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근대 화가 친일부터 현대 작가 장사까지…거침·성역 없이 비판·감정하는 황정수 인터뷰

김종목 기자

미술평론가 황정수를 만난 건 지난 3월11일이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푸른역사)를 낸 직후였다.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2시간가량 황정수가 쏟아낸 책 이야기, 미술(계) 이야기를 12매 분량의 기사 ‘근대 서울 경성 미술의 흔적을 두 발로 찾다’(▶기사보기)에 담긴 역부족이었다.

황정수는 이날 재테크로 점철된 미술시장 문제, 장삿속에 빠진 민중미술가, 끼리끼리 뭉치는 작품 감정, 미술계 연고주의, 갤러리 전속 원로 작가의 ‘평가 인플레이션’, 한국 미술사에서 일본과 일본인 화가의 존재 의미에 관해서도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황정수처럼 실명 비판을 하는 이들은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드물다. 페이스북(facebook.com/profile.php?id=100013372487742)도 성역 없는 비판·비평의 장이다. 추가 보완 인터뷰를 이메일로 두 차례 더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문.

- 왜 서촌·북촌을 다루었나요.

“지금은 인왕산 아래를 서촌이라 하는데, 옛날엔 서대문에서 사직동 언저리까지가 서촌이었죠. 조선시대 우대(웃대)라 불린 지금의 서촌엔 중인들이 주로 살았어요. 화가나 서예가들도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웠죠. 개화되면서 힘까지 갖추게 된 것이고요. 경제적 여유와 예술적 재능이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요. 행인(杏仁) 이승만(1903~1975)이 그중 한 명이죠. 그는 역관 집안의 후예였어요. 또한 북촌 쪽 광통교나 인사동 지역도 그림 유통의 중심지였고, 그림을 사줄 만한 부유한 양반들은 대부분 북촌 지역에 살았어요. 이들이 미술계의 패트론(patron, 후원자) 역할을 하니 자연스럽게 북촌 지역에 서화가(書畵家)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미술평론가 황정수가 지난 3월11일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현장 취재와 발굴의 결과물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샀다는 그의 작업실엔 그림과 문헌 자료가 가득하다. 실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작품 평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김종목 기자

미술평론가 황정수가 지난 3월11일 서울 인사동 황정수미술연구소 사무실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는 현장 취재와 발굴의 결과물이다. 돈이 생길 때마다 그림을 샀다는 그의 작업실엔 그림과 문헌 자료가 가득하다. 실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작품 평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김종목 기자

- 서촌파와 북촌파라고 해야 할까요. 책을 보면, 그 지역 중심으로 화단이 형성된 듯합니다.

“서촌과 북촌에 각각 살던 스승 집 주변에 제자들이 모여 살았어요. 근대기 채색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1892~1979)는 창덕궁 앞 북촌, 라이벌이자 남종화 대가 청전 이상범(1897~1972)은 서촌에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화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맡았어요. 동양화 부분은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화단이 형성됩니다. 두 사람도 경쟁 관계였고 제자들끼리도 경쟁했는데, 지금의 진영 논리의 한국 정치랑 조금도 차이가 없어요.”

고희동(1886~1965)은 “서양화의 시작을 알린” 작가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은 창덕궁 후원 옆에 있다. 황정수는 이곳이 한국 미술 근대화의 상징 같은 곳이라 자주 간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고희동(1886~1965)은 “서양화의 시작을 알린” 작가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은 창덕궁 후원 옆에 있다. 황정수는 이곳이 한국 미술 근대화의 상징 같은 곳이라 자주 간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황정수의 근대 화가·그림 지형도와 육하원칙에 입각한 설명이 줄줄 이어진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은 광통교 쪽에서 활동했다.” “인사동은 일제강점기 서화 유통 본거지다.” “조선시대 그림을 그리던 관청인 도화서 자리가 지금 조계사 부근이다.” “서화협회는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었다.” “인사동, 익선동, 와룡동 등지에 조선과 근대를 잇는 유명 서화가들이 다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 화가들이 서촌에서 한국인 화가들을 밀어냈다고 한다. 일본인 화가들은 남산 아래 남촌에도 들어갔다. 황정수는 “인사동을 중심으로 해서 북촌과 서촌에서 남촌으로 하나의 미술 벨트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 2018년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는 어떤 계기로 낸 겁니까.

“책 제목은 정확히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 교류사,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입니다. 한일 문화 교류 측면에서 쓴 책입니다. 주로 일제강점기 한국에 와서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들이 그린 한국 풍경 그림에 관한 글입니다. 이 일본인 화가들은 한국에서 활동을 하며 한국 근대미술사 형성에 기여를 하다,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도 화가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한국에서도 역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결국 이들도 일본 제국주의가 낳은 불행한 디아스포라(경계인)라 할 수 있습니다. 근래 일본에서 이 시대 미술가들의 활동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연구는 한일 양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쪽 연구가 부족해 축적된 자료가 부족한 형편입니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는 자료 수집을 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역관 집안의 후예인 행인 이승만(1903~1975)은 서촌에 살았다. 황정수는 “한국 미술사에서 특이한 지점에 있는 작가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와서의 활동은 서양화보다는 신문 소설의 삽화로 유명세를 얻은 ‘삽화의 명수’”였다고 말한다.  황정수 제공

역관 집안의 후예인 행인 이승만(1903~1975)은 서촌에 살았다. 황정수는 “한국 미술사에서 특이한 지점에 있는 작가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와서의 활동은 서양화보다는 신문 소설의 삽화로 유명세를 얻은 ‘삽화의 명수’”였다고 말한다. 황정수 제공

- 민감한 문제인데, 근대기 ‘일본 미술’, ‘일본인 화가’의 존재·역할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 책엔 “일본인이 먼저 받아들인 서구 미술 사조의 유입이 빨리 이루어져 한국 근대 미술이 자리를 잡는 데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쓰셨고요.

“‘자랑스럽지 못한 강점기 역사’ 때문에 연구를 제대로 안 하거나 못한 부분이 많아요. 여러 연구자들이 미술 분야에서 발전한 일본이 발전되지 못한 한국에 영향을 줬다는 식의 서술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듯해요. 한국 근대 미술을 논할 때 ‘한국인 화가’들을 가르친 ‘일본인 화가’들을 빼면, 근대기 전체 면모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를 배운 일본인이 도쿄에 온 한국인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이 제자가 나중 한국에서 유명화가가 되었어요. 한국에서 ‘서구 인상파 영향을 받았다’라고 평을 하는데, 1886년 프랑스에서 화가 라파엘 콜랭에게 배운 구로다 세이키 영향을 받아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 유명화가들은 고희동·김관호 등입니다. 이들이 일본에서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는지, 왜 그런 작품을 그렸는지 하는 연구가 없어요. 게다가 일본엔 이미 미술학교가 많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여러 대학에 미술학부가 있었고, 전문미술학교가 따로 있었어요. ‘일본대학 예술학부’와 ‘일본미술학교’가 별개 학교죠. 한국에선 그것조차 구분이 잘 안 되요. 미술사 연구자들조차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혜석(1896~1948)의 ‘선죽교’. 황정수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어떤 남성들보다 더 그림을 사랑하고 한평생 그림을 그린 천생 화가였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는 ‘나혜석’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나혜석(1896~1948)의 ‘선죽교’. 황정수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어떤 남성들보다 더 그림을 사랑하고 한평생 그림을 그린 천생 화가였다. 그러한 까닭에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서양화가’는 ‘나혜석’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 당시 유명 화가들이 대부분 일본에서 공부했는데요.

“그렇죠.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은 도쿄미술학교에서, 김환기는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부에서 배웠죠. 이중섭은 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배웠어요. 이인성은 태평양미술학교에요. 나혜석, 박래현은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이에요. 다들 누군가한테 배웠으니, 그림이 그렇게 나왔을 거 아닙니까. 이들이 일본에서 어느 스승한테 배워 그들의 그림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설명이 있어야 그들의 예술세계가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 미술사에는 그런 설명이 부족해요. ”

[전문]근대 화가 친일부터 현대 작가 장사까지…거침·성역 없이 비판·감정하는 황정수 인터뷰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표지는 원작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7월에 나온 잡지 < 별건곤> 제8권 7호의 표지다. 당시 인기 관광지인 금강산의 모습을 소재로 현대적으로 구성한 ‘모던 금강제일봉’이다. 이 도안 작가 이름도 황정수라고 한다.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표지는 원작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7월에 나온 잡지 < 별건곤> 제8권 7호의 표지다. 당시 인기 관광지인 금강산의 모습을 소재로 현대적으로 구성한 ‘모던 금강제일봉’이다. 이 도안 작가 이름도 황정수라고 한다.

- 한국에 온 일본인 화가의 당시 역할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에 썼듯, 일본인 화가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우리 미술도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례가 많아요. 그 사람들이 한국 미술이 지금까지 오는 데 많은 역할을 한 겁니다. 한국에 온 일본인 유명 화가들의 학습 경로를 보면, 서양화 전공자는 프랑스나 미국으로 가 배웁니다. 동양화 전공자는 프랑스나 중국으로 갔지요.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일본 미술도 크게 발전합니다. 외국 사조를 배운 일본인 화가들의 역할은 일본인들을 개화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식민지 한국인을 개화시키려는 것도 있었죠. 그 목적을 지닌 이들이 주로 공립학교 선생들입니다. 경성 제1·2고보나 평양고보, 대구고보의 미술선생이 모두 일본인 화가들이었습니다. 심형구, 정현웅은 경성제2고보 미술 교사였던 야마다 신이치에게 배웠습니다. 야마다의 뒤를 이어 이 학교에 온 사토 구니오 제자가 유영국, 장욱진 등입니다. 조선미술전람회가 생긴 뒤로 ‘한국에 가면 대접도 좋고, 볼 게 많다’라는 말이 돌아 서로 오려고 했어요. 일본 화단은 교토파와 도쿄파, 둘로 나뉘어지는데, 그 각 파벌이 서로 심사위원을 맡아 한국에 오려고 애를 쓰기도 했어요. 일본에선 1급이 못 되니 한국에 와서 정착하며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생계형 화가들도 있었습니다.”

조선미술전람회 초기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키 소메이(1875~1957)의 ‘금강산’. 일본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소장품이다. 황정수는 “선묘나 갈필을 사용하는 등 일본 남화 풍이 그대로 살아 있다. 1926~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왔을 때 금강산을 구경하고 사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개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에 오면 먼저 금강산을 보고 싶어했던 것을 고려하면 1926년 작품일 개연성이 높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조선미술전람회 초기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키 소메이(1875~1957)의 ‘금강산’. 일본 가나가와 현립 근대미술관 소장품이다. 황정수는 “선묘나 갈필을 사용하는 등 일본 남화 풍이 그대로 살아 있다. 1926~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왔을 때 금강산을 구경하고 사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개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에 오면 먼저 금강산을 보고 싶어했던 것을 고려하면 1926년 작품일 개연성이 높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 이들은 주로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일본인 화가들 정서는 일종의 ‘엑조티즘’이죠. 한국의 이국적인 정서를 자기 작품에 담으려고 굉장히 노력했습니다. 풍습에 관심을 둬 세시풍속 등 한국 풍속을 그렸고, 여성들의 모습 또한 큰 관심사였어요. 한국의 오랜 전통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도 주요 사생 대상이었습니다. 경성, 평양, 개성의 오래된 유적을 많이 그렸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산천도 보려 했어요. 제일 보고 싶어 한 게 금강산이에요. 일본엔 파노라마식으로 펼쳐지는 바위산이 없으니까요. 일본 화가들 꿈이 금강산을 그리는 것이죠. 안 그린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림이 나와요. 다만, 일본에 많이 가지고 갔고, 한국에 남아 있던 것은 대부분 사라져 남아 있는 건 많지 않아요.”

야마다 신이치(1899~1991), ‘내금강 마하연’( 1942). 황정수가 발굴해 소장한 작품이다. 원래 그림 소장자는 북한산 그림으로 알았다고 한다.  황정수는 이 그림을 산 뒤 캔버스 안쪽 천에서 “摩訶衍庵(內金剛), 昭和 十七年 六月, 山田新一 畵( 작품 제목은 ‘마하연암(내금강)’이고 작품 제작연도는 ‘쇼와 17년(1942년) 6월’, 작가는 ‘야마다 신이치’라는 뜻)”을 찾았다. 황정수 제공

야마다 신이치(1899~1991), ‘내금강 마하연’( 1942). 황정수가 발굴해 소장한 작품이다. 원래 그림 소장자는 북한산 그림으로 알았다고 한다. 황정수는 이 그림을 산 뒤 캔버스 안쪽 천에서 “摩訶衍庵(內金剛), 昭和 十七年 六月, 山田新一 畵( 작품 제목은 ‘마하연암(내금강)’이고 작품 제작연도는 ‘쇼와 17년(1942년) 6월’, 작가는 ‘야마다 신이치’라는 뜻)”을 찾았다. 황정수 제공

- 2018년이면 ‘토착왜구’니 ‘친일·반일 프레임’이니 하는 말이 여전히 나올 때인데요.

“그 프레임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일본 화가나 작품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어요. 더욱이 ‘일본을 통해 한국 미술이 정착되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던 때였어요. 책을 내주겠다는 곳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 분위기였는데, 책 반응이 특별해서 매우 놀랐어요. 책이 제법 잘 나갔고, 언론도 많이 다루고, 학자들 관심도 컸어요.”

[전문]근대 화가 친일부터 현대 작가 장사까지…거침·성역 없이 비판·감정하는 황정수 인터뷰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는 책 출간 3년 전 완성했다. 황정수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한일관계가 좋지 않아 출판사마다 출간을 꺼렸다”고 말했다.

- 부담은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라는 신념 때문에 크게 부담 된 건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에는 한국인 화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화가들이 함께 있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일본인 화가들도 함께 참여했으니 모두 연구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또한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영향을 주었어요. 김기창, 장우성, 배렴 등 한국인 화가들은 경쟁자인 일본인 화가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늘 신경을 썼지요.”

시미즈 도운의 ‘최시형 참형도’(왼쪽)와 ‘최제우 참형도’(오른쪽). 황정수는 “시미즈 도운은 일본인 화가 중에 일찍 경성에 자리 잡은 화가였는데, 덕수궁 뒤 정동에 살며 일본인 화가들의 좌장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두 작품을 두곤 “한국인의 자주적 행동이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작품이다. 더욱이 우리의 쓰라린 기억을 한국인 화가의 손이 아닌 일본인 화가의 손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억울한 일이다. 이 작품이 그동안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실이 부끄러워 떼어져 처박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시미즈 도운의 ‘최시형 참형도’(왼쪽)와 ‘최제우 참형도’(오른쪽). 황정수는 “시미즈 도운은 일본인 화가 중에 일찍 경성에 자리 잡은 화가였는데, 덕수궁 뒤 정동에 살며 일본인 화가들의 좌장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두 작품을 두곤 “한국인의 자주적 행동이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작품이다. 더욱이 우리의 쓰라린 기억을 한국인 화가의 손이 아닌 일본인 화가의 손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억울한 일이다. 이 작품이 그동안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실이 부끄러워 떼어져 처박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황정수 제공

- 시미즈 도운(1869?~1929)의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 기록화를 발굴해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에 실어 대중에게 알렸는데, 이 기록화는 어디서 어떻게 찾은 건지요.

“사실 이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안 것과 연구서에 처음 실은 것은 저지만, 세상에 처음 드러난 것은 미술품 경매에서였어요. 제가 감정을 해주고 구입하려고 했는데, 장사하는 분이 돈을 더 받으려고 경매에 출품했어요. 황당한 일이지만 수집하다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그나마 처음으로 책에 실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황정수는 여러 연구자들에게 서로 도와가며 근대 미술사의 부족한 점을 서로 채워나가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여러 사람이 “자칫 일본을 찬양하는 얘기처럼 되어 연구자로서의 모습이 나쁘게 보일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친일 미술인’에 대한 이중잣대도 문제 삼았다.

정현웅(1911~1976)이 일제 강점기인 1930~1940년대 그린 잡지 표지화들. 황정수는 “일제강점기 출간된 책이나 잡지에 가장 많은 표지화를 그린 서양화가다. 근대 서지학을 공부하며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책을 넘기다 보면, 정현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안다”라고 했다. 황정수는 “(정현웅은) 일제 말기에 전쟁 선동을 목적으로 친일 단체가 주도하는 수많은 전시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었다”는 내용 등을 담은 조선일보 <“세상 곧 바뀐다”… 친일 삽화 거부한 출판미술의 개척자> 기사(2020년 3월 11일자)를 보고 페이스북에 이 표지화와 글을 올렸다. 정현웅은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에도 ‘하늘은 우리가 정복할 곳이다’라는 제목의 표지화를 ‘소국민’에 실었다. 황정수 제공

정현웅(1911~1976)이 일제 강점기인 1930~1940년대 그린 잡지 표지화들. 황정수는 “일제강점기 출간된 책이나 잡지에 가장 많은 표지화를 그린 서양화가다. 근대 서지학을 공부하며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책을 넘기다 보면, 정현웅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한지 쉽게 안다”라고 했다. 황정수는 “(정현웅은) 일제 말기에 전쟁 선동을 목적으로 친일 단체가 주도하는 수많은 전시회에는 단 한 번도 출품한 적이 없었다”는 내용 등을 담은 조선일보 <“세상 곧 바뀐다”… 친일 삽화 거부한 출판미술의 개척자> 기사(2020년 3월 11일자)를 보고 페이스북에 이 표지화와 글을 올렸다. 정현웅은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에도 ‘하늘은 우리가 정복할 곳이다’라는 제목의 표지화를 ‘소국민’에 실었다. 황정수 제공

- 왜인지요.

“누가 친일 미술인인가 할 때 한일병탄 전후에 나라 빼앗기는 데 앞장 서 협조한 미술인은 당연히 ‘친일 미술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재 말하는 ‘친일미술인’ 분류에 들어간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일본인들이나 스승의 권유로 작품 출품한 것 하나만 갖고 친일 미술인으로 분류된 이들도 여럿이죠. 예를 들어, 제가 보기에 진짜 친일 부역 행위를 한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정현웅입니다. 친일 잡지 표지를 몇 년에 걸쳐 그렸어요. 나중에 일각에서 ‘정현웅이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친일로 매도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거죠.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성열 같은 경우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어려워 중일전쟁에 종군을 했어요. 지성열은 신문에 나온 몇 줄 기록밖에 없고, 한국 연구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친일 미술인으로 매도됐어요. 또한 일제강점기 태어난 이들 중엔 해방되기 전까지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한 사람도 많아요. 이런 거죠. 우리가 보통 민족주의적 입장에 있다고 평가하는 서화협회는 이완용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겁니다. 유명한 안중식, 조석진 등이 참여를 했어요. 훗날 중일전쟁에 종군한 어린 화가와 비교해 누가 더 친일을 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안중식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중국과 일본을 가까이 하며 변모의 과정을 겪는데, 1910년대 1920년대에 태어난 화가들 중 출세 좀 하려고, 또는 작품 내라 해서 냈는데, 친일로 매도되는 경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를 기준을 정확히 두고 봐야 한다는 거죠.”

황정수는 해방 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민족주의 진영 분야만 연구가 됐다고 본다. 그는 “처음에는 한국 근대 미술사가 반쪽 미술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삼분의 일 미술사 또는 사분의 일 미술사 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는 한국 근현대사와 미술사에 얽힌 문제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또 상당수 사람들이 월북을 해요. 월북한 사람들을 대부분이 진보적 인물로 평가해요. 과연 그 사람들은 다 진보적인가, 그러면 그 사람들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어땠는가. 친일에서 자유로운가 이런 문제도 한 번 따져볼 필요가 있어요. 한 예술가의 한 평생을 다루려면 그 전모를 봐야 되는데 우리 약점이 일제강점기를 모른다는 겁니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요.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은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를 그린 인물이라 평가하지요. 그런데 과연 이들은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은 작가일까, 아니면 활동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신남화’라고 하는 것에 영향을 더 많이 받았을까 하는 걸 동등하게 염두에 두고 연구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거죠. 요즘 갑자기 북한 미술사 연구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어요. 대부분 해방 후 월북한 화가들에 대한 연구입니다. 물론 필요한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월북 후 활동에 대한 연구에 치우쳐 있고, 해방 전 활동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체제의 변화에 따라 변해간 화가들의 활동을 연속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대개 북한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는 미술을 했어요. 그렇다보니 지금 연구는 대부분 이데올로기 문제 중심이에요. 그렇다보니 예술가로서의 활동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요즘 잘 나가는 미술가들 중에 박서보, 하종현 등 단색화 화가와 이건용, 이승택 등 개념미술 했던 작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지나친 평가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들이 요즘 하는 작업은 1970~1980년대 했던 작업의 동어반복이나 다름 없어요. 그때는 일반인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어요. 과거에는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던 장르가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비싸게 팔리는지 알 수 없어요. 게다가 이러한 작업이 그렇게 비싸게 팔리는데도 그 작품들을 연구한 성과물이 별로 없어요. 작업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데, 시장에서는 거래가 과열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죠. 다 기현상이라 할 수 있어요.”

-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로 돌아가서, 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경성 화가들에 주목했나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춘곡 고희동 작품은 서양화 석 점만 남았어요. 최초의 서양 조각가 김복진도 예술성을 담은 작품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요. 이중섭, 김환기는 1950년 이전 작품 중 남은 게 다섯 점 넘지를 않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을 근대작가로서 하늘처럼 떠받드냐는 거죠. 자료도 없긴 하지만, 위대하다고 추앙하는 그 분들에 관한 일제강점기의 작품 연구도, 그분들이 영향을 준 후배 작가들에 관한 연구도 많지 않죠. 여기에 근대기 작품이 이들보다 훨씬 많은 작가들 연구가 없는지에 개인적인 불만이 있었어요. 찾아보면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보다 일제강점기 제작한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들이 있거든요. 이 책에 그런 작가 중에 여러 명을 새로 조명했습니다.”

- ‘근대’ 개념을 학술적으로 따지면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렇죠. 역사학에서는 근대에 대한 개념 규정이 다양하여 미술사에 적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책에선 한국 미술사에서 서양화가 유입되는 순간과 동양화가 조선시대와 다른 새로운 흐름으로 화법이 바뀌는 순간을 두고 근대라는 개념을 상정했어요. 이 시기는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걸쳐 있죠. 서구의 영향과 일본의 영향이 뒤섞여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양상을 살펴보려 했어요.”

-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다가 2001년 퇴직한 뒤, 잠깐 단 옥션도 운영했지만, 그 기간 포함해 줄곧 미술사 연구를 했는데요. 어떻게 미술에 관심을 가진 건가요.

“조선시대로 따지면 문학, 미술, 음악이 늘 하나였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미술을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畵中有詩 詩中有畵(화중유시 시중유화 :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르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소동파의 글)’라는 말이 대표적이죠.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할 때 근대 문학가들 주변에는 늘 화가들이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화가들의 활동을 알 수 있었고, 우연히 그들의 작품을 구하게 되었어요. 미술 공부와 작품 소장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그 때 작품을 얻으며 느낀 카타르시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이때의 감동이 결국 평생 미술공부를 하게 만들었어요.”

연구소를 찾았을 때 황정수는 출판사 요청으로 신간 속지에 사인을 하고 있었다. 이름 곁에 ‘화중유시 시중유화’를 적고 있었다.

“대학원(연세대 국문학과) 다닐 때 연민 이가원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어요. 한학계 거물이시죠. 서화에 대해서 조금 아는 제가 이뻤나봐요. 제가 찾아뵈면 늘 서화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저한테 ‘자네 생각엔 어떻나’ 이렇게 물어보시면 ‘그건 조금 좀 그 문기(文氣)가 떨어지지 않나요’ 이런 말 한마디 하면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혼자 공부해 괜히 멋있는 질문을 하나 만들어 갖고 갔어요. 그러면 또 답해주시고요. 그 주고받는 언어가 너무 행복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추사 김정희 선생이나 오세창 선생 등 예전 연구자들이 실물을 보고 공부했다는 걸 느꼈어요. 책으로 공부를 한 게 아니었던 거예요. ‘소유하지 않으면 작품을 알 수가 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죠. 박물관 유리를 통해서 보는 거나 책 같은 매체를 통해서 보는 게 아닌 실물을 보고 만지면서 공부를 하려 했죠. 한 점씩 한 점씩 추가해서 소유하다 보니 소위 미술사 책에서 도판으로 본 작품들을 실물을 통해서 보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부터 내 눈으로 보고 또 내 발로 가본 곳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진실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죠.”

- ‘시중유화, 화중유시’를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본래 이 말은 중국의 소동파가 한 말인데, 왕유의 시와 그림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고려시대 정지상 시 ‘송인(送人)’을 한번 생각해봐요. 대동강가에서 남녀가 헤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은 누가 읽어도 가슴이 저리죠. 만일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면 누구나 남녀가 헤어지는 장면을 그리고 그 옆에 흐르는 물결을 그릴 거에요. 그 물은 당연히 눈물을 뜻할 거에요. 시를 읽으며 이런 장면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죠. 그래서 시를 아는 사람들은 약간의 감성과 논리만 있으면 미술을 금방 배울 수가 있죠. 미술도 시의 논리와 비슷해요. 또한 각 나라의 미술도 비슷해요. 한국 미술에 정통하면 다른 나라 미술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그 나라 미술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알 수 있을 거에요. 논리가 같으니 해석 코드 방식만 조금 바꾸면 알 수 있어요. 음악이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예술적 코드를 미술로 바꾸면 습득력이 굉장히 빨라요. 공통적인 예술적 감성을 지닌 사람은 다른 장르를 배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시중유화 화중유시’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속성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 ‘한국 미술사를 국사 시간에 배운 게 문제’라고 쓴 걸 봤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한국 미술을 미술 시간보다는 국사 시간에 주로 배웠어요. 미술 선생님들 대부분이 서양화를 전공한 분들이다 보니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적었어요. 그렇다 보니 미술 시간보다는 오히려 국사 시간에 한국 미술에 대해 배우는 것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국사를 가르친 선생님들이 대부분 실증주의 사학을 배운 분들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미술 작품을 객관적인 사실 중심으로 외우도록 배운 것이 많았어요. ‘어떤 유파에 속하고, 누구의 몇 년도 작품이다’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우는 그런 식이었어요. ‘그 작품이 뭐가 좋은지, 어떤 느낌’인지는 거의 배운 적 없어요. ‘조선 중, 후기 시대에 단원 김홍도가 나오고, 이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나왔다’라는 식이었지요. ‘세한도’라는 작품의 어떤 면이 좋은지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미술 시간에는 석고상이나 꽃, 컵 등을 갖다 놓고 데생하는 식의 서양식 실기 교육을 받았죠. 미술 선생님조차 우리 미술을 잘 모르니, 제대로 가르치지를 못했어요. 그러니 이제라도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에 관한 공부가 필요해요. 그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어야 박물관에 가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가게 돼요. 그동안 우리에게 미술이라는 게 외워야 될 과거의 사건들과 비슷하니, 젊은 사람들이나 미술학도들이 조선시대 이전의 예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잘 생기지 않았던 것이죠. 애호가들이 줄어드는 이유도 우리나라 미술 교육에 가장 큰 문제점이 있지 않나 생각해요. 요즘 평론가들도 애호가들과 아름다움에 관한 정서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것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어떤 평론가, 미술사학자는 무작정 서양의 미술사 이론을 가져다 설명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고 배우는 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통하려는 경우도 있어요.”

황정수는  김정희의 ‘세한도’가 왜 좋은 작품인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황정수는 김정희의 ‘세한도’가 왜 좋은 작품인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감정가로도 유명한데요. ‘가짜’를 많이 고발하신 걸로요.

“감정은 미술계를 정화하는 필터 같은 일이에요. 우리가 공부하고 감상해야 할 미술 작품 속에 거짓된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중요한 일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 작가들의 많은 호 중 하나가 ‘춘곡(春谷)’이에요. 그런데 작품의 인장(印章)이 ‘춘곡’이라고만 되어 있고, 이름 도장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춘곡’만 보고 ‘춘곡 고희동’이라고 판단해서 고민 없이 전시를 해요. 그러면 고희동 선생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한국 미술사가 오염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문제점을 지적해야 될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예전에는 오세창 선생이나 손재형 선생 같은 감식안을 가진 분들이 그런 일을 하셨어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작품 진위를 두고 비교적 솔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 미술품이 값 비싼 재화의 하나가 되면서 위작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그러면서 진위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게 되었어요. 그 (진위에 관한) 말을 했을 때의 책임 소재 문제 때문에 그래요. 더 큰 문제는 점점 더 그 작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 있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에요. 박물관이나 여러 기관에서 유물을 구입할 때 소위 심의위원들이 관여하는데, 참여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대학 교수들이나 박물관 종사자들이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작품 내용을 연구한 사람들이지 진위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렇다보니 실수하는 경우가 많아요.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광장’전을 할 때 민영환의 위작 대나무 그림이나 오세창의 서예 작품 인쇄본을 전시한 것도 연구자들만이 주로 감정을 했기 때문에 발생한 거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교차 감정을 해야 하는데, 같은 계열의 연구자들끼리만 감정하다보니 정확한 감정이 되지 않아요. 작품의 진위 구별, 위작 문제는 절대 다수결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구 한 사람의 정확한 정보가 있으면, 그 사람 말이 맞는 겁니다. 그러니 감정은 OX 문제처럼 정확해야 해요. 그만큼 엄격해야 된다는 거죠.”

- 진위 감정으로 끝나는 문제는 아닌 듯 싶습니다.

“유력 기관에서 도록이 나오면 공신력이 생겨요. 가짜라도 도록에 실리면 쉽게 진품으로 둔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작품 값이 비싼 것일 경우 더 유혹이 심합니다. 예를 들어 이중섭이나 박수근, 김환기 등 유명 작가는 그림 값이 수억에서 수십억대를 호가합니다. 위작이 도록에 실려 진품으로 행세할 경우, 낭패를 보는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후학들이 이 도록을 연구의 텍스트로 쓴다는 거예요. 대부분 연구자들이 이런 도록에 실려 있는 작품들을 주요 텍스트로 연구합니다. 제가 지적하여 막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 지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위작을 구분하여 후배들이 텍스트로 안 쓰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 단 한 가지가 제 목표입니다. 또한 이런 사명감 뒤에는 제가 가진 데이터를 세상 누구라도 언제든지 제공하겠다는 것도 있어요. 자료는 서로 공유하지 않으면 학문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저에게도 한일 미술 교류에 관련된 작품·자료 등 근대 미술 관련 자료가 제법 있어요. 몇 년 전에는 한국 연구자들과 같이 공유하고 싶어서, 같이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었죠. 그 때 여러 사람들이 자료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 국내 연구자 중에서 그 작품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사람은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한두 명이 찾아 오긴 했는데, 모두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교수들이 가능한 한 실물을 보고 연구하라고 해서 찾아왔다고 합니다. 제 미술 글쓰기 소신 중 하나도, 실제 작품을 보고, 그 작품에 관한 느낌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죠. 그래야 그 작품에 대한 진솔함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가능한 한 실물을 확인하지 않은 작품은 언급을 안 하려고 해요.”

- 적들이 많이 생길 거 같은데요. 미술계가 좁기도 하고요.

“주변 사람들이 제 걱정을 많이 하는 건 사실입니다. 친교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문제, 법적인 문제 등 여러 걱정을 하죠. 어떤 사람은 괜히 쓸데없이 지적을 해서 분란만 일으킨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누구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려 하는 일이니 크게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그렇게 위작을 고발 안 한다고 해서 비전공자인 저를 우선 불러주는 대한민국 미술계가 아니므로 크게 경제적인 손해도 없습니다(웃음). 소리 없이 지내고 고개를 수그린다고 해서 강연이나 감정 등 미술계 일에 잘 끼워주지도 않죠. 한국 미술계는 철저하게 명문대 중심의 계보 정치를 하는 곳이라, 저 아니라도 전문가 행세할 사람은 줄 서 있어요. 그러니 저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은 미술사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일이죠. 아무도 지적하지 않을 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한 사람은 필요하겠지 않겠어요? 간혹 감정기구에서 감정을 부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럿이 모여 서로 합의해야 되는 감정이라면 하지 않겠다고 해요. 그런 합의 보는 감정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에요. 몇 번 거절했더니, 건방지다는 말을 듣기도 했죠. 때론 저는 없는 존재이기도 해요. 진위 관련해서 지적하면, 어떤 통로로라도 서로 의견을 교류하면 좋겠는데, 대개 ‘재수 없이 걸렸네, 아니면 무시해 버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죠.”

인문학 스타강사 최진기는 tvN <어쩌다 어른> 34회에서 오른쪽 그림이 장승업의 ‘군마도’라고 소개했다. 황정수는 스마트K에 올린 ‘tvN 미술 강의로 본 인문학 열풍의 그늘’ 칼럼에서 “그가 예로 든 말 그림은 장승업의 그림이 아닌 서울 어느 대학을 퇴직해 아직도 생존해있는 이모 교수의 그림”이라고 했다.   tvN  화면 갈무리

인문학 스타강사 최진기는 tvN <어쩌다 어른> 34회에서 오른쪽 그림이 장승업의 ‘군마도’라고 소개했다. 황정수는 스마트K에 올린 ‘tvN 미술 강의로 본 인문학 열풍의 그늘’ 칼럼에서 “그가 예로 든 말 그림은 장승업의 그림이 아닌 서울 어느 대학을 퇴직해 아직도 생존해있는 이모 교수의 그림”이라고 했다. tvN 화면 갈무리

- 황정수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게, 스타강사 최진기씨가 tvN 특강에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오원 장승업의 ‘군마도’와 ‘파초’로 소개한 걸 찾아내 지적한 것인데요.

“그때 미술계 사람들한테 미리 얘기했어요. 말도 안 되는 얘기하는데 좀 지적하라고요. 그런데 아무도 지적을 안 하는 거에요. 왜 안 한 건지 아직도 잘 몰라요. 아마 말을 해줘도 본인이 확신이 없어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감정 전문가가 많다고 얘기하는데, 실제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많지 않아요. 한 전문가는 나중에 ‘솔직히 장승업이 그린 줄 알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나마 솔직한 거죠. 어떤 이는 그런 비전문가를 뭐 하러 건드리느냐며 거들먹거리는 이들도 있었고요. 방송의 대중적 영향력이 얼마나 큰데 그런 말을 하는지…. 그때 그 방송 프로그램 게시판에 ‘잘못됐으니까 수정하라’고 썼죠. 아마 그들은 ‘황정수’란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겠죠. 찾아보고 유명한 사람이 아니니 무시한 거 같아요. 게시판에 올렸을 때 빨리 처리했으면, 그런 고발 글을 안 썼겠죠. 국립현대미술관이 2018년 ‘광장’ 전 할 때도 충정공 민영환이 그렸다는 대나무 그림을 위시한 몇 작품을 빼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며칠 지나도 그대로 있어요. 제 말을 믿지 않는 것이죠. 미술관 쪽에서 누구는 이 작품이 진짜라 하고, 당신은 아니라고 하는데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느냐 하더라고요. 제가 ‘진짜라고 한 분은 텍스트 문헌 학자 아니냐, 그러니 제 말을 믿고 떼라’고 했죠. 그런데 더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아요. 그래서 SNS에 올렸더니 난리가 났죠.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제가 전공자가 아니라는 데에서 오는 불신도 있는 것 같아요. 자신들이 철썩같이 주장한 것을 비주류 연구자에게 지적당하니 싫었던 것이겠죠. 그런데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더군요. 일본은 재야학자들에게 매우 관대해요. 연구도 함께 하고요. 10여 년 전 일본 전시회에 초대받아 갔더니 스마트K에 연재한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나중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로 출판됐다) 연재 글을 읽은 일본인들 몇몇이 인터뷰를 하러 왔더라고요. 그들은 한국말을 배워서 제가 연구한 분야를 공부하고 있더군요. 아마추어 연구자들인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가서 그림 그리던 일본 화가들을 찾아 공부하는 친구들이 제 글을 발견한 거지요. 그들에겐 외국인인데다 유명하지도 않은 저를 찾아왔다는 데에 매우 놀랐어요. 그 연구 저변이 깊은 데에도 매우 놀랐어요.”

황정수는 2019년 8월11일 페이스북에 ‘독립운동가들의 필적이라는 것들의 허상’이란 글을 올렸다. “독립운동가의 필적만 미친 듯 찾고 있고, 진위를 판단할 줄 모르는 전문가들이 이를 감정하고 있으니 미칠 지경이다. 그런 것 중 상당수는 198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했다. 그는 “미술사학자들의 논문에 순국한 ‘민영환’을 서화가라 하고 ‘묵죽’을 잘 그리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예를 드는 작품의 대부분이 장사꾼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당대 민영환의 손에서 나왔다는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이 단 한 점도 없다”고 했다. 황정수는 10월25일엔 ‘광장’ 전에 나온 만해 한용운의 ‘수연시’는 인쇄본이라고 지적했다. 미술관은 이 복제본이란 지적을 받고도 전시를 이어가다가, 언론에 보도된 뒤에야 ‘복제본’ 스티커를 붙였다.

[전문]근대 화가 친일부터 현대 작가 장사까지…거침·성역 없이 비판·감정하는 황정수 인터뷰

- 페이스북에 작품 진위 문제뿐만 아니라, 미술계 인사들 실명 비판도 종종 하시는데요. 임옥상씨가 김근태도서관의 ‘김근태 동상’을 제작한 것을 두고도 진보 진영 기념물을 임씨가 독식한다고 비판(아래 사진)하셨는데요.

“임옥상씨만을 지적해서 하려던 말은 아니었어요. 저도 본래는 진보적이라 할 만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늘 민중 미술을 좋아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를 동경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들이 가진 진영논리와 나눔의 문제에서 불편함을 느꼈어요. 위안부 문제의 중심에 서서 대량으로 생산된 ‘소녀상’의 문제도 그렇고, 새로운 진보 정권의 중심에 서서 주인처럼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는 예술가들에게서 진실한 민중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결국 민중미술의 중심이 함께 하고 나누자는데 있는데, 그들의 행동이 어떤 자본주의자보다도 더 독식한다는 생각이 들어 미웠나봐요. 이런 태도를 보고 친구들이 사회와 부드럽게 소통하면서 살라고 해요. 조금만 부드러우면 일거리도 많아지고, 먹고 사는 것도 좋아지지 않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걱정들 하죠.(웃음)”

[전문]근대 화가 친일부터 현대 작가 장사까지…거침·성역 없이 비판·감정하는 황정수 인터뷰

- 페북 글 보면 매우 공들여 쓰시는 듯합니다.

“국문학 전공을 해서 계속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요. 젊은 시절 먹고 사는 일에 신경쓰느라 글에 대한 갈증을 못 느꼈는데, 그럭저럭 여유가 생기니 다시 글이 쓰고 싶었어요. 몇 편 전공 논문 같은 글을 써보았더니, 별로 보는 이도 없고 글을 쓰는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4년 전부터 SNS에 글을 쓰며 같은 호기심을 가진 대중들과의 소통이 매우 빠름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실제 미술계에서 일하며 얻은 정보를 공유할 생각으로 매일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고 반응을 보이니 신이 나 더욱 열심히 쓰기 시작했어요. 아직도 제법 많은 저만의 정보가 남아 있어 소진될 때까지 계속 글을 쓰려해요.”

- 생업으로 미술사 연구한 게 22년째고, 실제 미술 공부를 한 지는 35년이 됐는데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둔 걸 단 한 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미술 공부라는 게 매일매일 해도 싫증이 잘 안 나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매일 하는 일이라는 게 미술품의 아름다움에 관한 걸 하잖아요. 애상적인 것이든, 신기하고 기발한 것이든, 아카데믹한 것이든,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재미 없는 날이 없어요. 제일 즐거울 때가 언제냐 하면, 간혹 잠이 안 오는 밤에 하릴없이 일어나 앉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어요. 그러면 그 작품을 꺼내 앞에 두고 조용히 마주 대하고 있으면, 그림하고 어떤 대화가 이루어져요. 미술품은 살아 있는 생물이에요. 한참 쳐다보다 보면, 미술품 속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마치 무속인들의 접신 비슷한 걸 느낄 때도 있죠. 작가의 마음이 된 듯도 하고요. 그 때의 희열이 매력적이죠. 미술은 마약과 같다고 늘 생각해요. 그만큼 미술 감상의 매력은 커요.”

- 작품 수집도 많이 하셨는데요.

“제가 하는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미술사에 이름은 남아 있는데, 작품이 거의 전하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하는 겁니다. 값이 비싸고 싼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집가가 제일 즐거울 때가 이러한 다른 곳에 없는 작품을 소장하게 되는 거죠. 국립현대미술관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없는 작품이면 더욱 좋고요. 그렇다보니 지금까지 다른 호화스러운 취미 활동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경제적으로 쉽지도 않았고요. 다행히 미술 작품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요. 주로 전시장을 다니며 즐기다가 그곳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수집품을 보지요. 수집 취미는 먼저 수집을 오래 한 한 선배가 ‘공부를 많이 하면 돈 없어도 좋은 그림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 시작하게 되었어요. 고마운 분이에요. 그 분이 말한 것 중의 인상적인 말이 또 있어요. ‘좋은 화상은 그림을 팔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좋은 화상은 수집을 갓 시작한 사람에게 작품을 팔지 않고 먼저 한 두 점 작품을 선물한다고 합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작품을 보며 정이 들고, 결국 그 화상의 집에 있는 작품을 다 사간다는 거죠. 마약 중독시키 듯이요. 이 방법이 최고 화상의 상행위라는 겁니다. 결국 저도 작품 몇 점을 선물한 그 분의 집에 있는 작품 상당수를 가져왔어요. 젊어서 교직 생활 하면서 번 돈의 대부분이 그 사람 손에 갔어요. 음~ 아이고, 그 때는 참 힘들었어요.(웃음)”

- 돈이 많이 나갈 듯한데요.

“거의 유일한 사치이긴 하죠. 특별히 다른 호사를 누리는 일이 없습니다. 살면서 크게 돈을 번 적은 없지만, 월급 받는 정도의 돈과 유휴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모두 미술 작품만 샀어요. 처음엔 늘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요령이 생겼어요. 다 방법이 생기더군요. 한 35년 작품을 수집했더니, 작품이 꽤 많아졌어요. 그런데 사둔 것 중에 어떤 것은 값이 많이 오르는 경우도 생겼어요. 그런 것들이 간혹 힘이 되기도 했지요. 재테크는 평소 염두에 둔 적 없어요. 근래엔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일을 주로 했는데, 이런 일로는 생활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일을 하다보니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은 됐어요. 그런 중에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안 사면 못 배기는 그런 병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 병은 치유가 잘 되지 않아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웃음)”

- 요즘 화랑미술제니, 아트페어니 미술시장 과열 이야기까지 나오는데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미술품을 좋아해서 샀는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그래도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미술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술품을 사서 한 번도 손해 본 적이 없어야 한다고요. 제가 소장했던 작품이 1만 점이 훨씬 넘어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손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사서 소장하면 그동안 감상을 하잖아요. 세월이 흘러 100만원 짜리가 십만원 짜리가 돼도 손해가 아니에요. 그동안 90만원 어치 감상을 하면 되거든요. 그러니 경제적으로 아무 문제가 안 돼요. 재테크를 생각하며 사면 손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 미술품을 좋아하는 마음이 중요한 거죠. 제 주변 미술 애호가들 중에서 손해 봤다는 언어를 쓰는 사람을 거의 못 봤어요. 실질적으로 미술품을 좋아하면 미술시장 작품 값이 마이너스가 돼도 그렇게 못 느끼는 겁니다. 경제적으로 따지지 않는데, 손해 본 사람도 없을 수밖에요. 게다가 미술품 소유의 자부심은 다른 소유와는 질적인 면에서 다른 면이 있어요. 비싼 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격이 있다고 볼 수 없죠. 그에 비해 좋은 미술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인 자부심은 되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심하죠(웃음). 그런데 소유하고 있는 좋아하는 그림을 누가 팔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가 있어 그림을 제법 많이 팔아봤는데, 그림을 팔고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늘 마음이 아파요. 주로 경제적 이유로 팔거나, 다른 그림을 사려 돈을 만들려고 팔 때였어요. 그래서 같은 값이면 미술관 쪽에 팔려고 하죠. 개인이 돈을 두 배를 준다고 해도, 미술관에 그 반값에 팔아요. 왜냐면 내가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개인은 잘 보여주지도 않고, 그 사람이 또 언제 누구한테 팔지 알 수 없어요. 나랑 마주했던 작품은 반려동물과 똑같아요. 정말 좋은 데로 가기를 바래요. 시장에서 인기가 적지만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은 미술관 아니면 절대 안 팔려고 해요. 그림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떤 예의라고 할까 그런 것들을 갖고 있죠.”

오세창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1928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처 : 스마트K

오세창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1928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으로 이름을 바꿨다. 출처 : 스마트K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요.

“당분간은 평소 가장 하고 싶어했던 일을 하고 싶어요. 오래 전에 오세창 선생이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을 냈어요.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작가 정리를 한 책이에요. 그런데 그 이후 조선 말기부터 근대기 활동한 작가들 이름이 기록도 없이 상당수가 잊혀져 버렸어요. 아쉬운 일이죠. 근대기라 부를 만한 시기의 작가들에 대한 정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요. 조선미술전람회 수상 작가만 해도 한 20~30년 전만 해도 누가 누군지 많은 사람들이 알았어요. 지금은 대부분 잊혀졌죠. 지역별로 중요한 작가들이거든요. 그런 작가들을 총 망라해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 해요. 그래서 근대기 작가들을 정리한 새로운 <근역서화징> 같은 책을 하나 편집하고 싶어요. 또한 오랫 동안 수집해온 작품들의 화보집도 만들어보고 싶어요.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 화가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풍경을 그린 작품들을 모아 화보집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여러 방식으로 미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걸 전달해주고 싶어요. 늘 생각해왔던 일인데 지금도 그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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