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퍼스트레이디의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그 이상을 실현하다

장영은

엘리너 루스벨트

세계인권선언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이기 이전에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세계인권선언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이기 이전에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가장 뛰어넘기 힘든 장애물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최대의 복병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유년기와 사춘기를 줄곧 두려움과 싸우면서 보냈던 것 같다. 덜 떨어진 아이였던 나는 어둠이 무서웠고, 쥐가 무서웠다. 사실 세상 온갖 것이 내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일일이 응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57년 12월10일, 73세의 엘리너 루스벨트는 ‘인권의날’을 기념해 내슈빌을 방문했다. 당시 스칼릿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35세의 이희호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엘리너 루스벨트의 환영 행사를 준비했다. 그녀를 “존경했으므로 뜨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희호는 1948년 12월10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세계인권선언문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세계인권선언 제1조를 주창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을 역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아내이기 이전에 “여성과 흑인 등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이희호는 엘리너와 “악수하던 손의 따뜻한 감촉”을 먼 훗날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희호 여사(앞줄 가운데)는 미국 유학시절인 1957년 엘리너 루스벨트와 만났다.

이희호 여사(앞줄 가운데)는 미국 유학시절인 1957년 엘리너 루스벨트와 만났다.

이희호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기에 안타깝게도 “한국 여성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단계에도 오지 못했다.” 게다가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54년에 실시된 3대 민의원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순천의 선거 유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박순천은 낙선하고 말았다. 이희호는 엘리너와 같은 여성 정치인이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을지” 당시로서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내슈빌에서 엘리너를 만났던 날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7년 12월에 이희호는 남편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게 된다. 이희호와 엘리너의 만남은 필연이었을까? 이희호가 “나는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었나 보다”라고 회고한 것처럼, 엘리너도 마치 운명처럼 정치와 만났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1884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여덟 살 되던 해인 1892년에 어머니가 전염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다. 2년 후인 1894년에는 엘리너에게 “삶의 중심”이자 “사랑의 원천”이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라는 사실조차도 엘리너에게는 버겁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마치 ‘미운 오리새끼’ 같았다. 열 살에 이미 ‘애늙은이’가 되었다.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엄격하고 교육열이 높았던 외할머니가 엘리너를 5년 동안 맡아 길렀다. 엘리너는 15세에 ‘교양 교육’으로 명성이 높았던 영국 런던의 알랜우드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배웠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모를 잃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생긴 열등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신의 동의 없이는 아무도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한 엘리너.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한 엘리너.

부모 잃고 두려움·열등감과 싸웠던 유년기 거쳐
프랭클린 루스벨트와의 만남

3년 후, 미국으로 돌아온 엘리너는 먼 친척뻘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프랭클린은 “푸른 눈이 반짝이는” 엘리너의 총명함에 큰 매력을 느꼈다. 엘리너는 미남에 멋쟁이였고 박학다식한 프랭클린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두 사람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905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야심가였다.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1907년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정계에 뛰어들었다. 1910년에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13년부터 1920년까지 윌슨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승승장구하던 프랭클린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1921년에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두 다리가 불편해졌다. 엘리너는 프랭클린의 권력 의지와 정치적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랭클린에게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격려했다. 프랭클린의 치료에 집중하며, 때를 기다렸다. 3년 후인 1924년에 프랭클린은 정치를 재개한다. 1929년에 뉴욕 주지사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한 프랭클린은 1933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4선 연임에 성공했다.

엘리너는 프랭클린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1920년대부터 여성 운동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여성유권자연맹, 여성합동입법협의회”에 가입했고, “민주당 국가위원회의 여성분과에도 참여했다.” 엘리너는 자립심이 강했고, 생활력도 남달랐다. 그녀는 사립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정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가구를 만들어 팔았다. 정책 토론회를 개최하고, 민주당 전당대회에도 여성 활동가들과 참여했다. 엘리너는 그 과정에서 “향후 정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매리언 디커먼과 낸시 쿡을 만나게 된다. 그들과 함께 “‘여성 민주 뉴스’라는 소식지”를 창간했다. 그들은 엘리너에게 “정치와 전략, 공공 정책에 관해 직접 가르쳐 주었다.” 1924년에 엘리너는 “여성들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대표자를 여성들이 직접 지명하게 해달라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엘리너는 1927년에 ‘여성시티클럽’의 의장으로서 “여성노조연맹과 협력해서 여성을 위한 휴양 프로그램을 만들고, 주거 및 임금 개선을 위한 캠페인을 만들었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미국에서 ‘급진적인 노동운동’이 큰 호응을 얻었지만, 엘리너는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을 연구했다. “실업과 근로조건 및 생활조건의 열악함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엘리너는 “최저임금 보장,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보호법, 아동노동 폐지, 노조 강화” 등 빈곤 취약계층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조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엘리너가 주장한 내용을 포함한 ‘뉴딜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발표했고, 유권자들은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보를 선택했다.

1933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엘리너는 백악관 입성을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직후에도 역사 교사로 근무했던 엘리너에게 한 학생이 “대통령의 부인이 선생님이라니 멋지다”라고 하자, 그녀는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답했다. 엘리너는 “자신이 퍼스트레이디인 것을 망각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녀는 소박한 삶을 유지하고자 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 시간에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이고 관습적인 의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대통령 부인 역할에 작별을 고했다. 엘리너가 여성 언론인들과 정기적으로 가진 공개 모임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그 기자 회견은 대단히 성공적인 홍보수단이 되었다.”

“여성이여, 융화적으로 강건하게 싸워라”
여성의 공적 참여 이끌고 유엔 인권위 의장 활동도

1947년 유엔에서 발언하는 엘리너.

1947년 유엔에서 발언하는 엘리너.

엘리너는 백악관에서 “여성을 위한 구호 프로젝트와 구호 행정에서의 여성의 역할 확대를 주장”하는 동시에 여성들에게 공직의 명예로움을 강조했다. 여성이 과감하게 도전하지 않으면 남성들의 전유물인 정치 영역에 진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치 생활은 불확실하니 정계에 입문하는 여성은 무엇인가 현실로 다시 복귀할 만한 일을 가져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엘리너는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공개하기로 한다. 백악관에서의 일상을 기록하는 칼럼을 매일 같이 썼다. 1930년대에 엘리너의 칼럼은 미국에서 400만명 정도의 독자 수를 확보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1937년에는 자서전 <나의 이야기(This Is My Story)>를 발간했다.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엘리너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1929년에 14.3%였던 여성 공무원 비율이 1939년에 18.8%로” 증가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엘리너의 노력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음은 틀림없다. 엘리너가 “공공적인 의사결정 영역에 더 많은 여성을 참여시키려 애쓴 것은 결국 그 효과를 나타냈다. 여성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여성들의 결정이 수백만명의 삶에 영향을 미쳤으며, 의회나 언론의 공격 앞에서도 여성들은 꿋꿋이 견뎌냈다.” 특히 프랜시스 퍼킨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노사관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재였다. 그녀는 노동부 장관에 취임했다. “충돌보다는 협상을, 정략보다는 전문성을 선호”했던 프랜시스 퍼킨스는 이민 규제 완화와 고용 서비스 재편 및 평등권법 집행에 앞장섰다. 기득권층이 프랜시스 퍼킨스를 공격할 때마다 엘리너는 그녀에게 정치적 소신을 절대 굽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진보적인 여성 노동부 장관의 성공적인 업무 수행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에도 도움이 될뿐더러 미국 역사에도 자랑스럽게 기록될 것이라고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엘리너는 여성들에게 “융화적인 방법으로 강건하게 싸워 나가라”는 충고를 자주 건넸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는 뜻이었다. 그녀 자신이 고수했던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다. 엘리너의 도전정신과 균형감각은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가 만약 12년 동안 백악관에서 퍼스트레이디로만 생활했다면, 1945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직후 엘리너의 정치적 생명 또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1946년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엘리너를 유엔 총회 미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임명했다. 엘리너는 1946년부터 1951년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정치적인 보폭을 넓혀갔다. 1948년에는 세계인권선언을 이끌어냈다. 1961년에 케네디 대통령은 그녀에게 ‘여성 지위에 관한 대통령직속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고, 77세의 엘리너는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자문을 받기 위해 전문가들을 찾아 다녔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공무를 성실하게 수행한 엘리너는 이듬해인 1962년에 세상을 떠났다.

2013년 엘리너 루스벨트의 공식적인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그녀의 삶은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자신을 퍼스트레이디로만 가둬두려 했던 사람들을 향해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외쳤던 엘리너 루스벨트의 용기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24)퍼스트레이디의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그 이상을 실현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Today`s HOT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폭격 맞은 라파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침수된 아레나 두 그레미우 경기장 휴전 수용 소식에 박수 치는 로잔대 학생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