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처럼 번지는 살인예고···‘살인예비죄’ 처벌 가능한지 살펴보니

김혜리 기자
연이은 흉기난동으로 인해 휴일인 6일 서울 강남역 교차로에서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원들이 주변 순찰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3.08.06 /서성일 선임기자

연이은 흉기난동으로 인해 휴일인 6일 서울 강남역 교차로에서 중무장한 경찰특공대원들이 주변 순찰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3.08.06 /서성일 선임기자

신림역·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이후 온라인에선 ‘살인 예고’ 글이 유행처럼 번지자 검찰은 이들에게 ‘살인예비죄’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지난 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범행 예고 글을 올린 뒤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흉기를 들고 돌아다닌 한 남성은 살인예비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살인예비죄는 최대 징역 10년형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다른 살인 예고 글 작성자들에게도 이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까.

살인예비죄 성립 위해선 ‘구체적인 준비행위’ 있어야

형법 28조는 ‘범죄의 음모 또는 예비행위가 실행의 착수에 이르지 않으면 일반적으로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지만 살인예비·방화예비·강도예비 등은 예외이다. 형법 255조는 살인을 예비하거나 음모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그렇다면 ‘살인을 예비하는 행위’란 무엇일까. 대법원은 살인예비죄가 성립하려면 살인하려는 목적 외에도 ‘살인 준비에 관한 고의’와 ‘실행 착수를 위한 준비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여기서 말하는 준비행위는 ‘단순히 범행의 의사나 계획만으로 있다고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아 살인죄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고도 했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2020년 3월25일 오전 얼굴이 공개된 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2020년 3월25일 오전 얼굴이 공개된 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선 법원은 준비행위의 구체성 정도에 따라 예비범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문광섭)는 2021년 6월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여아살해를 모의한 A씨의 살인예비 혐의를 인정했다. 공익근무요원이었던 A씨는 내부망을 통해 자신의 고교 담임교사였던 B씨의 집주소 등 개인정보를 빼낸 뒤 이를 조주빈에게 전달하면서 보복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씨가 ‘B씨의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 주소를 알려주면 아이의 얼굴에 염산을 뿌려주겠다’고 하자 어린이집 주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보복의 대가로 400만원을 조주빈에게 지급했다. 조주빈은 돈만 챙기고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다.

재판부는 A씨가 “단순한 의사·계획을 넘어 살인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부적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했다. ‘어린이집에 찾아가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는 등 살해방법을 특정한 점, 조주빈에게 어린이집 주소를 알려주고 살인청부 대가를 지급한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반면 친구를 죽여버리겠다며 흉기를 챙겨나왔다가 살인예비 혐의로 기소된 C씨는 지난 5월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C씨는 2019년 9월 자신을 화나게 한 친구를 죽이겠다며 집에서 은박지로 감싼 흉기를 들고 나왔다. 서울남부지법 형사4단독 김동진 판사는 C씨가 정작 친구 집 주변을 찾아가지 않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고 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며 살인예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C씨가 원래 허세가 있어 다른 사람 앞에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는 점,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 등 치료를 받고 있다는 주변인들의 진술 등을 고려해 그의 행위는 일종의 ‘객기’였다고 판단했다.

전문가들도 “범행대상이나 도구 특정해야 살인예비죄 적용 가능”

전문가들도 살인 예고 글 작성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살인예비죄를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범행 장소와 도구, 대상 등을 특정하는 등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있어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재봉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7일 “칼을 구입한다든지 살인을 위해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면 (살인예비죄를) 적용할 수 있겠지만 ‘내가 언제 한번 살인하겠다’고 글을 올린 정도로는 적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전현욱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예비죄를 적용하기 위해선 일반적으로 물리적인 준비행위가 필요한데, 글을 올린 것만으로는 준비행위를 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인예비죄를 적용한다면 범행에 착수하기 전에 중단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물리적인 준비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한정된 수사인력을 해당 사건에 더 투입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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