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카마 사막, 눈쌓인 바르샤바··· 고요한 풍경 속 번득이는 죽음의 이미지, 볼탕스키 유고전

부산|김종목 기자

마른 사막을 배경으로 한 무더기의 갈대가 떠오른다. 다가가면 바람에 반응하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대에 걸린 종마다 직사각형 종이 모양의 플라스틱판이 달렸다. 한국의 풍경(風磬)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일본의 후린(風鈴)이다. 일본인들은 처마에 매단 후린에 소원을 쓴 종이를 붙이곤 한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 고속도로 부근 한 조각 땅을 빌려 바람과 종소리로 이뤄진 13시간짜리 영상 작품을 만들었다.

부산시립미술관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 전에 출품된 이 영상 스크린 앞엔 건초와 말린 꽃도 깔렸다. 벤치에 앉아 영상을 보면, 종소리와 어우러진 사막 풍경이 평온하다. 작은 명상 공간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볼탕스키는 피노체트가 정치범 수천 명을 묻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사라진 영혼을 위로하는 취지의 13시간짜리 ‘아니미타스’를 제작했다.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는 피노체트가 정치범 수천 명을 묻은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서 사라진 영혼을 위로하는 취지의 13시간짜리 ‘아니미타스’를 제작했다. 김종목 기자

장소의 역사적 배경을 알면, 평온은 깨지고 만다.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정치범 수천 명을 이 사막에 묻었다. 작품명 ‘아니미타스(Animitas, 2014)’는 스페인어로 ‘작은 영혼’을 뜻한다. 바람에 날려 울리는 종소리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위로하는 셈이다. 유족들은 지금도 이곳에 유해를 찾으러 온다. ‘겨울 여행’(1997)이 연장선에 놓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볼탕스키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눈 내린 풍경을 영상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그 장소가 폴란드 바르샤바다. 나치가 이곳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볼탕스키의 ‘잠재의식’은 달력에 쓸 법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유대인 학살이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이미지를 중첩한다. 평온의 삶과 죽음의 대비는 한 화면에서, 각각의 화면에서 이뤄진다.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잠재의식’은 달력에 쓸 법한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미지에 유대인 학살이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의 이미지를 중첩한다. 평온의 삶과 죽음의 대비는 한 화면에서, 각각의 화면에서 이뤄진다.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잠재의식’.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잠재의식’. 김종목 기자

‘잠재의식’(2020)은 십자 형태로 펼친 4개의 양면 스크린에 각각 초원의 사슴, 일몰, 눈 덮인 숲, 새떼를 담은 영상을 내보낸다. 볼탕스키는 달력 사진 같은 클리셰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차용한다. 평온·평화·행복과 공포·죽음의 이미지를 일대일로 대비한다.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고요한 사계 풍경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나 유대인 학살 등의 이미지 150여 개를 숨은 그림 넣듯 심었다. 유심히 화면을 봐야 고요한 풍경 속에 번득이는 죽음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다. 4개 화면이 각각 풍경과 죽음의 이미지로 분할된다. 볼탕스키 특유의 ‘삶과 죽음’의 대비는 한 화면 안에서, 4개의 화면에서 동시에 이뤄진다.

볼탕스키는 지난 1월 매리언굿맨 갤러리와 인터뷰하며 말했다. “우리는 쾌활하고 낙천적인 세상에 산다. 그 모든 것엔 공포와 재앙이 존재한다. 클럽메드는 지중해 해변을 보여주지만, 그곳에 빠져 죽는 이주민은 보여주지 않는다. 난 백사장을 볼 때면 근처에서 익사한 이들이 떠오른다.” 볼탕스키는 이처럼 완벽해 보이고, 번들거리는 세상에 내재한 공포와 죽음을 직시한다.

2014·2020년 영상 작품은 각각 학살의 맥락과 이미지를 풍경 속으로 끌어온다. 노년의 볼탕스키는 죽음을 다루되, 풍경을 넣으며 관조의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볼탕스키의 2021년 신작 ‘설국’은 코로나19 시대의 죽음을 은유한다.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2021년 신작 ‘설국’은 코로나19 시대의 죽음을 은유한다. 김종목 기자

2021년 신작 ‘설국’도 애도의 정서와 죽음의 이미지를 은유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병상 시트를 떠올리게 하는 흰 천을 겹겹이 쌓아 올린 설치 작품이다. 코로나19로 숨진 사람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흰 천들은 ‘탄광’(2015)의 700㎏의 검은 옷더미와도 이어진다. 한 때 산 자들이 입었던 옷은 산을 이루는데, 무덤으로 볼 수도 있다.

볼탕스키의 ‘탄광’(2015)은 죽음을 검은 옷더미로 은유했다. ‘인간’(2011)은 볼탕스키가 ‘기념비’ 시리즈 등 여러 작품에 쓴 사진들을 80여개의 흰 천에 담아 천장에 건 것이다.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탄광’(2015)은 죽음을 검은 옷더미로 은유했다. ‘인간’(2011)은 볼탕스키가 ‘기념비’ 시리즈 등 여러 작품에 쓴 사진들을 80여개의 흰 천에 담아 천장에 건 것이다. 김종목 기자

대표작 ‘저장소: 카나다’(1988)도 ‘탄광’처럼 옷들을 오브제로 쓴다. 탄광의 주제가 인간 전반의 죽음이라면, ‘저장소: 카나다’는 유대인의 죽음을 다룬다. 볼탕스키는 ‘쇼아(Shoah·히브리어로 절멸) 작가’다. 길이 14m, 높이 4.5m의 설치 작품에 유대인 억류자 개인 소지품 창고 이름인 ‘카나다’를 제목으로 붙였다. 수천 벌의 옷들은 유대인의 죽음과 산 자들의 상실감과 애도 같은 복합적 정서를 일으킨다. 부산시립미술관은 ‘탄광’의 옷은 다시 만들고, ‘저장소: 카나다’의 의류는 고물상에서 구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1939년 프랑스 파리의 이디시 학생의 사진을 활용한 ‘저장소: 퓨림 축제’도 유대인에 관한 대표작이다.

‘저장소:  카나다’는 볼탕스키를 ‘쇼아 작가’로 자리매김한 대표작 중 하나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선 고물상에서 수천 벌의 옷을 구해 설치했다.

‘저장소: 카나다’는 볼탕스키를 ‘쇼아 작가’로 자리매김한 대표작 중 하나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선 고물상에서 수천 벌의 옷을 구해 설치했다.

볼탕스키가 다룬 삶과 죽음의 문제는 보편적이다. 학살된 유대인의 생전 사진으로 만든 것 같은 작품 중엔 그의 어린 시절과 노년의 사진, 범죄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섞은 사진, 신문 부고란에 실린 보통사람들의 사진으로 제작한 작품이 섞여 있다.

볼탕스키의 1987년 작 ‘샤스고등학교’.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1987년 작 ‘샤스고등학교’.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2014년 작 상흔(S001, S002, S003). 김종목 기자

볼탕스키의 2014년 작 상흔(S001, S002, S003). 김종목 기자

“죽음을 체화”한 43점의 작품은 모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한다. 볼탕스키는 이 전시를 준비하던 지난 7월 숨졌다. 그는 사망 전 전시 타이틀로 ‘4.4’로 달았다.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과 생로병사의 4단계를 뜻한다. 볼탕스키는 한국에서 숫자 4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점을 흥미롭게 여겼다고 한다.

전시를 보며 언젠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두고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볼탕스키가 아름다운 지중해 해변에서 난민의 주검을 상기했듯, 타자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공감, 연대를 떠올릴 수 있다. 볼탕스키가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은 건 작품의 보편성과 확장성이다. 볼탕스키의 사계와 사막, 오래된 사진에서 각각 한국의 학살·참사의 장소, 이웃의 모습이 겹쳐졌다. 전시는 2022년 3월27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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