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고온·가뭄 못 버텨…“대한민국 대표 수미 감자는 끝났다”

김기범 기자

① 한국 사회 잘 적응하고 있나

[1.5도 너머 기후위기적응을 말하다] 이상고온·가뭄 못 버텨…“대한민국 대표 수미 감자는 끝났다”
강원 횡성 둔내면의 감자 재배 농민 추승호씨가 지난달 29일 수미 품종 감자가 자라고 있는 밭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저온 저장고에서도 싹이 나버린 수미 품종 씨감자. 김기범 기자

강원 횡성 둔내면의 감자 재배 농민 추승호씨가 지난달 29일 수미 품종 감자가 자라고 있는 밭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저온 저장고에서도 싹이 나버린 수미 품종 씨감자. 김기범 기자

45년 지배적 품종 ‘수미’
기후변화 적응에 취약해
병충해·기형에 수확량 줄어
강원 농민 “상품성 잃었다”

“수미는 이제 끝난 것 같아요. 빨리 알아차린 농민들은 벌써 몇년 전부터 품종을 바꾸고 있어요.”

지난달 29일 강원 횡성 둔내면의 감자 농장에서 만난 농장주 추승호씨는 국내 감자의 대표 품종이었던 ‘수미’가 “상품성을 잃었다”고 잘라 말했다. 수확까지 한 달여가 남은 수미 품종을 심은 감자밭 앞에서 추씨는 “10년 전만 해도 수미를 훨씬 더 많이 키웠는데 이제는 여기 조그만 밭에서만 재배하고 있다”면서 “전체 7만평 정도 가운데 수미는 이제 7%뿐”이라고 설명했다.

한때 국내 감자 재배 비중 70~80%를 차지했던 수미는 빠른 속도로 씨감자로서 위치를 잃어가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고온과 집중호우 등에 취약한 적응력을 보였고, 이를 재배하던 감자 농가들도 위협받고 있다.

[1.5도 너머 기후위기적응을 말하다] 이상고온·가뭄 못 버텨…“대한민국 대표 수미 감자는 끝났다”

수미는 1978년 처음 국내에 도입된 이래 45년간 지배적 감자 품종이었다. 수확량이 월등히 많았고 맛도 좋았다. 한국인들은 감자라고 하면 타원형인 수미의 모양을 떠올렸다. 농심이 ‘프리미엄 감자칩’으로 만든 제품의 이름도 ‘수미칩’이다. 7월에 수미를 수확하고 난 뒤 같은 밭에 다른 작물을 심는 것이 가능한 지역이 많아 농민들은 너도나도 수미를 재배했다.

수미가 ‘대표적인 기후위기 적응 실패 사례’로 꼽히기 시작한 것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2010년대 들어서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남부지방에서는 2010년대 초반부터 수미의 줄기가 정상적으로 자라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중부지방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병충해에 당하거나, 타원형이 아닌 길쭉한 기형으로 자라 상품성이 떨어지는 사례가 늘어났다. 농민들에 따르면 과거 수미는 평당 10~13㎏가량 수확이 가능했는데 현재는 6~8㎏으로 줄어든 사례가 많다. 최근 농민들이 선호하는 다른 감자 품종들은 평당 9~12㎏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진용익 식량과학원 고랭지농업연구소 감자연구실장은 기자와 통화하면서 “고온 현상이 두드러지고, 가뭄이 찾아오는 일도 많아지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떨어지는 수미 품종의 수확량이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며 “과거에는 수미를 재배하는 비율이 70~80%에 달했지만 현재는 60%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체 농가의 감자 품종별 재배 면적은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씨감자를 채종하거나 사들이는 사례가 많은 탓에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는다.

기자가 지난달 29일 방문한 강원 횡성의 감자 농가를 비롯해 전화 취재를 통해 확인한 전국 곳곳의 감자 재배 농민들은 이미 길게는 10년, 짧게는 4~5년 전부터 수미의 상품성이 낮아져 재배 면적을 줄였다고 입을 모았다. 추씨도 과거에는 전체 밭의 30% 이상 면적에서 키우던 수미 품종을 두백, 설봉 등 품종으로 대부분 전환했다.

[1.5도 너머 기후위기적응을 말하다] 이상고온·가뭄 못 버텨…“대한민국 대표 수미 감자는 끝났다”

저장이 어렵다는 점도 수미 퇴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미는 저온 저장을 해도 싹이 나면서 상품성을 잃기 쉽다. 실제 추씨 감자 농장의 저장고에서는 보관해 놓은 수미 감자 대부분에서 싹이 나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씨감자는 4~5도 정도의 저온을 유지할 수 있는 저장고에 보관하는데 수미는 그래도 싹이 나곤 한다. 농업 전문가들은 너무 오랫동안 같은 품종이 재생산되면서 수미 씨감자가 퇴화하고, 환경 적응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수미의 퇴화를 알아차려 발 빠르게 다른 품종으로 전환한 농가도 있지만 다수 농가는 여전히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수미를 키우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미 대신 다른 품종을 키우다 병해충이나 이상기후 등으로 피해를 보면서 수미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었다.

지자체가 여전히 수미를 다량 보급하고 있어 농민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적기도 하다. 씨감자를 보급하는 기업도 있었지만 그 비중은 아직 미미하고, 농민들은 대체로 지자체에서 씨감자를 보급받는다. 감자 주요 산지인 강원도 농가에 종자를 보급하는 감자종자진흥원이 최근 5년 동안 농가에 보급한 품종별 씨감자 양을 보면 수미 씨감자는 매년 5000t 이상으로, 전체 보급량의 80%를 넘어선다. 다른 감자 품종 보급량을 모두 합친 무게가 1000t 미만이라는 점에서 수미 감자가 농업 부문의 대표적인 기후변화 적응 실패 사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들쑥날쑥한 강수량, 수시로 찾아오는 이상고온 등의 기후변화를 감자 농업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농림 당국도 이 같은 상황을 손 놓고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식량과학원 고랭지농업연구소에서는 이미 ‘다미’처럼 수미보다 수확량도 많고, 맛도 좋은 여러 품종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오랫동안 키워온 수미를 아직 검증이 덜 된 신품종으로 바꾸기를 꺼리는 농민이 많다. 진 실장은 “맛과 수확량이 월등한 서홍 품종의 경우 껍질이 분홍빛에 속이 노랑색이다 보니 유통업자들이 꺼려하고, 농민들도 재배를 안 하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유통업자와 농민들이 수미를 고집하는 것에는 수미가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은 동안 한국인 다수가 수미의 외양과 맛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선 생산 급감
‘감튀 대란’까지 벌어져
인류 수요 충당할 수 없는
‘적응 한계’ 넘어설 수도

최근 수년 사이에는 이상고온과 이상저온, 집중호우 등으로 작황이 악화되면서 감자 농가가 피해를 입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감자 수확량은 매년 큰 편차를 보인다. 감자가 기후변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작물이라는 점은 지난해 미국 등의 감자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벌어진 ‘감튀 대란’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감튀 대란은 기후변화와 물류대란으로 감자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국내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감자튀김, 웨지감자 등 수입 냉동감자로 만드는 메뉴 판매를 중단하면서 벌어졌다.

비교적 기온이 낮은 남미가 원산인 감자는 한국의 여름처럼 고온다습한 기후에 어울리는 품종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씨감자 수요를 100% 국산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언제 감자가 기후 적응 한계를 넘어서게 될지 알 수 없다.

‘기후 적응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와 영향을 더 이상 견디어내기 어려운 상태, 즉 위험을 피하기 위해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감자 농업의 경우 수미 감자 수확량이 급감해 감자 수요를 맞출 수 없게 되는 일이 적응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농업분야 ‘적응 실패’는
농민들 수입 감소로 직결돼
정부·지자체 과학적으로
재배 적합지 판결·지원해야

감자를 포함한 국내 농업 분야의 기후 분야 적응은 ‘기온이 올랐으니 남부지방에서 키우던 작물을 북쪽에서 재배하는’ 등의 대증요법에 아직 머물러 있다. 농업 분야의 기후위기 적응 실패는 농민 수입 감소로 직결되는데 아직까지 과학적, 체계적 대응은 이뤄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지자체가 재배에 적합한 지역을 과학적으로 판별하고, 지원하는 등의 농업 분야 적응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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