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탕하고 감옥 갔다 오지 뭐’…주가조작 처벌의 사각지대

권정혁 기자

자본시장 불공정행위 대안은

카페 회원과 본인·가족 명의의 증권계좌를 이용해 약 61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운용한 주식 카페 운영자 A씨. A씨는 보유 중인 주식을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매도한 다음 곧바로 다른 계좌를 이용해 시세보다 높은 가격에 매수(통정매매)해 시세를 조종했다.

A씨는 일평균 거래량이 적거나 유통주식 수량이 적은 회사들을 타깃으로 삼아 주가를 급등시켰다. 그는 인터넷프로토콜(IP) 주소를 분산시키기 위해 휴대폰 핫스팟과 무선인터넷 공유기를 추가로 설치하고 회원들로부터 태블릿PC, 스마트폰을 제공받아 사용하는 등 치밀한 수법으로 통정매매를 했다.

지난달 발생한 5개 종목의 ‘무더기 하한가 사태’와 닮은꼴인 이 사건은 금융감독원이 2019년 12월 발간한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및 기업공시 판례 분석’에 소개한 사건 중 하나다. 당시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데 그쳤다.

감독당국의 감시를 따돌리려는 불공정거래 세력의 수법이 나날이 진화하는 데 비해 이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치고 있다. 4월 SG증권발 8개 종목의 폭락 사태, 6월 5개 종목의 하한가 사태 등 자본시장을 뒤흔드는 주가조작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자 금융당국이 ‘불공정거래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실효성 있는 대안은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카톡 리딩방·주식 카페·유튜브 등
조작 방식 갈수록 치밀하게 진화

■주가조작 수법 날로 진화하지만

3일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거래소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에서 심리한 불공정거래 의심 건수는 27건(지난달 16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아직 상반기임을 감안해도 2021년(109건), 2022년(105건)과 비교했을 때 대폭 줄어든 수치다. 같은 기간 시장감시위원회가 특정한 시세조종 혐의는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의 불공정거래 적발이 줄어든 원인은 당국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수록 주가조작 등의 수법이 치밀해지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정보기술(IT) 발달과 함께 리딩방·주식 카페·유튜브 등 다양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한 통로를 통해 번지고 있다.

주가조작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라덕연씨(42)의 사례와 같이 장기간에 걸친 시세조종을 적발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시장에서 불공정거래가 의심되는 행위가 발견되면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가 거래량 등 매매거래 데이터를 감리하는데, 지난 사건들과 같이 별다른 호재 없이 수년에 걸쳐 서서히 주가를 올리는 경우 사전에 이상기류를 발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남길남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주식시장에는 새로운 유형의 불공정거래가 등장하기 마련이고 선진 시장에서도 불공정거래가 원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라면서 “다만 얼마나 효과적으로 시스템 단속하고 (불공정거래) 유인을 없애느냐의 차이”라고 말했다.

3대 불공정행위, 형사처벌만 존재
경제적 제재 없어 재범률도 높아

■처벌받은 5명 중 1명은 ‘재범’

솜방망이 처벌 또한 자본시장 내의 불공정거래가 끊이지 않게 하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해 대법원이 불공정거래 사건에서 실형을 선고한 비율은 61.5%로 피고인 5명 중 3명은 실형을 면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가조작, 미공개 정보 이용, 부정거래 등 자본시장 ‘3대 불공정행위’는 형사처벌만 있고 과징금 등 경제적 제재가 없는 것도 문제였다. 김정연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가조작 가담자는 향후 징역형을 선고받더라도 ‘크게 한탕하고 감옥 다녀오면 된다’는 식으로 범죄를 획책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범죄로 얻는 편익이 처벌에 비해 더 크게 느껴지지 않도록 양형기준 등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처벌 강도가 약하다보니 재범률 또한 높았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강병원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증권시장 3대 불공정거래로 처벌받은 이들의 23%가 재범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개 종목 하한가 사태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 강모씨(52)도 과거 비슷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강씨는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벌금 4억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국회는 지난달 30일 불공정거래를 저지른 범죄자에게 부당이득액의 최대 2배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담긴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만약 주가조작으로 50억원의 이익을 얻었다면 그 2배인 100억원의 징벌적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당이득의 액수를 산정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반영해 부당이득 산정 방법도 법제화했다.

최근 ‘부당이득 2배’ 징벌 법제화
피해자 손해배상제 도입 필요성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해외에서 봤을 때 한국은 그동안 부당이득을 거둬도 환수·박탈할 가능성이 낮은 국가로 인식될 수 있었다”며 “과징금이 시세조종 등 불공정행위에 대한 최선의 처벌이라고 할 순 없더라도 범죄세력의 경제적 이익을 저해시킨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제재 수단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과징금 등 금전적 제재가 투자자 피해를 직접적으로 보상하는 것은 아닌 만큼 제도 운용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연태훈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물론 벌금 및 과징금 부과와 범죄수익 몰수 등이 범죄수익 환수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정작 해당 금액은 국고에 귀속되어 피해자에 대한 보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서 “결과적으로는 (과징금이) 피해자 보상과 경합할 수도 있으므로 금전적 제재에 대한 제도 설계 과정에서 이러한 측면이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막대한 추징금과 함께 수백년 단위의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시장 신뢰를 해치는 불법행위에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 다단계 금융사기(폰지 사기)로 175억달러(약 23조825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액을 발생시킨 미국의 증권거래인 버나드 메이도프는 2009년 뉴욕 연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50년을 선고받았다.

처벌과 별개로 소액주주들의 손해배상을 위한 방안으로 기소 전 추징보전 등 선제적 조치를 적극 활용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불공정거래 적발에서 제재까지 장시간이 소요될뿐더러 확정판결 전에는 이렇다 할 제재 수단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필서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는 “기소되기 전 시세조종으로 얻은 수익을 동결할 수 있는 ‘추징보전’을 적극 활용해 범죄자들의 지갑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면서 “수사기관에서 혐의점을 잡는 대로 빠르게 시세조종 가담자들의 재산을 동결해 주가조작에 휘말린 투자자들이 보상받을 길을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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