’를 함께 부르며 노조활동 당시를 추억했다.

대학로 일대를 행진하는 전태일열사추모노동자대회 참가단(1985.11.08)과 지난 7일 전태일 퇴근길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권도현 기자

대학로 일대를 행진하는 전태일열사추모노동자대회 참가단(1985.11.08)과 지난 7일 전태일 퇴근길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박용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권도현 기자

전태일이 집을 향해 걷던 대학로에서는 그의 사후 ‘전태일열사추모노동자대회’가 열렸고 노동자들이 행진을 했다. 지난 7일에는 열사의 퇴근길을 따라 걷는 행사가 열렸다. 시민들은 전태일다리에서 시작해 그가 살던 쌍문동 208번지로 향했다. 행사에 참여한 임영빈씨(71)는 “여기 열사가 살았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막상 퇴근길을 걸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요새 전태일3법이다 뭐다 말이 많은데 열사 정신을 되새겨서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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