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늘어놓은 빨래’에 자연이 새겨낸 초월적 문양들

김종목 기자

김아타 ‘자연하다’전

김아타 작가는 2010년 숲에 캔버스를 세우며 ‘자연하다’ 작업에 들어갔다. 모란미술관 초대전엔 결과물을 내놓았다. 김 작가가 ‘자연하다’ 연작 앞에서 진행한 촬영 중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김종목 기자

김아타 작가는 2010년 숲에 캔버스를 세우며 ‘자연하다’ 작업에 들어갔다. 모란미술관 초대전엔 결과물을 내놓았다. 김 작가가 ‘자연하다’ 연작 앞에서 진행한 촬영 중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김종목 기자

숲, 땅속, 물속, 옥상, 광장 등
지구 곳곳에 2년씩 세워둔 캔버스
자연 현상에 맡겨 얻어낸 작품들

빌 게이츠도 반한 ‘온 에어’ 접고
김 작가 “내 의식의 진화를 따라
먼 길 돌아서 자연으로 돌아왔다”

작업 시작 12년 만에 첫 개인전
재개관 모란미술관에 28점 전시

이어령(1933~2022)은 별세 한 달 전인 지난 1월28일 김아타를 만나 이런 말을 했다. “ ‘자연하다’는 우주에 늘어놓은 빨래와 같다.” 이 말은 경기 마석 모란미술관 김아타 초대전(19일 개막)에 맞춰 출간한 <자연하다> 중 이어령 구술을 정리한 ‘<김아타자연하다>를 말하다’에 나온다. 이어령은 “허공에 무지개와 같은 줄을 치고, 거기에 청결한 빨래를 한 것과 같은 작품이 걸린다. 무엇이 나타나겠는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연에, 바람에 맡기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상상할 수 없는 문양들을 만든다”고 했다.

김아타는 12년 동안 캔버스를 지구 곳곳 땅 위, 땅속, 물속, 옥상, 광장, 숲에 세웠다. 2년을 자연현상에 맡겨뒀다. 캔버스 수는 100여곳 500여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가 수분을 뿌리고, 해가 다시 말리고, 흙먼지와 눈이 뒤덮은 ‘자연이 그린 그림’ 28점을 초대전에 내놓았다.

강원도 인제 원시림과 제주 유채 꽃밭, 칠레 아타카마사막, 중국 티베트 라싸, 미국 뉴멕시코 인디언 보호구역 등지에서 작업한 것들이다.

김아타가 ‘지구 차원의 프로젝트’인 ‘자연하다(On nature)’ 작업에 들어간 건 2010년이다. 책 머리말에 “2010년 숲에 빈 캔버스를 세웠다. 먼 길을 돌아 나는 자연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썼다. 2000년대 중후반 김아타는 ‘온 에어(On-air)’ 프로젝트로 최고 명성을 누렸다. 세속적 표현으로, 지금도 툭하면 언급되는 ‘빌 게이츠가 작품을 산 그 작가’였다.

DMZ 안 황령산에 설치된 캔버스(위 사진)와 미국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 설치된 캔버스. 이번 전시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모란미술관 제공

DMZ 안 황령산에 설치된 캔버스(위 사진)와 미국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 설치된 캔버스. 이번 전시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모란미술관 제공

김아타는 “한국과 미국, 독일의 친구들, 한국 갤러리에서 시장에서 도태된다며 (‘자연하다’ 작업을) 하지 말라고 했다. ‘온 에어’가 너무 잘나가니까 ‘계속 밀고 나가야지’ 하며 말렸다”고 말했다.

사계가 두 번 돌며 이루어낸 작품은 추상화 같다. 눈에 띄는 건 검정과 빨강 유화를 칠한 ‘블랙 마운틴’, ‘레드 마운틴’이다. 강원도 홍천 포 사격장에 설치한 캔버스다. 군 당국 허가를 받는 데만 3년이 걸렸다. 포는 캔버스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는 채색한 이유를 두고 “그대로 가려다 너무 처참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붉은색에 덮인 찢어진 캔버스천이 발긴 피부 같다. 언뜻 ‘자연’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문을 애초 염두에 둔 듯하다. 김아타는 책에 ‘포가 자연입니까’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폭력의 역사도 자연이다”라고 했다.

지난 9일 열린 언론 사전 공개행사에서 김아타의 야심 또는 야망도 느꼈다. 우선 ‘글로벌 프로젝트’다. 사진이나 판화처럼 ‘에디션’으로 복제할 수 없는 캔버스 작업이기도 하다. ‘의식과 사유의 진화’ 틀에서 보면, 최근 작품에선 ‘무화’의 경향이 더 짙어졌다. 김아타는 1990년대 ‘뮤지엄 프로젝트’ 같은 작품에서 나체로 행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프레임에 넣었다. 2000년대 비움과 지움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장노출’과 ‘1만 컷의 중첩 이미지’의 대표작 하나인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를 담은 ‘온에어’에선 건물만 남긴 채 행인과 움직이는 것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2010년대 이후 ‘자연하다’는 건물 같은 구체적 형태마저 없애버렸다.

함께 출간한 <자연하다> 책 내용은 어렵다. 미술평론가와 철학자들은 불교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에다 노자 <도덕경>과 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근원>을 거쳐 상대성이론과 빅뱅 같은 현대 물리학을 끌어들여 김아타를 논한다.

이번 전시는 2010년 ‘자연하다’ 작업에 들어간 이후 첫 개인전이다. 김아타는 관람객들이 ‘자연하다’ 연작에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는 듯했다. “세상하고 소통할지, 사람들이 알아줄지 모르잖아요. (지금은) 그게 힘들죠.” 전시작은 ‘2년 동안 자연에 맡겼다’는 개요와 설치 장소만 알면,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자연하다’ 연작은 억지로 짜낸 ‘프로젝트용 아이디어’는 아니다. 김아타는 1994년 1월 부산 근교 야산 초입 폐가(마을회관)를 작업실로 임대하고는 소나무 아래 캔버스 두 개를 세웠다. 28년 전의 캔버스를 두고 “하얀 캔버스는 귀뚜라미와 잠자리, 비와 구름과 바람의 놀이터가 되었다. 자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붓질을 했다. ‘자연하다’의 어미(母)다”라고 했다.

지하 1층 전시장 계단 쪽엔 홀씨를 담아 전시했다. “홀씨가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날아가는 것 같지만, 완벽한 자연을 따릅니다…홀씨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와 당신과 자연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다시 이어령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명사 ‘자연’에 접미사 ‘하다’를 붙인 ‘자연하다’ 의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 ‘얼다’에서 얼음이 나왔지, ‘얼음’에서 얼다가 나온 게 아니다. ‘살다’에서 삶이 나왔지, ‘삶’에서 살다가 나오지 않았다. 행위가 먼저라는 말이다.” ‘우주’를 ‘대기권 밖 공간’이란 사전 정의로 이해할 때 이어령의 ‘우주에 늘어놓은 빨래’는 과한 비유인 듯 싶었는데, 김아타는 “우주 공간에도 캔버스를 두려고 한다. 미국 나사 측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모란미술관은 2020년 30주년 행사를 치른 뒤 휴관하고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김아타 초대전은 재개관 첫 전시다. 김아타는 모란미술관 주변 모란공원묘지 등을 두고 “미술관 자리가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라는 작품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이 장소가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0월10일까지.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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