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진 빚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작가

엄마는 딸이 있어서 좋다는 이야기를 종종 내게 했다. 딸한테 세상의 진보를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듣고 있던 상담 선생님은 얼굴을 찌푸렸다. “미섭씨가 어머니께 가르침을 줄 필요는 없어요.” 깜짝 놀랐다. 엄마와 페미니즘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기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맞다. 엄마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의무는 나에게 없다. 그 깨달음 이후 삶이 한결 가벼워졌다.

총선이 끝나고 며칠을 끙끙 앓았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을 모두 ‘나중에’로 미루고 치른 선거를 목격한 후유증이었다. 그나마 안전하다고 느꼈던 공간에서 세게 한 방 얻어맞은 느낌. 와중에 심상정 의원이 지역구에서 크게 패하고 결국 정치 은퇴를 선언하자, 나도 그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고등학생 시절, 심상정이라는 국회의원이 옆 동네에서 지역구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거에서 떨어졌고, 결국에는 4선 의원이 된 그를 나는 꽤나 좋아했다. 마주치는 유세 차량에 웬 모르는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엄마처럼 생긴 후보가 타고 있다는 점이 자랑스러웠다. 심상정을 보고 자랐기에 정치인의 모습을 여성으로 그려낸 고양시의 청년이 나 하나는 아닐 것이다.

2017년 제19대 대선 당시 심상정 후보 간담회에 참석했다가 크게 실망한 일이 있었다.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박 여사”라 부르며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였다. 질문 및 답변 시간에 객석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 발언은 여성 혐오적이다. 박 전 대통령의 여성됨을 짚어 멸칭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사과할 기회를 드리겠다.” 심 후보는 발언을 취소하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래도 화가 다 풀리지는 않았다.

도끼눈을 뜨고 대선을 지켜보는데,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설거지는 여성의 일”이라고 발언한 데 대한 지적이 나왔다. 허허 웃는 남자 후보들 사이에서, 심 후보는 농담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짚었다. “대한민국 모든 딸들에게 이 자리에서 사과하십시오. 그럴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다른 토론회에서는 심 후보가 “동성애는 찬성이나 반대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라며 타 후보들의 혐오 발언을 지적했다. 그제야 나는 심상정을 온전히 용서하게 되었다. 그가 나를 모욕하는 이들에 맞서 사과를 받아내는 정치인임을 믿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심상정 캠프에 들어갔다. 5년 전 토론회에서 진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유세가 한창이던 어느 날, 선거 사무실로 출근했는데 후보가 일정을 취소하고 연락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며칠 후 돌아온 그에게 나는 또 화가 나서 편지를 썼다. 같이 일하는 선거 노동자들에게도 사과해야 하지 않겠냐고. 이번에도 역시 답장이 왔다. “정성껏 지적하고 화내줘서 고맙다,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왜 그렇게 심상정에게는 화가 많이 났으며, 몇번이나 용서를 빌게 했을까. 엄마를 “가르치는” 역할에 부담을 갖고 살았다는 점을 깨달은 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정치인 심상정에게 고마운 마음만큼 의무감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여성과 소수자의 편에 서준 만큼 나도 그가 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심상정은 은퇴를 선언하는 자리에서도 사과했다. 빛나는 퇴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패배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에게 그는 언제든 사과를 요구하는 마음을 온전히 받아준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는 심상정에게 진 빚을 내려놓게 되었다. 다 갚아서가 아니다. 사실 어떻게 하든 갚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건 내가 진 빚이 아니니.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작가

심미섭 페미당당 활동가·작가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