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먼의 구전 시 ‘얼룩말’이 목가적?···‘구석기 리얼리즘’ 왜곡한 백인의 낭만과 환상

김종목 기자

“한가락 한다는 목동들의 표적이 되었을 너,/ 그놈의 머리통 잘도 피하는구나, 너!/ 네 사뿐거리는 뜀박질,/ 자못 흥분한 눈은,/ 살피고 있구나/ 바로 너를 살피는 우리를!”

중동부 남부 아프리카 원주민 산인(San인, 부시먼이라고도 부른다)이 지은 구전 시 ‘얼룩말’ 중 일부다. “얼룩말이라는 사냥감과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산인 소년의 심리를 잘 표현”한 시다. 구석기 시대 산인들은 사냥을 나가거나, 기우제를 올릴 때 시, 춤과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이석호(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 카이스트 연구교수)는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문학론과 근대성>(아프리카)에서 토마스 프링글 등 남아공의 백인 문학사가들이 시 외형만 보고 목가적인 삶이 소박하게 드러나는 시로 소개했다고 전한다. “잡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얼룩말이라는 먹거리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원주민 소년의 처지”를 다룬 시라고 본 이는 남아프리카의 반체제 작가 제임스 매튜다. 그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해석을 “백인의 신화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얼룩말’은 “구석기 시대의 리얼리즘”이다.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이 식민지 건설을 본격화한 17~20세기 초에도 ‘야만을 문명화한다는 사명’을 가진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원주민들의 구전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악마화’하고, ‘엽기화’, ‘타자화’하면서 탄압을 가했다”고 이석호는 말한다.

20세기 중반까지는 “백인들이 원주민들의 ‘말과 입’을, 가야트리 스피박 식으로 말하면, ‘직간접적으로 대변 및 재현’하던 시기라 원주민 문화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 극심했다. 이석호는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지배적인 문화 양식인 시와 연극 등을 합법적으로 차용해 그 속에 불법적인 구전 내용을 채워 넣음으로써 전통적인 백인들의 글 문화를 전복한다”고 했다.

오늘날 원주민들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구술’의 형식으로 집요하게 ‘기억’ ”해낸 뒤 “백인의 출현이 갖는 의미,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가 끼친 폐해 등 정치적인 주제” 등을 노래한다. “근대 이후 전방위적으로 진행된 서구화에 대한 아프리카식 응전이자 응구기 와 시옹오의 표현대로 ‘사라진 고리 찾기의 한 방식’”이다. 아프리카는 “‘계몽’과 ‘이성의 지배’라는 서구의 근대적 기획이 뿌린 ‘빛’의 수혜보다는 ‘어둠’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당한 대륙”이다. 이석호는 “아프리카 문화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구전’을 다시 꺼내 들고 아프리카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영토화하는 일은 정언명령에 가깝다”고 했다.

지금 아프리카 작가들이 글을 쓰는 행위를 두고도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글쓰기 주체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이석호는 남아공의 베시 헤드(1937~1986) 소설과 서구 페미니즘 문제도 다룬다. 인종 간 결합이 금지된 시기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헤드의 인종적 특성과 함께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를 내면화한 아프리카 사회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소설 내용을 살핀다. ‘아프리카 페미니즘의 전형’을 제시한 소설 <마루>에서 헤드가 내놓은, 서구 형이상학이나 과학적 존재론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계시’ 개념도 분석한다.

이석호는 서구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타자의 성을 새로운 인식 기제로 확보해 새로운 세계관의 틀을 세우는 데 공헌했으나, 비서구 여성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은 “불평등한 세계의 기원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물적 토대로서 ‘인종’ ”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배제한다고 본다. “유럽 중심주의와 남근주의가 범한 논리적인 오류”와 비슷하게 비서구 여성을 서구 여성의 타자로 만들거나 주변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석호 카이스트 교수는 지난달 6일(현지시간) 남인도 케랄라에서 열린 무투루미 국제 문인대회 중 ‘포스트-반둥 시대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연맹의 창설’을 제안했다. 사진은 당시 발언대 오른 모습. 이 교수 제공

이석호 카이스트 교수는 지난달 6일(현지시간) 남인도 케랄라에서 열린 무투루미 국제 문인대회 중 ‘포스트-반둥 시대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연맹의 창설’을 제안했다. 사진은 당시 발언대 오른 모습. 이 교수 제공

이석호는 “ ‘아프리카 여성’이라고 할 때, ‘아프리카’와 ‘여성’이라는 두 개념을 관통하는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등속의 매개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아프리카에서 여성으로 사는 존재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책은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아프리카와 카리브해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종의 아프리카판 문예부흥 운동인 ‘네그리튀드’의 과거와 현재도 들여다본다. 백낙청의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를 서구의 ‘민족’이나 ‘국가’ 개념의 함의가 없는 아프리카의 민족(주의) 개념 등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도 실었다.

이석호는 한국에서 아프리카 문학 연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e메일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두고 우선 현재 한국 인문학의 구미중심주의적 편향성을 들었다. “구미의 것만 편식한다. 구미가 근대 이후 주변부로 ‘발명’한 지역의 것에는 경제적인 관심 외에는 딱히 다른 관심이 없다”고 했다.

이석호는 “근대 이전의 세계를 냉정하게 돌아보면, 실은 구미가 변방이고 아랍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었다”며 “세계를 보다 보편타당한 관점에서 보려면 작금의 중심부에서 가장 거리가 먼 곳에 있는 지역의 관점으로 이 세계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석호는 생태위기 같은 근대가 만든 지구적인 위기와 문제를 푸는 열쇠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오래된 미래’가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 인도 남부를 방문한 그는 인도와 아프리카 작가들에게 21세기 반둥 정신에 맞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연맹을 만들자고 제안해 성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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