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현지시간) 영국 왕립예술원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앞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성이 다빈치의 그림이 걸린 벽돌색 벽면 아래에 무릎을 구부려 앉은 채 흰색 스프레이로 ‘더 이상의 석유는 안 된다’(No New Oil)는 글씨를 썼다. 곧이어 손에 풀을 바른 네 명의 시민들이 그림 액자 하단 부분을 움켜쥐었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 화석연료 사용 중단을 촉구해온 ‘저스트 스톱 오일’(Just Stop Oil)이라는 환경단체에 소속된 활동가들이다.
BBC방송 등 영국 언론들이 “기후 활동가들이 자기 몸을 그림에 풀로 붙여버렸다(glue)”며 주목한 이들의 ‘독특한’ 시위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날에는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존 콘스타블의 1821년작 <건초 마차(The Hay Wain)> 를 아예 ‘지구의 묵시론적 미래’를 보여주는 다른 그림으로 덮어버린 뒤, 풀을 바른 손으로 액자 아래를 잡았다.
지난 1일에는 맨체스터 갤러리의 JMW 터너 작품 앞에서, 그 전날에는 코톨드 갤러리의 반 고흐 작품 앞에서 같은 종류의 시위를 진행했다.
Today, four Just Stop Oil supporters sprayed paint inside the Royal Academy and glued their hands onto the frame of The Last Supper.
— JustStopOil (@JustStop_Oil) July 5, 2022
Watch it happening here: https://t.co/j8fm3TJvss
이들이 거의 매일 같이 런던의 이름난 미술관과 갤러리를 순회하며 시위를 벌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체 측은 이렇게 설명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예술 작품이 담고 있는 자연과 삶의 아름다움이 일거에 사라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정부가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류의 자랑인 문화유산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 정부가 세계적 예술 작품 보존을 위해 막대한 돈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기후변화 때문에 고통받는 인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는 차원에서 이 같은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단체는 밝혔다.
그림이 더 중요하냐, 인류의 미래가 중요하냐
명화와 시위의 만남이 다소 낯설게 들리지만 과거 시민사회 운동의 역사를 보면 그림을 훼손하는 시위도 종종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14년 영국의 여성 참정권 활동가 앤 헌트가 내셔널포르테이트 갤러리에 전시된 토마스 칼라일의 초상화를 고기를 써는 식칼로 긁어버린 사건이다. 1974년 일본 도쿄의 한 갤러리에서는 장애인 활동가가 장애인의 미술관 접근권 문제를 지적하며 페인트를 뿌리기도 했다고 한다. (영국 잡지 스타일리스트 참조)
저스트 스톱 오일은 화석연료 사용 중단을 촉구하기 위해 명화 액자에 손을 붙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시위 방법을 택하고 있다. 지난 3일 영국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경주차들이 달리는 트랙 위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난 3월13일 열린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 시상식에서는 레드카펫 위에 올라가 ‘저스트 스톱 오일(그냥 석유 사용을 멈춰라)’이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