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게요, 희망버스

송경동 시인
2011년 10월 8일 당시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10월 8일 당시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37년입니다. 검은 보자기 덮어씌운 채 어딘지도 모른 채 끌려간 날로부터, 어용노조 간부들과 관리자들 수십, 수백명에게 아침마다 만신창이가 된 채 공장 앞 도로를 질질 끌려다니던 그 살 떨리던 날로부터 37년이 지났습니다.”

일제강점기보다 길다는 37년 동안 김진숙 지도위원만은 해고자로 남아야 했던 공장. 그가 복직하던 지난 2월 25일.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마지막 희망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입학식 날 교복이 없고 육성회비가 없어 쫓겨나던 한 소녀가 열다섯 살에 병든 어머니를 두고 가출해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아침저녁으로 신문배달을 하고, 낮 시간에는 다방을 돌며 땅콩을 팔고, 하얀 벽 위로 새까맣게 기어오르던 빈대에 물어뜯기는 기숙사에 살며 미싱을 밟기도 하고, 화진여객 122번 버스안내양으로 배차주임과 기사들에게 삥땅을 빌미로 한 알몸수색을 당하기도 하다 마침내 스물한 살에 ‘금의환향’의 꿈을 안고 한진중공업 최초의 여성 용접공으로 입사했던 눈물겨운 곳이었습니다. 나래비로 선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어 그들 모두가 소금꽃나무 같던, 그 소금꽃나무에서 황금이 주렁주렁 열렸지만 그 나무들은 단 한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었다던 곳이었습니다. 냄새나는 꽁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던 도시락을 공업용수에 말아먹던 공장. 다친 동료들 문병 다니고 죽은 동료들 문상 다니는 시간이 잔업 다음으로 많았던 공장. 어용노조는 멀쩡히 살아 있는 조합원들 할머니, 할아버지, 자녀들까지 서류상으로 죽여 상조비를 갈취해 가던 공장이었습니다.

■‘그곳은’ 그에게만 가혹하지 않았다

그런 어용노조와 회사에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유인물 150장을 복사해 동료들에게 나눠줬다는 까닭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경찰청 대공분실에 세 번 끌려갔다 온 후 ‘경찰 조사를 받는 자’라는 까닭으로 해고된 후 37년 동안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그에게만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1991년 공안분실로 끌려갔던 박창수 당시 노조지회장이 의문사로 돌아오고, 2003년 고공농성 중인 크레인에서 내려가면 아이들에게 ‘힐리스’ 운동화를 사주겠다던 김주익 당시 지회장이 끝내 목을 매달아야 했던 공장. 세월이 흘러 청년노동자 최강서가 다시 조합 사무실에 자신의 목을 걸어야 했던 피눈물의 공장이었습니다. “놀라지 말고 책상 위 편지를 봐라.” 2011년 1월 6일. 김주익과 곽재규 열사를 다시 솔밭산에 묻고, 그 아픔에 8년 동안 방에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던 당신이 처음으로 목욕탕엘 다녀온 후, 새벽 2시 혼자 배낭을 메고 벗인 김주익이 목을 매달았던 85호 크레인으로 다시 오르기 위해 3시간 동안 쇠톱으로 비상문의 자물쇠를 숨죽여 잘랐다는 공장이었습니다.

2011년 6월 11일 밤 11시. 고 백기완 선생이, 문정현 신부님이, 고 박창수 열사 아버님이, 고 박종철 열사 아버님이 그런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긴 사다리를 타고 담장을 넘어가던 공장이었습니다. 무슨 신념이 굳은 이들만 넘어가던 공장이 아니었습니다. 먼 전라도 순천에서 당신의 사연을 듣고 가게 문에 “<소금꽃나무>의 저자 김진숙 님을 응원하러 갑니다”라는 쪽지를 적어 붙이고 가게에 남아 있던 빵을 모두 챙긴 후 네 살짜리 아이는 안고, 초 4학년과 중 1짜리 아이들 손을 잡고 동네빵집을 하던 한가족이 함께 담장을 넘던 공장이었습니다. 멀리서라도 손 한번 흔들어주고 싶다고 하이힐을 신고 왔던 여성이 간신히 넘던 공장이었습니다. 인형극 연습과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포기한 인천의 ‘기차길옆공부방’ 초등학생 연수와 한세가 같이 담장을 넘던 공장이었습니다. 94일, 67일 단식했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김소연·유흥희도 넘고, 뉴코아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으로 해고된 이남신·홍윤경도 넘고, 1000일 넘게 투쟁 중이던 재능교육 유명자와 그 친구들이 넘고, 지엠대우 비정규직 황호인과 그의 친구들이 넘고,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 당시 크레인 점거로 2년 살다 나온 박정훈도 넘고, 당시 6년째 해고 생활이던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이인근·김경봉도 넘고, 열다섯 번째 희생자가 나왔던 쌍용차 정리해고자 김정우·문기주·이창근·김득중·윤충열·김성진이 넘고, 현대차 울산·전주·아산공장 비정규직들이 넘고, 공장에서 쫓겨나 비닐하우스에서 투쟁 중이던 영동·아산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넘고….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다른 세상을 꿈꾸며 ‘재벌’이라는, 그들의 사병인 ‘용역깡패’라는, ‘16개 중대의 공권력’이라는, ‘국가기간방위산업체’라는 높다란 담장을 일거에 뛰어넘어 당신을 구하러 갔던 공장이었습니다. “살다 보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군요.” 동이 터 오는 아침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며 춤추고 노래하던 수많은 사람들로 해방구가 됐던 공장이었습니다.

청계천 평화시장 전태일의 삶을 그린 만화 <태일이>로 유명한 최호철 작가가 2011년 7월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고공농성 중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갔다. 희망버스에 탄 시민 1만여명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최루액과 물대포 장벽에 막혀 김 위원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김 위원은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고, 시민들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최호철 작가

청계천 평화시장 전태일의 삶을 그린 만화 <태일이>로 유명한 최호철 작가가 2011년 7월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고공농성 중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러갔다. 희망버스에 탄 시민 1만여명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최루액과 물대포 장벽에 막혀 김 위원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김 위원은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고, 시민들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최호철 작가

■해방과 연대와 소망의 버스

그렇게 출발한 희망버스는 김진숙 당신만을 위한 희망의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희망버스는 2022년 4월 2일 세종시에서 다시 고공농성 중인 택시노동자들을 찾아가기 위해 또 다른 희망버스를 논의·준비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진실이 거짓을 이기고, 양심이 불의를 이기고, 용기가 공포를 이기고, 연대가 고립을 이기고, 지혜가 무지를 이기고, 나눔이 독점을 이기고, 평등이 착취를 이기고,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이해와 공감과 존중이 차별을 이기고, 춤이 거드름을 이기고, 노래가 호령을 이기고, 웃음이 권위를 이기는 세상을 꿈꾸는 해방의 버스였습니다. 지난 수십년 가혹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광풍 아래에서 추풍낙엽처럼 잘려나간 수백만 정리해고자들의 아픔과 현대판 노예에 다름 아닌 1100만 비정규직들의 절망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 사회 모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달리는 연대의 버스였습니다. 모든 사회적 풍요로움을 자본가와 특권층 일부가 독점하는 부조리하고 비윤리적인 사회를 넘어 이 땅 모든 이들의 삶이 조금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평등하기를 바라며 달리는 간절한 소망의 버스였습니다.

‘희망버스는 체력전버스’라며 잠이 모자라 얼굴이 모두 떠가던 중앙기획단 동지들이 있긴 했지만, 기획자가 따로 있고, 집행부가 따로 있는 버스가 아니었습니다. 수원, 평택, 안산, 부천, 안양, 성남, 여주, 의정부, 고양, 인천, 원주, 춘천, 태백, 영월, 강릉, 속초, 천안, 서산, 청주, 충주, 제천, 대전, 광주, 순천, 전주, 군산, 대구, 창원, 울산 등 전국에서 이 버스를 제안하고, 조직하고, 함께 타는 무수한 기획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주에서 ‘희망의 비행기’를 타고 온 분들이 계셨고, 경기 마석가구공단에서 ‘이주노동자 봉고버스’를 몰고 오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중증장애인용 전동휠체어를 모두 실어야 해서 ‘희망의 트레일러’를 준비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퀴어버스’ 기획단이 따로 있었고, ‘인디뮤지션’ 버스를 기획하던 분들, ‘반값등록금 버스’를 기획하던 청년학생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희망이 현실로 변하는 5시간을 위해” 달리겠다는 청소년영의정버스 기획단이 있었습니다. ‘농민버스’를 준비하던 농민들이 있었고, ‘교수학술버스’, ‘보건의료인버스’, ‘철거민버스’, ‘모두의 인권을 위한 무지개버스’ 기획단도 따로 있었습니다. ‘촛불시민버스’, ‘어린이책작가버스’를 준비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군산에서 500인분의 밥차를 끌고 오겠다 하니, 청주 희망버스에서는 200인분의 희망의 묵밥과 연대의 연김밥을 가져오겠다 했습니다. 부산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냐며 5000인분의 어묵탕을 준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가져온 음식과 물품을 모아 나눔과 연대의 마당을 열기도 했습니다. 어린이책작가들은 전국의 해고노동자 자녀들의 이름과 나이, 성별 등을 사전에 확인해 필자들의 편지글을 담은 동화책 2000여권을 싣고 출발하기도 했습니다. 버스만 탔던 것도 아닙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들은 ‘희망의 자전거’를 타고 울산에서 부산까지 행진했습니다. 쌍용차 정리해고자들은 ‘소금꽃 찾아 천릿길-희망의 도보행진’으로 평택에서부터 부산까지 걸었습니다. 유성기업 해고자 가족들은 ‘희망의 기차편’을 띄우기도 했습니다. 일주일씩 휴가를 내고 한진중공업 정문을 지키던 평범한 시민들이 계셨습니다. 서울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64시간 릴레이 촛불행진에 나서던 노동자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서로 사람 없는 새벽 시간에 서겠다고 해서 밤 12시 이후 아침 7시까지 신청자가 제일 많기도 했습니다. 20일 만에 <CT 85>라는 기념비적인 사진집을 출간해준 사진가들과 출판사가 있었고, 그렇게 보름 만에 <깔깔깔 희망의 버스> 책을 내주던 출판사가 있었습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은 이 모든 희망버스 승객들에게 나눠줄 희망의 종이배 1만개를 접기도 했습니다.

2차 희망버스 참가자가 2013년 10월 26일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 농성자들에게 보내는 손편지를 쓰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차 희망버스 참가자가 2013년 10월 26일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 농성자들에게 보내는 손편지를 쓰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탄압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달렸죠

이런 희망버스를 막기 위해 당시 이명박 정부는 1차 16개 중대, 2차 93개 중대, 3차 86개 중대, 4차 114개 중대, 5차 90개 중대, 6차 90여개 중대 등 전국의 전경부대를 끌어모아 공안탄압에 나섰습니다. 당시 경찰청장이던 조현오와 부산경찰청장이던 서천호 등이 나서서 위법하게 희망버스를 ‘훼방버스’, ‘빨갱이버스’ 등으로 음해하는 댓글 공작부대를 비밀리에 꾸렸음이 박근혜 탄핵 후 경찰청 과거사인권침해조사위원회 조사결과 밝혀져 뒤늦게 구속기소 되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당시 정부는 희망버스를 차단하기 위해 전국의 버스 회사들을 협박하고, 총 110명의 승객을 연행하고, 350여명의 승객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지만 희망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1차 때는 담을 넘었고, 2차 ‘희망의 휴가’ 때는 1박2일 동안 내내 내리던 폭우와 10t 넘게 쏘아대던 최루액을 넘었고, 3차 ‘가을여행’ 때는 영도로 들어가는 다리 3개를 전면폐쇄하고 어버이부대를 앞세운 야비한 탄압을 넘었고, 4차 ‘인왕산 등반대회’ 때는 서울로 진격해 청와대 뒷산을 타고 넘었고, 5차 때는 ‘1만여명의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훼방 놓는 국제 망신버스’라는 공세를 국내 영화인들의 희망버스 지지와 영화제 측도 준비 못 했던 5개 국어로 된 희망버스 홍보 브로슈어로 넘었고, 6차 때는 전국노동자대회+희망버스 부산 공동 개최라는 특별한 결의로 정부와 자본, 보수언론의 총체적인 공세를 넘어 지치지 않고 달렸습니다. 세계 언론에 김진숙과 희망버스 투쟁을 알려 전 세계의 핍박받는 노동자 민중 시민에게 큰 희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연대의 힘으로 당시 세계 금융의 중심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1% 금융자본에 맞선 99%의 저항운동’으로 시작해 전 세계 140여개 도시로 퍼져 나가던 아큐파이 운동 전체 총회 자리 연대사를 먼 한국의 조선소 크레인 위에 고립돼 있던 김진숙 지도위원이 하는 진기한 풍경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공할 연대와 투쟁이 14년 만에 재벌총수를 국회 청문회장에 세우고, 끝내 정리해고자 전원 복직이라는 사회적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습니다.

그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쌍용자동차 앞 ‘희망텐트촌’으로, 연대투쟁에 나선 ‘희망의 뚜벅이’들로, 강원도와 김해로 향하는 ‘생명의 버스’로, 강정으로 향하는 ‘희망의 비행기’로, 진주의료원 폐쇄에 반대하는 ‘보건희망버스’로, 핵 없는 사회를 바라는 ‘밀양 희망버스’로, 거제도 조선산업공장 비정규직 우선해고에 반대하는 버스로, 삼척 동양시멘트 비정규직을 응원하는 ‘동해희망버스’로, ‘유성기업 희망버스’로, ‘스타플렉스 희망버스’로, 부산 생탁 비정규직 응원버스로, 근래 코로나19에 대응한 ‘드라이브스루 희망버스’ 등으로 수없이 진화하며 그 희망의 씨앗들이, 열매들이 더 널리 퍼지기를 소망해왔습니다. 한국사회에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희망의 정치노선’이 생기기를 기원해왔습니다.

그런 눈물겨운 시간들이 쌓여서인지, 지난 2월 25일 다음과 같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마지막 인사말을 들으면서는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도 우리도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노동자의 눈물을 씻어주십시오”

“단 한명도 자르지 마십시오. 어느 누구도 울게 하지 마십시오. 하청노동자들 차별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이 복직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이념이 굳세서가 아니라 함께 일하고 같은 꿈을 꿨던 동지들의 상여를 메고 영도 바다가 넘실거리도록 울었던 그 눈물들을 배반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주십시오. … 차별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들 그들이 목숨 걸고 외치는 말을 들어야 차별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동일방직, 청계피복, YH 등 수많은 70~80년대 해고노동자들, 삼화고무를 비롯한 부산지역 수많은 신발공장 노동자들, 30~40년을 해고자로 위장취업자로 빛도 이름도 없이 살아온 그 억울한 이름들을 이제나마 불러주십시오.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맺힌 한을 풀어주십시오. 아사히, 아시아나케이오, 건보공단, 도로공사 비정규직들 수많은 노동자의 눈물을 씻어주십시오.”

※ 필자 주 : 본문의 이야기들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간 남긴 글들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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