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김진숙들의 싸움은 계속된다

김지환 기자

해고·혐오·차별에 맞선 노동자들

“저는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의 부인) 김건희씨보다 노동자들의 안부가 훨씬 더 걱정되고 궁금하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지난 1월 28일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를 만나 ‘노동이 사라진 대선’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제 복직도 중요하지만 힘들게 싸우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달라”며 아사히글라스, 아시아나케이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한국도로공사 등을 언급했다. 그는 지난 2월 25일 열린 복직 행사에서도 이 노동자들을 호명한 뒤 “수많은 노동자의 눈물을 씻어달라”고 호소했다.

김 지도위원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해 호명하는 이 노동자들에겐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금속노조, 시민단체 ‘손잡고’ 등이 2019년 8월 2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사히글라스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금속노조, 시민단체 ‘손잡고’ 등이 2019년 8월 2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사히글라스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8년째 복직투쟁 중인 아사히글라스

“해고 7년이 힘들다고 하니까, 웃으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 했는데. 37년 긴 시간 그 자리를 지키며 존경할 수 있는 선배로 한 길을 걸어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도 흔들림 없이 싸우고 곧 따라서 복직하겠습니다.”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장은 김 지도위원의 복직 소식이 전해진 지난 2월 23일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아사히글라스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연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계 기업 아사히글라스는 2004년 구미4공단에 디스플레이용 유리를 만드는 ‘에이지씨화인테크노한국’을 설립했다. 회사는 2015년 6월 사내하청업체 GTS에 도급계약 해지를 갑작스럽게 통보했다. GTS에 노동조합이 생긴 지 한달 만이었다. 해지 통보를 받은 GTS는 소속 노동자 178명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통보를 한 뒤 폐업했다.

이때부터 길고 긴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해고노동자 중 23명은 아사히글라스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을 제기했다.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은 2019년 8월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불법파견으로 사용한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두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김천지원은 지난해 파견법 위반으로 기소된 아사히글라스 전 대표에게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당초 검찰은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이에 노동자들이 항고하고,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기소 의견을 제시하면서 사용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앤장 등 대형로펌을 선임한 회사 측이 항소하면서 법정다툼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5일 김 지도위원 복직 행사에 참석하려고 ‘한진중공업으로 가는 마지막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던 차 지회장은 “최근 노동자 투쟁이 전망도 잘 보이지 않고 법원 판결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준 선배 노동자가 우리를 불러줘서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 박종근·김정남·김계월씨가 2020년 6월 18일 서울 금호아시아나 사옥 앞에서 텐트를 치고 앉아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시아나케이오 해고노동자 박종근·김정남·김계월씨가 2020년 6월 18일 서울 금호아시아나 사옥 앞에서 텐트를 치고 앉아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600일이 넘은 아시아나케이오 천막농성

김 지도위원의 복직 소식이 전해진 지난 2월 23일은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이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인 지 650일이 되는 날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인 아시아나에어포트로부터 항공기 청소 등을 도급받아 사업을 하는 케이오는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 이 회사가 주목을 받은 건 ‘코로나19 정리해고 1호 사업장’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아시아나항공의 국제선 운항 건수가 감소하자 케이오는 2020년 5월 ‘무기한 무급휴직’에 동의하지 않은 노동자 8명을 정리해고했다.

이들 중 6명은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 중노위는 회사가 고용유지지원금 신청 등 해고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해고대상자를 선정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회사는 복직명령을 따르는 대신 이행강제금을 내고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중노위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 역시 지난해 8월 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부당해고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판결 뒤 회사는 ‘복직 당일 퇴사’를 제안했다.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항소했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공항이 아닌 길 위에서 정년을 맞이한 노동자가 벌써 2명이다. 김하경씨는 올해 3월 말, 김계월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장은 내년 10월 말 각각 정년을 맞는다.

김계월 지부장은 김 지도위원의 복직 소식을 듣고 며칠간 많이 울었다고 했다. “3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떻게 버텼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김 지도위원이 복직 행사에서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굴종할 수 없어 끝내 버텼던 한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 하셨는데 같은 마음이다. 저도 이렇게 끝까지 싸우는 게 노동자로서의 자존심, 자본가에게 굴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지난 2월 25일 불가피한 일정이 있어 부산에서 열린 복직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김계월 지부장은 손편지와 작은 선물을 김 지도위원에게 인편으로 전했다. “김 지도위원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고 해고노동자를 기억해주는 걸 보고 끝까지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빛을 비춰주는 등대 같은 존재다.”

도로공사 ‘하이포탈’ 익명게시판에 있는 혐오표현들

도로공사 ‘하이포탈’ 익명게시판에 있는 혐오표현들

■혐오표현에 노출된 도로공사 복직자들

한국도로공사는 문재인 정부 들어 추진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진통을 겪은 곳 중 하나다. 도로공사는 톨게이트 수납업무를 별도로 담당하는 자회사를 만들고 이곳에 요금수납원을 입사시키는 방식으로 ‘정규직 전환’을 추진했다. 1500명가량의 노동자는 자회사 입사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회사가 공식 출범한 2019년 7월 1일 결국 ‘집단해고’됐다.

이후 해고노동자들은 성남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위에서의 고공농성, 김천 도로공사 본사 점거농성 등을 벌이며 저항했다. 불법파견 방식으로 톨게이트 수납원을 사용한 도로공사가 이들을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잇따랐다. 우여곡절 끝에 해고노동자들은 2020년 5월 ‘도로공사 정규직’으로 출근할 수 있게 됐다.

갈등은 여전하다. 도로공사는 ‘현장지원직’이란 별도 직군을 신설하고 복귀한 수납원들에게 졸음쉼터 등 청소 업무를 맡겼다. 이 직군은 도로공사에서 가장 임금이 낮은 직군이다. 노동자들은 톨게이트 관련 업무를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노사 간에 접점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캐노피 고공농성, 본사 점거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노조 간부 16명에 대한 징계도 쟁점이다. 16명은 1심 법원에서 모두 벌금형을 받아 해고는 피했다. 검찰의 항소로 2심이 진행 중이다. 공사 인사규정을 보면 기소된 자는 직위해제를 할 수 있고, 금고 이상의 판결을 받으면 해고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회사는 본사 점거농성으로 1억원 이상의 손해를 입었다며 민사소송도 벌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직접고용된 노동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혐오 정서다.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도로공사 하이포탈 ‘CEO청렴소통플랫폼’에선 “월급도둑”, “좀비”, “잉여인력”, “처치 곤란한 쓰레기”, “가방끈의 차이” 등 혐오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인정받았지만 시위, 떼쓰기로 무임승차했다는 글이 끊이지 않는다. “자식: 엄마, 어떻게 도로공사 들어갔어? 엄마: 응. 엄마는 혁명했어~ 엄마는 도공계의 잔다르크야. 너도 시위해봐. 그럼 도공에 입사할 수 있단다”, “공정과 공평이란 단어를 모르고 입사한 분들” 등이 대표적이다. 복귀한 노동자들은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고 있다.

도명화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장은 김 지도위원이 복직 행사에서 도로공사 노동자들을 호명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소중한 자리에서 우리를 언급해주셔서 감사한데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많은 분들의 연대와 도움으로 복귀를 했으니 이젠 우리가 더 많은 연대로 보답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이 지난해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출발해 중구 정동 교차로까지 행진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이 지난해 6월 18일 서울 마포구 애오개역에서 출발해 중구 정동 교차로까지 행진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

코로나19 초기 집단감염을 계기로 ‘밀접·밀집·밀폐’ 이른바 3밀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콜수 경쟁에 시달리며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콜센터 노동자들은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이다. 공공기관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고객센터 상담원들도 마찬가지다. 공단과 2년 단위로 민간위탁 계약을 맺은 11개 업체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은 모두 1600명가량이다.

2019년 12월 노조를 만든 상담사들은 지난해 2월, 6월, 7월 3차례에 걸쳐 파업을 벌이며 공단의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노사 간 교섭 끝에 공단은 지난해 10월 별도의 소속기관(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서울요양원)을 설립해 상담사들을 직접고용하기로 했다.

‘공단 소속기관 직접고용’이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상담사들의 심리적 상처가 컸다. “공정 무시 직고용·직영화 철회하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공단 정규직 노동자, 상담사 직접고용 반대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등을 지켜봐야 했다.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지 등은 상담사들이 지난해 7월 원주 공단 본사 인근에서 집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사진을 보도하면서 ‘민주노총, 킹덤 찍나’, ‘좀비 영화가 아닙니다’와 같은 자극적 제목을 달았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좀비에 비유했다.

공단 정규직 중 일부가 지난 2월 7일 공단 본사 앞에 상담사들이 설치한 텐트를 직접 걷어내려 하면서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상담사들이 텐트 철거를 항의하자 한 직원은 “남의 집에 들어와 무슨 짓거리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공단 측은 불법집회여서 수차례 텐트 철거 요청을 했는데도 상담사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철거했다고 밝혔다. 김유정 금속노조 법률원장은 “만약 텐트 설치가 불법이라고 해도 철거는 행정대집행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구청 등 공무원이 해야 한다. 경찰도 텐트 설치를 제지할 순 있어도 이미 설치한 텐트를 철거할 권한은 없다”고 반박했다.

소속기관의 직접고용 결정에도 남은 과제가 있다. 노·사·전문가 협의체를 꾸려 소속기관의 인력 규모, 채용 방식, 응대 건수에 따른 인센티브제 폐지 등의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이은영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지부장은 김 지도위원의 연설을 접하고 상담사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전했다. “우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올해도 힘든 싸움이 남아 있는데 김 지도위원이 걸었던 길을 생각하겠다.”

■아직 한을 풀지 못한 해고노동자들

김 지도위원은 복직 행사에서 동일방직, 청계피복, YH무역 등 독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들과 삼화고무를 비롯한 부산지역의 수많은 신발공장 해고노동자들의 이름을 불렀다.

김 지도위원은 자신의 복직을 위해 함께 싸운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돌아갈 곳인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남아 있었다. 다른 해고노동자 중에는 ‘후배 노동자’들과의 연대가 어렵거나 사업장이 이미 없어져 버린 사례도 많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해고노동자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복직 권고를 해도 회사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1978년 똥물을 뒤집어쓰고도 싸움을 이어갔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부산에 있던 신발제조업체 ‘국제상사’에서 일하다 1992년 해고된 문민철씨도 복직 권고를 이끌어냈지만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행정안전부에서 제출받은 ‘2004~2020년간 민주화 운동 관련 해직자의 복직 권고 실적’ 자료를 보면,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는 총 495건의 복직 권고를 했지만 수용된 경우는 32건(6.5%)에 불과했다. 민간기업의 수용 건수는 309건의 권고 중 2건(0.7%)이었다. 김 지도위원이 복직 행사에서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맺힌 한을 풀어달라”고 외친 건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민철씨는 “신발을 만드는 대기업 하청업체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이미 돌아갈 회사도 없어졌다”며 “부산지역에서 활동했던 김 지도위원이 신발공장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대책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복직 행사 연설에서 언급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해고노동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명예회복은 무엇일까.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정명자씨의 말이다.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생존권을 빼앗는 것이다.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정을 받아 명예회복을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원위치로 가는 것이다. 경비의 제지를 받지 않고 당당하게 작업복을 입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면서 현장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루를 일하더라도 말이다. 김 지도위원이나 저나 이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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