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판교, 크런치모드 부활 우려”···‘오징어배 불’ 켜지나

김은성 기자
2016년 7월21일 오후 11시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게임업체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6년 7월21일 오후 11시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게임업체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게임회사 넷마블 자회사에서 일하던 20대 직원 A씨는 2016년 11월 급성심근경색으로 돌연사했다. 이듬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은 A씨의 노동시간은 살인적이었다. 발병 4주 전 한 주에 78시간을, 앞서 7주 전 한 주 동안은 89시간이나 일했다. 89시간이라면 주5일제 경우 하루 17.8시간씩, 주7일이라도 하루 12.7시간씩 일한 셈이다. 이는 최첨단·미래 산업이라는 화려한 이미지의 게임업계 이면에 감춰진 관행인 일명 ‘크런치 모드’ 때문이었다.

크런치 모드는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가 신작 출시를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극도로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몰아서 하는 ‘초장시간 근무’를 가리킨다. 최근 정부가 주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추진키로 했다. 이에 게임업계 직원들 사이에는 악명 높은 크런치 모드가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 특성상 ‘노사합의’를 전제로 주52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30인 미만 사업장이 많다. 또 노조도 없다 보니 장시간 ‘공짜야근’에 내몰릴 것이라는 걱정이 앞서는 게 현실이다.

10일 정보기술(IT)업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최근 1주일 단위로 돼 있는 연장노동 시간의 칸막이를 터서 일이 몰릴 때는 1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한 뒤 나중에 많이 쉬게 할 수 있도록 바꾸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근무 유연화를 요구해 왔던 게임회사들은 “개발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며 환영하는 입장이다. 회사들은 IT업계 중 콘텐츠 순환 주기가 가장 빠르고 촌각을 다투는 세계 시장에서 신작 출시 속도를 높여 소비자 수요 등에 대응하는 데 주52시간 근무제가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일명 ‘구로·판교 등대’로 상징되는 고강도 초장시간근무가 재현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이는 게임업체가 몰린 이들 지역에서 밤새도록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는 모습을 빗댄 용어로, 동이 트도록 환하게 불을 밝히는 ‘오징어잡이 배’로도 비유된다.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주52시간제가 정착되면서 게임 업계의 노동 환경은 개선되기 시작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게임사의 노동 시간은 주당 평균 41.3시간으로 2년 새 5시간 줄었다. 크런치 모드 경험자 비율도 60.6%에서 15.4%로 감소했다. 하지만 안전판 역할을 했던 주52시간 근무제의 상한선이 높아지면, 과로를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60%가량이 주52시간제가 적용되지 않는 30인 미만 사업장인 데다, 사측과 노동시간 등을 협상할 수 있는 노조가 없는 곳도 많다. 게임업체 직원 B씨는 “지금도 근무시간을 가짜로 줄이고 인터넷 접속을 꺼둔 채 일을 하는 등 꼼수 야근이 만연한데, 제도가 개편되면 대놓고 ‘열정페이’를 요구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게임 하나에 생사가 달린 작은 업체일수록 크런치 모드가 일상화 되면 중소기업은 구인난을 겪으면서 대기업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직원 C씨는 산업 특성상 장시간 노동을 막지 못하면 포괄임금제라도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포괄임금제는 연장·야간·휴일노동을 비롯한 초과근무수당을 월급에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임금 지급 방식이다. 이 제도가 근로 계약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약정한 시간을 넘겨 더 오래 일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수단으로 악용돼 ‘공짜야근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게임백서’에 따르면 게임 노동자의 약 80%가 포괄임금제로 급여를 받고 있다. C씨는 “유명한 소수의 대형업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법정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는 게 현실”이라며 “공짜야근을 늘리는 포괄임금제만이라도 없애 추가 노동을 한 만큼 정당한 대가라도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에서 제기되는 우려가 ‘기우’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게임학회장인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작 출시를 앞두고 1년 중 3개월가량 집중 근무를 하는 건 게임 특성상 불가피한 측면으로, 다른 국가들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위 교수는 “중소기업의 숙원은 개발자를 잡아두는 것으로, 과거 같은 크런치 모드가 부활하면 개발자 이탈로 생존이 힘들어져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2017년 경향신문 ‘게임산업 노동자 잔혹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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