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감추고 싶던 참조 대상”…건축으로 읽는 한일 현대사

배문규 기자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풍경. 뒤편의 거대 조형물은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상징 이미지가 된 오카모토 타로의 ‘태양의 탑’.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한국관 풍경. 뒤편의 거대 조형물은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상징 이미지가 된 오카모토 타로의 ‘태양의 탑’.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최다 수상국은 다름 아닌 일본이다. 1987년 단게 겐조를 시작으로 마키 후미히코(1993), 안도 다다오(1995),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2010), 이토 도요(2013), 반 시게루(2014), 이소자키 아라타(2019)에 이르기까지 무려 8명이 받았다. 일본 건축의 국제적 위상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 끼친 영향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일본 건축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공백에서 무얼 읽어야 할까.

조현정 카이스트 교수의 <전후 일본 건축>은 1945년 이후 일본 건축의 주요 국면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말 나온 박정현 건축평론가의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에서 설정한 시간 역시 1945년 이후였다. 한국과 일본의 착종된 현대사를 건축으로 톺아보면 어떤 모습일까. 지난 24일 경향신문에서 만난 두 사람은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듯 하면서도 엇갈렸던 한·일 건축의 궤적을 그려봤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를 쓴 박정현 건축평론가(왼쪽)와 <전후 일본 건축>을 펴낸 조현정 카이스트 교수가 지난 2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공원에서 한국과 일본 건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를 쓴 박정현 건축평론가(왼쪽)와 <전후 일본 건축>을 펴낸 조현정 카이스트 교수가 지난 2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공원에서 한국과 일본 건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권도현 기자

-1945년은 일본에는 패망, 한국에는 해방이었다. 두 나라가 새 국가를 만들어가는데서 건축은 무엇을 했나.

조 = 일본사에서 ‘전후’는 시간적 의미만이 아니라, 전전의 군국주의와 차별된 민주주의, 평화주의, 경제성장을 특징으로 하는 가치 공간이다. 이 시기 단게 겐조의 ‘히로시마 평화공원’(유네스코 세계유산 원폭돔이 여기에 있다)은 전후 일본의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상징적 프로젝트로 볼 수 있다. 원폭이 초래한 비극적 상황을 세계 평화라는 미사 여구로 대체하고 히로시마를 평화의 성지로 바꿔놓았다. 미국으로서도 원폭의 윤리적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일본은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이미지를 탈바꿈시켰다. 원래 일본 전통 양식에 주목했던 단게는 평화공원 설계에서 국제주의 모더니즘 양식으로 전격적인 귀환을 한다. 전후 재건기 일본 건축의 전반적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와 차별된 보편적 휴머니즘, 민주주의, 평화에 대한 전후 사회의 열망을 반영한, 새출발이었다.

박 = 한국은 신생 공화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성공적인 건물은 없었던 것 같다. 국회의사당 계획은 원안에서 크게 바뀌면서 의미가 퇴색됐다. ‘산업화’를 보여주는 정부종합청사, ‘전통’을 상징하는 종합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역시 설계 논란에 휩싸였다. 건축가들은 전 세계적 흐름인 국제주의 모더니즘을 하고 싶었겠지만, 건물을 지을 물적 토대 자체가 취약했다. 탈식민 국가로서는 정체성을 식민지배 이전 ‘전통’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전통과 근대라는 충돌하는 가치가 함께 가게 됐다.

-단게 겐조의 ‘도쿄 계획’(1961)과 김수근의 ‘여의도 계획’(1968)은 상당한 유사성이 보인다. ‘도쿄 계획’은 도쿄만 위에 인공 대지를 조성하고 축선을 따라 역과 공항, 행정·사무지구를 개발하는 구상이었다. ‘여의도 계획’은 종로-마포-여의도-인천으로 이어지는 축선을 따라 여의도에 국회의사당, 서울시청, 대법원을 모두 옮기려 했다.

조 = 물 위 인공 도시를 만들고, 메가스트럭처를 설치하는 등 외형적 유사성이 보인다. 당시 도쿄 계획 자체가 전 세계적 주목을 받았고, 김수근 사무실의 강병기가 단게와도 일했기에 영향은 분명해 보인다.

박 = 두 사람은 말그대로 ‘국가 건축가’였다. 국가 발전 시기 두 사람은 건축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했다. 단게가 팀을 만들고 젊은 건축가를 두는 식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을 김수근도 똑같이 했다. 1960년대 김수근이 사장을 맡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토목회사인데 왜 건축가들을 불러들였을까. 김수근과 함께 한 윤승중의 회고를 보면 자기들은 공사 직원이 아닌 ‘김수근 팀’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조 = 단게 겐조는 1913년생이었고, 김수근은 1931년생이었다. 한 세대 차이였는데 비슷한 역할을 부여 받았다. 김수근은 도쿄대 시절 친해진 이소자키 아라타에게 부럽다는 한탄을 했다고 한다. 동갑인 이소자키는 자유롭게 하고싶은 예술을 하는데, 자신은 국가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 = 그러면서도 젊은 나이에 엄청난 규모의 국가프로젝트를 할 수 있던 것도 사실이다. 시대적 상황에서 김수근의 실존적 분열 아니었을까.

‘도쿄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단게 겐조.     ⓒAkio Kawasumi

‘도쿄 계획’을 설명하고 있는 단게 겐조. ⓒAkio Kawasumi

1966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김포공항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김수근. 바로 앞에 부여박물관 모형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1966년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김포공항 계획에 대해 설명하는 김수근. 바로 앞에 부여박물관 모형이 보인다. 국가기록원

-한국에도 익숙한 주제로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만박)가 떠오른다. 만화 <20세기 소년>의 모티프가 된 ‘태양의 탑’은 시대적 아이콘이었다.

조 = 일본에는 만박 노스탤지어가 있다. 현재 일본의 경제적 불황과 맞물린 경제 부흥기에 대한 향수 아닐까.

박 = 오사카 만박 당시 일본은 ‘전공투’ 같은 학생 운동도 있고, 사회적으로는 어지러웠다. 냉전의 한복판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선 만박을 소재로 한 첩보 영화까지 나왔다. 한국관을 지을 때 재일교포들의 모금 활동도 있었다고 한다.

조 = 당시 재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형편이 어렵다보니 한국관의 경우 ‘할 수 있던 것과 하고 싶었던 것 사이의 괴리’가 컸다. 한국은 전통 모티프를 중요시 했는데 오사카 만박 때 처음으로 현대적인 건물을 지었다. 과거가 아닌 미래와 과학기술의 이미지를 국제 사회에 처음 선보인 전환점으로 살펴볼 만할 것 같다.

시차를 두고 비슷한 궤적을 그리던 두 나라는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의 수용에서 엇갈린다. 근대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에서 선도적으로 등장했다. 장식성을 배제한 모더니즘 건축과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역사적 양식과 지역성을 다양하게 수용했다. 서구적 의미에서 완전히 ‘근대적’이지 못했던 일본은 서구 중심 모더니즘을 넘어설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반면 ‘모던 사회’도 도래하지 못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던’은 넌센스라는 회의론이 나왔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온도 차이가 있던 것 같다.

조 = 일본은 1970년대 포스트모던 건축을 시차없이 도입했고, 1980년대 버블 붐 속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이소자키 아라타의 포스트모더니즘 대표작 ‘쓰쿠바 센터 빌딩’은 의도적으로 일본 전통 모티프를 배제하고 서양 건축의 중요한 장면들을 맥락없이 끌어왔다. 그러면서 “가쓰라 이궁, 파르테논 신전, 캄피돌리오 광장 등은 모두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존재”이며, 세계 건축사적 맥락에서 어떤 사건도 인용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은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당시 일본의 자신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박 = 한국에는 ‘모던 사회’도 도래하지 않았다며 포스트모던은 넌센스라고 격하시키는 태도가 있었다. 이후 1990년대 모더니즘을 다시 살펴보자고 것이 4·3그룹(승효상, 김인철, 민현식 등 차세대 주류 건축가 그룹)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수용은 한국도 늦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 김기웅의 전주시청사(1981)가 있었고, 1980년대 강남 신도시에는 박공을 얹고 기둥을 세운 상업건물들이 여럿 등장했다. 문제는 그시절 정부에서 공공 건물을 지었다 하면 기와를 올리라고 하지 않았나. 주류 건축에선 ‘전통성’ 논란에 워낙 휩싸였다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을 경계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 아닐까.

조 = 일본 건축가들도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런데 경제적 위상은 높아지고, 서구 모던의 위기가 이야기되니까 열패감을 극복하는 기회로 활용한 것 같다. 그때도 일본은 ‘외국인 시선’을 강하게 의식했다. 펠릭스 가타리나 롤랑 바르트 같은 서구 지식인의 일본 문화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자기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이소자키 아라타의 ‘쓰쿠바 센터 빌딩’.

-<전후 일본 건축>에서 안도 다다오에 대한 언급은 적고, 동시대 이토 도요를 위주로 서술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조 = 계보를 쓰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안도 다다오는 매우 유명하고 중요한 작가이지만, 이토 도요가 대표성이 있다고 봤다. 단게 겐조, 메타볼리즘에 이어 이토는 포스트 메타볼리스트였고, 현재 주요 일본 건축가들을 포스트 이토 그룹으로 볼 수 있다. 안도 다다오는 고유 방식을 정립한 뒤 변주하고 다듬었다면, 이토 도요는 계속해서 스타일을 바꿔갔다. 일본 사회의 변화하는 맥락을 보여주는데도 이토가 더 적절하다고 봤다.

박 =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나 ‘물의 교회’는 직관적인데다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대중적 임팩트는 안도가 더 크다. 서구에 먼저 ‘발탁’된 것도 안도였던 것 같다.(저명한 건축사학자 케네스 프램튼은 모더니즘의 해방적 성격과 지역 전통의 재해석을 결합한 ‘비판적 지역주의’를 이야기했는데 그 사례로 안도에 주목했다)

조 = 발탁됐다는 의미를 더 풀어보면 애초에 서구라는 타자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으로도 볼수 있을 것 같다. 계보를 그리려면 후학들이 선배를 넘어야 될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은 역사가 쌓이면서 그런 상이 구축된 것 같다.

박 = 한국도 이제 어느정도 가능해졌다.

-일본에서 ‘버블 붕괴’ 여파는 건축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조 = 일본에서 196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건축가들을 “너무 늦게 태어난 세대”라고도 한다. 구마 겐고도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황”이라고 했다. 선배들이 프로젝트를 다 해놓고, 경제 불황으로 할게 없어진 것이다. 대규모 프로젝트를 할 수 없던 이들이 새롭게 주목한 영역이 ‘집’이다. 다양한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시도됐고, ‘무지(MUJI)’로 대표되는 라이프스타일 감성이 등장했다. 단순히 건물디자이너가 아닌 생활, 소셜디자이너로서 역할을 찾아나선 것이다.

박 = 한국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아파트 가격이 정체기일 때 ‘땅콩집’ 같은 집짓기 열풍이 있었다. 최근에는 다세대 주택의 임기응변으로 만든 증축부를 찾아 기록하거나, 예전에는 관심도 없었을 허름한 슬레이트 집을 개조하는 식의 ‘버내큘러(생활 속 자연스럽게 생겨난 토착적 삶의 형식)’한 작업들이 눈에 띈다. 아틀리에 바우와우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일본 건축가들의 최근 작업과도 연관된 흐름같다.

-세계에 ‘전후’ 재건을 알렸던 ‘1964년 도쿄올림픽’처럼 ‘2020 도쿄올림픽’도 동일본 대지진 ‘재후’ 부활을 목표로 했다. 2020 도쿄올림픽의 상징 건물은 단연 구마 겐고의 신국립경기장이었다.

조 = 최초 설계자는 자하 하디드였다가 무산됐다. 천문학적 공사비도 문제였지만,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얽혀있던 것 같다. 다시 선정된 구마의 디자인은 일본 전통 목조 건축을 현대화한 것이었다. 구마의 원래 작업 스타일이었지만, 일본성에 대한 레토릭이 강조되는 것 자체가 일본의 위축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도쿄올림픽의 국수주의적 분위기가 위기를 겪는 일본의 초조함으로도 읽힌다.

구마 겐고의 도쿄 신국립경기장. ‘나무와 풀’을 콘셉트로 친환경성과 전통미를 강조한 디자인이다.   ⓒJAPAN SPORT COUNCIL

구마 겐고의 도쿄 신국립경기장. ‘나무와 풀’을 콘셉트로 친환경성과 전통미를 강조한 디자인이다. ⓒJAPAN SPORT COUNCIL

-일본 건축은 한국에 무엇이었나. 왜 말해지지 못했던 것일까.

박 = 중요한 참조 대상이면서 때로는 감추고 싶었던 존재. 사실 반도체의 경우 일본을 넘어섰기에 일본으로부터 배운 과거를 무용담처럼 할 수 있지 않나. 건축은 아직까지는 맘편히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조 = 연구자로서 때때로 자기 검열을 하게 될 정도로 여전히 일본은 민감하다. 하지만 최근 한국 건축 위상이 높아지면서 예전보다는 자유로워졌다.

박 = 김수근의 ‘부여박물관’(1968) 왜색 논란이 후대에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 같다. 과거 ‘공간’ 잡지를 보면 일본 건축을 다루지 않는다. 대놓고 이야기하기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조 = 건축의 공적 성격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건축가가 공공의 상징적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용납이 됐을까.

박 = 실제로 업무시설이나 상업시설처럼 티 안나는 건물은 일본 건축사무소가 많이 지었다. 시청 앞 플라자호텔이나 강남의 무역센터처럼. 일본은 고령화, 인구 감소, 1인 가구, 지방 붕괴 등 인구학적 위기가 한국보다 먼저 찾아왔다. 이제는 다른 의미에서 참고할 부분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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