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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너의 뜻 꼭 이룰게” 아들과의 약속…작은 신선, 이 땅의 어머니가 되다
“아무튼 노동자들이 국회에도 많이 들어가고 해야지.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잘되어야 하지 않겠냐. 잘난 척하지 말고 소외받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차별 없는 세상 만드는 데 힘써야지. 욕심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국민 지지받아, 국회도 많이 가고, 그래서 나중에는 대통령도 하면 좋지 않겠냐.”1970년 11월13일, 스물두 살의 봉제노동자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했다. 이소선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 이소선은 아들과 굳게 약속한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전태일은 의식을 잃어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엄마, 배고파.”집안 형편으로 남대문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밖에 다닐 수 없었던 전태일은 행상을 하며 돈을 벌었다. 1965년... -
(29)살아남기 위해 배운 억압자의 언어…최고의 무기가 되다
과테말라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나여덟 살부터 커피 농장서 일하며언어 장벽으로 인한 서러움 겪어부잣집 하녀로 갖은 모욕 견디고악착같이 스페인어를 익혀“나에게는 말하고 싶은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스페인어 읽고 쓰기를 익혀서 언젠가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생각하게 되었지요.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누구에게 배울 작정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나는 모르니까, 네가 혼자서 할 수밖에 없을 거다.’ ”1959년 1월, 과테말라 북서부 산악지대 엘 키체에서 마야 원주민으로 태어난 리고베르타 멘추 툼은 여덟 살 되던 해부터 커피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은 아름답고 고요하고 웅장했다. 마야 원주민들은 자연을 아끼고 신을 믿었지만, 누구 할 것 없이 찢어지게 ... -
(28)프레임 밖으로 나와 카메라를 들다, 혁명을 포착하다
이탈리아서 태어나 열여섯에 미국행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예술가’를 꿈꾸다“그녀는 정치활동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정식 당원이 되기로 했을 때, 그녀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것에 투신하면 그것에 100퍼센트 투신하고 싶어 했다.”티나 모도티는 소녀 가장이었다. 1896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12세 때부터 견직물 공장에서 일했다. 가난은 좀처럼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국행을 결심한다. 1913년, 열여섯 살의 티나 모도티는 증기선을 타고 뉴욕으로 떠났다. 2주 후, 입국심사장을 통과한 그녀는 언니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기계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언니는 동생에게 자신이 다니는 공장을 소개해준다. 자매는 함께 재봉사로 근무했다. “일은 힘들고 보수도 형편없었다. 재봉사들은 작업장에 빽빽하게 들어앉아 오랜 시간 일해야”... -
(27)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관여하는...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확실히 인도는 발전했지만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은 그 발전과 무관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중국과 파키스탄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누가 우리 자신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인가? 이 나라는 어떤 종류의 나라인가?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누가 운영하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아룬다티 로이는 1961년 인도의 메갈라야 살롱에서 태어났다. 1963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로이는 외가인 케랄라로 이주하게 된다. 케랄라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적 신념이 공존하는 사회였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했다. 계급 갈등도 심했다. 그곳에서 찻잎을 재배하는 농장을 운영했던 어머니 메리 로이는 기독교 상속법 개정을 위해 법정 투쟁을 벌였다. 메리 로이는 결국 케랄라의 기독교 집안 여성들이 부모의 재산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쟁취했다. 케랄라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페미... -
(26)과격하다는 ‘딱지’에도…일본의 여성차별 철폐 이뤄낸 ‘열혈 기자’
“특히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제창하여 실현시키고, 훌륭한 헤이그 판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위안이 됩니다. 이 성과를 어떻게든 널리 퍼뜨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같은 역사적인 ‘법정’을 일본의 미디어는 무시했고, 특히 말도 안 되게 편집하여 왜곡 방송한 NHK에는 책임을 묻기 위하여 작년에 제소했습니다. 그 원고로서의 책임을 끝까지 다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든 공정한 판결이 내려질 수 있도록 NHK 재판의 지원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마쓰이 야요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병으로 쓰러져 버렸다”. 중증 폐결핵과 결핵성 복막염으로 요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과 <레미제라블>을 좋아했고, 고등학교에서는 세계사에 푹 빠져 “넓은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에 불타올라 열심히 공부”했던 마쓰이 야요리는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 -
(25)그토록 보수적인 아일랜드를 바꾸고…‘기후정의’ 앞장서다
“부끄럽지만 나는 비교적 최근에야 기후변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으로 일하는 동안, 유엔이 이미 기후변화 전담 부서를 마련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이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내가 이 주제를 가지고 연설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2003년 초에 ‘인권 실현: 윤리적 세계화 계획’이라는 조직을 설립하기 위해 뉴욕으로 근무지를 옮긴 후 사정이 달라졌다. (…) 나는 기후변화가 과학적 관념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 그중에서도 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간이 만든 현상임을 깨달았다.”1969년,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총선거에서 메리 로빈슨은 아일랜드 상원 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하버드에서 나는 법이 사회 변화의 도구라는 사실을 배웠다. 법은 남용될 수도, 동시에 잘 이용... -
(24)퍼스트레이디의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그 이상을 실현하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가장 뛰어넘기 힘든 장애물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최대의 복병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유년기와 사춘기를 줄곧 두려움과 싸우면서 보냈던 것 같다. 덜 떨어진 아이였던 나는 어둠이 무서웠고, 쥐가 무서웠다. 사실 세상 온갖 것이 내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두려움을 일일이 응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1957년 12월10일, 73세의 엘리너 루스벨트는 ‘인권의날’을 기념해 내슈빌을 방문했다. 당시 스칼릿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35세의 이희호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엘리너 루스벨트의 환영 행사를 준비했다. 그녀를 “존경했으므로 뜨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희호는 1948년 12월10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세계인권선언문을 금과옥조로... -
(23)“멀리 있는 권력은 필요 없다” 그는 일평생 ‘거리’에 있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많은 걸 배웠고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평화주의, 사형제 반대 입장,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관심, 국가의 강압적 권력에 반대하는 입장 같은 다양한 문제에서 우리와 의견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실용적이지 못하고, 사람 좋은 이상주의자이지만 크고 중요한 곳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듯, 우리가 실용적이지 못한 건 맞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큼이나 실용적이지 못하죠. 우리를 달라지게 하려고 애써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1933년 5월1일, 뉴욕 유니언 광장은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경제대공황이 4년째 지속되자,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광장에는 미국의 경제 구조를 비판하는 연설가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도러시 데이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톨릭... -
(22)장관 내려놓고 방송사 사장·대사직 거절…‘권력의 희극성’ 알기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장관, 장관이 가진 권력, 재량권은 실제 현실과는 괴리되어 있다. 의안을 조금이라도 내놓을라치면 행정부에 맞서, 국무총리에 맞서 논쟁을 벌여야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대통령과 맞서 싸우기도 해야 하는데, 그쯤 되면 장관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의견이 있을 때는 처음부터 국무총리의 뜻을 너무 거스르지 않는 게 이롭고, 어쨌거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엄격히 ‘정책 노선에 들어맞는다’라는 걸 입증할 수 없을 바에야 공론화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프랑수아즈 지루의 아버지 살리흐 구르드지는 터키 전신국 설립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터키가 독일 동맹국으로 참전할 조짐을 보이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살리흐 구르드지는 1915년 터키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1916년에 태어난 프랑수아즈 지루에게 아버지의 터키 시절 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프랑스에서는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 -
(21)권력의 부패와 환경파괴에 맞서…3000만그루의 ‘민주주의’를 심다
케냐 독재 정권의 탄압에 맞서며‘그린벨트 운동’ 이끈 환경운동가 현실정치 뛰어들어 녹색당 창설 “나는 케냐인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마치 모든 정치인이 다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라는 듯이 여기는 통념에 도전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케냐에서는 국민의 열망을 억압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정책을 주도한 이들이 바로 정치인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바로 그들의 결정이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상황을 오해하는 것이다. 왜 당신의 운명을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의 손아귀에 맡겨야겠는가?”1997년 12월, 케냐는 새로운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 원조국들의 압박에 못 이겨 케냐 정부는 모든 정당이 후보를 낼 수 있는 “공식 절차를 모두 승인”했다.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야권 통합이 관건이었다. 케냐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