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상주 오일장
상주 하면 삼백의 고장이 먼저 떠오른다면 옛날 사람이다. 상주 오일장을 가려 나서는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삼백이었다. 쌀, 명주, 목화 세 가지가 많이 나서 그리 불렀다고 한다. 이제는 쌀 빼고는 테마파크를 가야 겨우 구경할 수 있다. 세 가지 중에서 더는 재배하지 않는 목화 대신 곶감이 들어가 있다. 감을 말리면 하얀 분이 나오기에 그리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많이 나는 곶감이니 이해되기도 한다. 전국 생산량의 약 60%가 상주에서 난다고 한다. 시장 내에서도 곶감이나 곶감을 이용한 음식을 볼 수가 있다. 상주 곶감을 이용한 찹쌀떡이 대표다. 팥소가 들어간 대부분 찹쌀떡과 달리 홍시와 곶감이 들어가 있다. 자연스러운 단맛이 꽤 괜찮다. 다만 기왕 특산물을 이용할 것이라면 주재료인 쌀과 홍시 또한 상주 것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다.
앞서 상주는 삼백의 고장이라 했지만 필자에게는 포도의 고장이다. 특히 유기농으로 오랫동안 포도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상주다. 상주 모동면 길가를 가다 보면 “내 고향 칠 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이육사 시인의 시구와 마주친다. 청포도가 제맛이 들려면 적어도 음력으로는 8월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일 보는 달력은 양력이다.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시인의 활동 시기는 1920년대로 양력보다는 음력이 더 보편화되었던 때다. 특히 양력을 정책으로 밀었던 일제강점기라면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시인의 말처럼 7월은 익어가는 시기지, 익은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8월 말 모동면에서도 가공용을 비롯해 포도 생산과 수매가 한창이었다. 보통은 요새 유행인 샤인머스캣인가 싶지만 캠벨을 비롯한 검은빛이 빛나는 포도다. 열매라는 게 종족 번식을 위해 맛있게 익고는 먹힌다. 맛있게 먹힌 덕에 씨앗을 멀리 퍼트릴 수 있다. 시중에 나오는 포도를 먹으면 씨앗 보기가 힘들다. 꽃이 피었을 때 호르몬제 몇 가지를 섞어서 뿌리면 포도가 벌 없이도 수정된다. 호르몬제에는 성장을 크게 하는 성분 또한 들어있어 크고 보기 좋은 포도송이가 된다. 호르몬 처리를 하지 않은 포도는 알알이 씨앗이 들어 있다. 송이 또한 익히 봐왔던 것과 달리 꽉 차 있지 않다. 자연스러운 포도의 모습이지만 비정상으로 판단한다. 자연스레 수정한 포도는 모양이 익히 봐왔던 것과 달리 빈약하다. 보기만 그렇다. 먹어보면 향과 단맛은 크기만 큰 포도보다 몇 배 풍성하다.
상주장은 2, 7일장이다. 상주 중심에 있는 중앙시장에서 장이 선다. 시 단위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일단 구경거리가 풍성하다. 파는 이나 사는 이나 많기에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흥정 소리에 흥이 난다. 가는 여름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먹거리와 가을 초입의 먹거리가 장터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끝물 복숭아는 부드러운 황도가 대세다. 손님은 여름 초입의 딱딱이 복숭아를 찾고 있다. 상인은 “이젠 그거 안 나와요”하며 다른 것을 권했다.
시장에는 제철 과일인 사과와 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잘 익은 아리수를 비롯해 홍로가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원황 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원황은 껍질이 얇아 껍질째 먹으면 배 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품종이다. 껍질을 깎지 않고 배의 크기를 작게 자르면 껍질이 부담스러운 이도 편하게 먹을 수가 있다. 추석 전 나오는 배는 껍질째 먹어야 더 맛있다.
오일장의 중심은 전문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시장 구석구석 골목에는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할머니들 앞에 놓인 품목은 거의 비슷하다. 박 몇 개, 조선호박, 노각, 깻잎, 고구마 줄기, 막 털어서 나온 햇참깨 등 몇 가지가 각기 사정에 맞게 놓여 있다. 그 골목 끝에 서 있다 보면 재밌는 광경을 보기도 한다. 가지고 나온 품목이 팔리지 않으면 다른 할머니한테 부탁하기도 한다. 장사는 목이 중요하다. 사람이 드나드는 자리는 정해져 있거니와 유독 사람 몰리는 곳이 있다. 그쪽에 자리 잡은 할머니에게 팔아 달라 부탁하기도 한다. 가을 초입에 수확한 피땅콩은 할머니들뿐만 아니라 전문 상인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고 가을의 장터 모습을 비춘다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확연하게 구분 짓는 것이 피땅콩이 아닐까 싶다. 피땅콩은 삶거나 쪄서 반찬으로 혹은 군것질거리로 경상도에서 유독 즐겨 먹는다. 커다란 됫박에 1만원 내외다. 시장을 나서는 손에 피땅콩 봉지가 들려 있었다. 9000원이라는 가격을 보고 샀다. 다른 것보다 지저분해 보였다. 씻은 것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해 보인다. 개중에서 가장 지저분해 보여도 어차피 한 번 씻는 것은 매한가지. 게다가 껍질 까서 먹는 것이니 겉 지저분한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가을 것이 조금씩 나오는 시장에서 반가운 것은 버섯. 지난 의령장에서 아주 조금 보이던 싸리버섯이 많았다. 한 바구니 2만원으로 가격 또한 나쁘지 않았다. 싸리버섯 옆에 누런 버섯이 있다. 작년에 본 버섯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게 뭐죠?” “XX버섯” “예?” “X나무” 심한 사투리를 쓰는 이들을 만나면 지역 상관없이 글 쓰는 나한테만 중요한, 쓸데없는 대화가 오간다. 결국, 알아낸 답은 ‘참’이었다. 참나무버섯 또는 개암버섯이라고 하는 녀석이다. 고기 볶을 때 같이 볶거나 돼지고기찌개 끓일 때 넣으면 그만인 버섯이다. 작년 가을에 영동 오일장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상인의 말대로 개암버섯 넣고 끓인 돼지버섯찌개는 별미였다. 버섯의 식감이 부드러우면서 쫄깃함이 좋았다.
상주 오일장에서 살 것을 못 샀다면 ‘상주생각’으로 가면 된다. 상주생각은 상주의 로컬푸드 매장 이름이다. 상주에서 나는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주로 판다. 많은 곳의 로컬푸드 매장을 다녔지만 소비자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리를 잘하는 곳이 여기라고 생각한다. 과일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 거의 없다. 누구의 배, 누구의 사과는 있어도 품종을 붙여주는 곳은 없었다. 간혹 한두 품목은 있어도 지금 제철인 사과, 배, 포도 모두에 품종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품종에 따라 과일은 먹는 방식, 맛이 달라진다. 같은 생산자라도 품종에 따라 맛이 다르다. 품종 이름을 알린다는 것은 먹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어렵지 않은 일임에도 로컬푸드 매장에서 잘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곳과 달리(주로 농협 중심) 상주의 로컬푸드 매장은 지역민이 모인 협동조합으로 운영하기에 그리하지 않나 추측한다. 상주생각 (054)531-1675
청포묵과 황포묵이 있다. 청포는 뭐고 황포는 무엇일까? 사실 식품을 업으로 살아왔지만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다. 게다가 자주 먹는 음식도 아니었기에 더 관심이 없었다. 녹두 전분으로 묵을 쑤면 청포묵이다. 묵을 만들 때 치자 물을 들이면 황포묵이 된다. 불투명한 하얀색 묵이면 청포, 노란색이면 황포다. 청포묵을 보면 맛도 색도 순하다. 쌉싸름한 맛이 있는 도토리묵과 색깔처럼 맛도 확연하게 다르다. 청포묵밥을 주문했다. 묵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도토리묵밥을 떠올린다. 뜨겁거나 찬 육수에 밥을 말아먹는 음식이 내가 알고 있는 묵밥이었다. 그렇기에 묵밥을 주문하면서 찬지, 더운지를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중간”. 묵밥을 보니 우문현답이었다. 여기에서 묵밥은 비빔밥이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양념간장에 묵과 밥을 비벼 먹는다. 식당 안을 보니 상주 쌀을 사용한다고 쓰여 있다. 밥의 상태를 보니 쌀은 최상품이었다. 다만 공기에 담겨 나와 뭉쳐 있었다. 비빔이든 국밥이든 밥이 공기에 들어가는 순간 쌀이 가졌던 품성을 잃는다. 좋은 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주는 방식 또한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식의 세계화를 외치기 전에 식당에서 스테인리스 공기부터 추방해야 한다. 비빔그릇 안에는 묵과 몇 가지 채소가 양념간장으로 양념 되어 있었다. 청포묵은 무미다. 양념간장과 채소를 만나면 ‘무’가 ‘유’가 된다. 짜고, 달고, 매운 맛과는 다른 청포묵 고유의 맛이 도드라진다. 별맛 없는데 계속 먹힌다. 그래도 심심하다면 청포묵 들어간 육회 비빔밥도 있다. 가미 (054)534-0922
매주 식재료를 찾아 길을 떠난다. 먹거리에 진심인 만렙의 28년차 식품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