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터로 돌아온 김진숙 “37년간의 징크스, 이제야 벗어났죠”

박주연 기자

37년 전 노조 활동했다는 이유로

경찰국 대공분실 세 차례 끌려가

고문 당하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해

투쟁 끝에 2월 25일 HJ중공업 복직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2월 28일 부산항이 보이는 부산유라시아플랫폼(옛 부산역 광장)에 서서 웃고 있다. 온갖 역경을 딛고 37년 만에 복직의 꿈을 이룬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2월 28일 부산항이 보이는 부산유라시아플랫폼(옛 부산역 광장)에 서서 웃고 있다. 온갖 역경을 딛고 37년 만에 복직의 꿈을 이룬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37년. ‘소금꽃나무’ 김진숙(62·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일터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만 스물다섯 살의 김진숙은 백발이 돼서야 지난 2월 25일 HJ중공업(옛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에 복직했다. 정년이 이미 지나 복직과 퇴직이 단 하루 만에 모두 이뤄졌지만, 37년간의 처절한 복직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는 점에서 개인의 승리를 넘어 한국노동운동의 쾌거다.

용접공 김진숙은 37년 전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부산광역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세 차례나 끌려가 고문당하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했다. 징역 두 번, 수배생활 5년에 청춘이 다 갔다.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복직투쟁 와중에도 공장 안 동료들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지상 35m 크레인에 매달렸다.

지난 2월 28일 부산으로 내려가 김진숙을 만났다. 그는 2018년 9월부터 암 투병 중이다. 유방암 발병과 절제수술 후에도 난소, 직장, 담낭 등 다른 장기에서 종양이 잇따라 발견돼 3년 새 수술대에 다섯 번이나 올라야 했다. 김진숙의 얼굴은 말갰다. 그는 종종 환하게 웃었다. 삶에서 가장 간절했던 ‘복직’의 꿈을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2월 25일 부산 영도구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사내 단결의 광장에서 열린 명예복직 및 퇴임 행사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김진숙 지도위원이 2월 25일 부산 영도구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사내 단결의 광장에서 열린 명예복직 및 퇴임 행사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 / 강윤중 기자

“309일간의 크레인 농성 중
응원해 주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세상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그토록 바라던 복직이 이뤄졌는데, 감회가 어떻습니까.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그냥 붕 떠 있는 상태예요. 잠도 잘 안 오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오늘 아침에 지회장님(심진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어떠시냐’고 전화를 했길래, 이렇게 말했어요. ‘야, 내가 사실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조심하는 게 많았거든. 그런데 오늘 아침에서야 그런 강박에서 막 벗어났다. 하하하….’”

-혹여 부정이라도 타서 복직을 못할까봐 생긴 징크스 같은 건가요.

“맞아요. 옷이나 신발을 벗어놓을 때도 바르게 놓아야만 안심이 됐어요. 거의 37년간 그렇게 해왔어요.”

-복직되면 한진중공업에서 노조활동하다 항거의 뜻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이 일하던 공간에 제일 먼저 가보고 싶다고 했지요. 2월 25일 명예복직이자 명예퇴직 행사 후 공장 안을 둘러봤는데 어떻든가요.

“제가 일할 때는 공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소수의 사람만 오가더라고요. 2007년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빅에 조선소를 건립하면서 영도조선소를 폐쇄하려고 해 해직노동자를 양산했잖아요. 이후 상선 수주를 안 하고, 군함 제조만 했으니 일하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요. 다행히 상선 수주를 다시 해 5월부터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요. 다음주에 노조 간부들과 함께 동료들이 잠든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인사하러 갈 겁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왜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두들겨 맞고 회사에서도 해고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당했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김진숙 지도위원은 왜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두들겨 맞고 회사에서도 해고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당했는데, 내가 어디 가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은 먹어봤습니까.

“아뇨(웃음). 제가 그날 워낙 정신이 없었던데다 식당에 올라가 보니 차려진 음식이 고기 위주더라고요(웃음). 회사에서는 손님들 대접한다고 갈비탕, 삼겹살을 준비한 것 같던데 저는 고기를 안 먹기도 하고 못 먹기도 하거든요. 수술을 받은 후로는 육류를 전혀 소화시키지 못해요.”

1986년 2월 18일 노조 대의원에 선출된 후 노동조합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한 김진숙이 가장 먼저 시작한 저항은 ‘도시락 거부 투쟁’이었다. 쥐들이 우글거리는 현장에서 새까만 꽁보리밥을 냄새나는 공업용수에 말아서 후루룩 삼키는 열악한 현실 타개를 위해 사측에 구내식당을 지어달라고 요구했다. 노조원들의 강경한 태도에 사측은 마지못해 식당 건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김진숙은 투쟁의 첫 열매인 식당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같은해 5월 20일부터 7월 2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산광역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과 협박, 회유를 당한 데 이어 회사로부터 해고됐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대공분실에 끌려갔을 때 대의원 사퇴서와 사직서를 쓰면 3000만원이라는 거액을 주겠다는 유혹도 떨친 것으로 알아요. 적당히 타협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는데, 왜 초지일관 버틴 겁니까.

“1986년에 당한 일들이 어지간했으면 포기한다 해도 제가 저를 용서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만 스물다섯 살 때 노조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거창한 게 아니었잖아요. 그런데도 저들은 저의 머리에 검은 보자기를 씌운 채 대공분실로 끌고 가 칠성판에 묶어놓고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 팼어요. 해고 후 매일 아침 회사 앞으로 찾아가 출근하는 관리자들 바짓가랑이를 잡고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어요. 저들은 납득할 만한 답 대신 제가 나타나기만 하면 때리고 짓밟고 결국엔 닭장차에 실어 유치장에 보냈죠. 그런 일을 당했는데, 제가 어디 가서 인간으로 살 수 있었겠습니까.”

-엄혹했던 5공 시절이었고, 고문까지 당했는데 무섭지 않았나요.

“저는 저와 제 동료들이 겪은 일을 다 덮어두고 살아가는 게 더 무서웠어요. 삶이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러면 나의 억울함을 누군가는 말해주겠지 하는 생각도 했고요.”

김진숙 지도위원은 암 투병 중이다. 노동운동 하느라 남들 다 하는 연애도 사랑도 안 해봤다고 한다. 그는 “맨날 끌려다니고 수배당하고, 언제 또 잡혀갈지 모르는 사람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겠는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김진숙 지도위원은 암 투병 중이다. 노동운동 하느라 남들 다 하는 연애도 사랑도 안 해봤다고 한다. 그는 “맨날 끌려다니고 수배당하고, 언제 또 잡혀갈지 모르는 사람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겠는가”라고 말하며 웃었다. 우철훈 선임기자

2018년 유방암 진단 후 수술받아
2020년 재발… 난소·직장·담낭 등서도 발견
3년 사이 절제 수술만 다섯 번 진행

-당시 대공분실에서 구타당한 흉터가 현재도 등에 남아 있더군요.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 디스크도 심하다고요.

“허리통증은 늘 있었지만 흉터가 남은 것은 유방암이 발병한 후에야 알게 됐어요. 우울증이 생기고 몸도 안 좋아지면서 필라테스를 하러 다녔거든요. 스포츠 브라와 레깅스 차림으로 운동 전·후의 사진을 찍었는데 강사 선생님이 이튿날 ‘진숙 회원님. 등이 왜 이래요?’ 하면서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당시 매질로 찢어져 늘어난 흉터가 선명했어요.”

-당시 병원 치료를 안 받았습니까.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던 게, 병원까지 경찰들이 따라왔기 때문이에요. 의사에게 진단서 끊어주지 말고 치료해주지 말라고 압박했어요.”

-해고 후 생계는 어떻게 유지했나요.

“해고 직후에는 먹을 게 없어서 굶었어요. 한달 만에 체중이 12㎏이나 빠졌죠. 용두산공원, 부산역 지하 등지에서 노숙하면서 누가 먹다 남긴 거 주워 먹고 살았어요. 경찰들이 회사와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어 자취하던 집에서 몸만 겨우 빠져나왔거든요. 퇴직금 113만원과 재형저축 들어놓은 게 200만원이 좀 넘었는데 그 돈은 모두 유인물 만드는 데 썼어요. 유인물 인쇄비용이 5000원이었는데 위험수당이라며 제게는 10만원씩 받았죠. 1990년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당선되면서 해고자에게 생계비로 월 10만원씩, 2년 후부터는 20만원씩 나왔어요. 1995년부터는 일하는 노동자로 살고 싶어 작은 철공소나 빵공장에 다니기도 했고요.”

-배를 곯는데 그나마 가진 돈을 모두 유인물 제작에 사용했다고요.

“회사에서 저를 빨갱이라며 대자보를 붙이고 유인물도 뿌리는데 저는 회사에 못 들어가게 하니 아저씨들(그는 지금도 회사의 나이 많은 동료들을 그렇게 부른다)을 만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어 누가 사는 집인지도 모른 채 집마다 꽂았죠.”

2002년 한진중공업은 일방적인 임금 동결과 함께 640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뿐만 아니라 노조 간부 20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가압류를 함으로써 생활에 고통을 주는 동시에 이들을 사법 당국에 고소·고발했다.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 김주익 지회장은 사측에 대화를 촉구하며 높이 35m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홀로 농성하다가 응답이 없자 129일 만에 목을 맸다. 2주 뒤 곽재규 조합원이 도크에서 투신했다. 두 사람의 희생으로 한진중공업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사람들이 모두 복직됐다. 단 한 사람, 김진숙만 제외됐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2003년 동료들이 다 복직하는데, 혼자만 남겨졌어요.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노조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컸지만 울려고 해도 울 데가 없었어요. 다들 울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김주익 지회장과 곽재규 조합원, 둘이나 죽었으니까요. 아저씨들은 밥도 안 먹고 술 마시면서 울기만 했어요.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하고요. 그 분위기가 이어지면 누군가 또 사고가 날 수밖에 없어 저는 그게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조합원들의 상처들이 너무 큰 상태라 어쨌든 이 싸움을 끝내야 하는데, 제가 노사가 합의한 내용을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2011년 6월 22일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위)과 같은해 7월 31일 새벽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문화제를 마친 후 크레인 위 김진숙 지도위원을 위해 풍등을 날리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6월 22일 부산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위)과 같은해 7월 31일 새벽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문화제를 마친 후 크레인 위 김진숙 지도위원을 위해 풍등을 날리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로부터 8년 후인 2011년 고 김주익 지회장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공장 안 동료들의 정리해고를 막겠다며 다시 올랐어요.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정리해고는 철회됐고요. ‘309일간의 크레인 농성’과 ‘희망버스’는 김 지도위원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이전까지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굉장히 경직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크레인 위에서 트위터를 통해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교감하면서, 또 희망버스를 타고 응원 온 시민들이 밤새 춤추고 노래하며 난장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소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어요. 특히 당시 배우 김여진씨가 해준 말을 듣고 뭔가에 한 대 맞은 느낌이었죠.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라고 했거든요. 울면서는 오래 못 싸워요. 그러니 즐겁게 웃으면서 싸워야죠.”

-처절하게 외로웠던 시간도 길었겠지만, 연대하는 동료와 지지해주는 시민이 있다는 건 큰 행운입니다.

“그렇죠. 특히 저의 복직문제는 한진중공업 노조가 3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던 부담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저와 일해본 적도 없는 심진호 지회장은 2019년 당선 직후부터 저를 위한 복직투쟁을 선언하고 출근투쟁을 시작했어요. 그게 저는 너무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이번에 사측이 노조에 교섭을 제안한 것도 지난해 12월에 심진호 집행부가 거의 80%의 압도적 지지로 재선되니까, 제 복직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투병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는 2018년 9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왼쪽 가슴 절제수술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조와 함께 매 순간 긴장을 요하는 출근투쟁에 나섰다. 2020년 11월 암이 재발해 다시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종양은 난소, 직장, 담낭 등에서도 잇따라 발견돼 이들 기관도 도려내야 했다. 3년 사이 절제수술만 다섯 번이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심각한 골다공증과 관절통도 앓고 있다. 그는 “골다공증으로 뼈가 약해지면서 항암치료로 방사선을 쪼인 부위인 왼쪽 갈비뼈가 현재 부러져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처음에 암 진단은 어떻게 받게 됐나요.

“원래 제가 여름에는 살이 좀 빠졌다가 가을이 되면 2㎏ 정도 찌거든요. 그런데 가을에 찌기는커녕 더 빠지는 거예요. 또 몹시 피곤하고, 기분이 되게 나빴어요. (2003년 김주익·곽재규가 2주 간격으로 목숨을 던진 후부터) 밤에 집에서 전깃불을 안 켜고 살아서 몰랐는데, 어느날 낮에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닦는데 손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거울을 보니 왼쪽 가슴에 뭐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더라고요. 그 길로 일신기독병원에서 조직검사하고 대학병원에서 수술받았어요.”

-고단한 투쟁의 삶을 살아왔는데 발병이 됐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건강을 못 챙겼다는 자책인가요.

“제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몇 번 있었잖아요. 1986년 대공분실에서, 또 1990년 감옥 징벌방에 손발이 다 묶인 채로 갇혔을 때 그랬어요. 그때는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었죠.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픽픽 쓰러졌어요. 계속 토하다가 피까지 쏟았죠. 그런데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잖아요. 내가 이렇게 약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울증도 겪었다고요.

“항암치료 과정에서 제 뜻대로 안 되니까 앞날을 비관하게 되더라고요. 이 상태로 내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복직을 할 수 있을까, 다시 투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어요. 의사로부터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요.”

복직 기원 희망 뚜벅이 행진을 2020년 12월 30일 부산에서 시작한 김진숙 지도위원이 2021년 2월 7일 오후 청와대 앞에 도착하며 손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복직 기원 희망 뚜벅이 행진을 2020년 12월 30일 부산에서 시작한 김진숙 지도위원이 2021년 2월 7일 오후 청와대 앞에 도착하며 손을 들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전에는 해고자로 죽으면 어떡하나 생각했는데
이제는 거기서 놓여나니까 마음은 훨씬 가벼워요”

-지금은 괜찮은가요.

“2019년 12월 대구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8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부산에서 대구까지 도보행진(‘소금꽃나무와 함께하는 100㎞ 희망도보행진단’)을 하는 과정에서 함께한 많은 분을 통해 자연스럽게 치유됐어요. 암 발병 후 머리카락과 살이 다 빠지고 폭삭 늙어버린데다 사람들이 저만 보면 우는 게 싫어 이전까지는 아무도 안 만났었거든요.”

-몸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관리라고 할 게 없어요. 골다공증에 좋은 음식은 암에 안 좋고, 암에 좋은 음식은 간에 안 좋으니까요(웃음). 제가 육십 평생 밥을 스스로 해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프고 나서야 밥을 해먹게 됐어요. 그러니 요리를 할 줄 알겠어요? 모르니까 그냥 이런저런 채소를 냄비에 한데 넣고 쪄서 먹어요. 하루 1시간 30분씩 걷고요.”

그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출신이다. 중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나왔고, 만 열일곱 살 때부터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1981년 10월 대한조선공사(현 HJ중공업)에 여성 최초의 용접공으로 취직하기 전, 온갖 종류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대우실업 생산3부 생산3과 시다로 일하다 과중한 업무와 모진 발길질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나왔고, 이후에는 아이스크림 장사,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샴푸 외판원으로 일했다. 122번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살기도 했다.

-소녀 시절 꿈은 뭐였나요.

“양장점 사장이 되고 싶었어요. 또 기자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죠.”

-왜요.

“양장점 사장의 꿈은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신 엄마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어요. 기자는 제가 신문배달을 할 때 든 생각이었고요. 당시 경향신문을 배달했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게 당시 신문기사는 한문이 많았잖아요. 깜깜할 때 신문배달을 끝내고 한 부를 남겨두곤 어느 집 대문에 달린 환한 등 밑에 앉아 띄엄띄엄 읽곤 했어요. 그래서 당시 또래들과 달리 사회문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2009년 펴낸 에세이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를 보면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요. 표현이 문학적이면서 묵직한 감동을 줍니다.

“노동자들은 삶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아요. 저의 경우 워낙 사무치는 경험이 많고, 특히 1986년 회사에서 해고되고 나서는 아저씨들에게 하고 싶은, 복받치는 이야기가 되게 많았어요.”

그는 <소금꽃나무>에서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라고 썼다.


[박주연의 메타뷰(VIEW) ⑤] 다시 일터로 돌아온 김진숙 “37년간의 징크스, 이제야 벗어났죠”

-책을 좋아하나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 복숭아 봉지 씌우는 일을 하면서도 그 봉지에 쓰인 글이 궁금해 다 펼쳐 읽곤 했어요. 책이 생기면 문장을 외울 때까지 읽었고요.”

-설마 노동운동 하느라 연애 한 번, 사랑 한 번 안 한 건 아니지요.

“그런 삶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아서요(웃음). 맨날 끌려다니고 수배당하고, 언제 또 잡혀갈지 모르는 사람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겠습니까.”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까.

“원래 결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그러니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살았죠.”

-봄이 오면 뭘 하고 싶은가요.

“아프고 나니까 계절이 바뀌는 게 전하고는 좀 느낌이 달라요. 이런 봄을 내가 몇 번을 더 맞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도 복직되기 전에는 내가 해고자로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거기서 놓여나니까 마음은 훨씬 가벼워요(웃음).”

사진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오니, 부산항에 여러 선박이 고요히 정박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 떼가 눈에 들어왔다. 이 땅의 무도한 자들이 오랜 세월 그에게 씌워놓은 굴레에서 비로소 벗어난 김진숙은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안녕’을 누리게 될까. 그의 건강 회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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