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여인들

김창길 기자
‘백아트 서울’ 홈페이지 (https://baikart.com)

‘백아트 서울’ 홈페이지 (https://baikart.com)

카메라를 손에 든 모든 아버지가 <윤미네 집>의 전몽각 선생처럼 다정다감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학과에 합격한 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카메라 장비와 필름들을 딸에게 넘겨야 하지 않겠냐는 아내 말에도 반응은 냉담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말이 있던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은 앙갚음이라도 하듯 그의 카메라와 필름들을 손에 넣었다.우리나라 광고사진가 1세대로 손꼽히는 한영수(1933~1999)의 미공개 사진들은 그의 딸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됐다.

이것은 현재진행 중인 <윤미네 집>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딸이 주고받는 사진 이야기. 동시대를 살며 한국의 리얼리즘 사진을 고민했던 아버지들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 전몽각 선생의 큰딸 윤미씨는 “태어나서 시집가는 날까지” 아버지가 기록한 본인의 성장 앨범을 선물받았다. 한영수 작가의 딸 선정씨는 그 반대다. 선물은커녕 아버지의 빚을 떠안았다. 헝가리에서 예정된 아버지의 사진전은 유작전이 됐다. 선정 씨는 전시회 준비를 위해 난생처음 아버지의 필름과 밀착 인화지를 살펴봤다. 선정씨는 깜짝 놀랐다. 한 컷 한 컷 버릴 것이 없는 아버지의 사진들. 상자에 담긴 오래된 필름들은 1956년부터 1963년 사이에 촬영된 것이었다. 딸은 아버지의 사진들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2014년 <서울, 모던 타임즈>를 시작으로 2015년 <꿈결 같은 시절>, 2017년 <시간 속의 강>, 그리고 2020년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를 출판했다. 지난 10일부터 ‘백아트 서울’에서 시작된 전시는 코로나19로 지연됐던 네 번째 사진집의 출판기념전인데, 초판은 이미 다 팔렸다.

한영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When the Spring Wind Blows)> (2020)

한영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When the Spring Wind Blows)> (2020)

“이 여인들은 누구인가? 한영수가 그의 카메라를 통해 선택한 이 순간들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리고 당시의 여성들은 왜 이런 모습으로 기억되지 못하고 있는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의 책머리에 딸은 아버지를 ‘한영수’라 적는다. 살아생전 소원했던 부녀 관계는 사진집 편집자의 시선에 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한영수는 왜 그 지점에서 셔터를 눌렀을까?” 사진가의 입장을 헤아리지만, 결정은 전적으로 편집자의 몫이다. 찍어야 할 목록들을 미리 정해놓은 워커 에번스를 한영수가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편집자는 그의 사진들을 테마별로 분류한다. 어린이, 한강, 우산, 시장 그리고 여인들…. 시장과 어린이들은 당대의 사진가들도 많이 선택했던 피사체였지만, 한영수의 시선은 모던했다. 특히 여성을 바라보는 그의 감각은 60여년이 흐른 지금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의 시선은 변화무쌍하다. 건물 로비에서 우산을 들고 밖을 나서는 여인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은 몰래 찍은 것처럼 흔들리고 앵글이 기울어졌다. 실패한 사진이라고 생각되지만 일부러 그렇게 찍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찍어야 그 장면은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여인의 뒷모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두 남녀가 벽에 기대어 있는 사진은 인물의 얼굴들을 프레임 밖으로 무참히 잘라 냈다. 실수라고 치기에는 너무 안정된 구도라 역시 사진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두 남녀의 포즈는 굳이 얼굴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연애의 한순간임에 틀림없다. 사진가를 빤히 쳐다보는 숙녀를 찍은 사진은 도발적이다. 그녀는 한영수가 만든 빛과 그림자의 쇠창살에 갇혀 있는 자신의 신세도 모른 채 웃고 있기 때문이다. 한영수는 엉큼하다. 승용차 뒷좌석에 동승해 친구의 여인을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좌) / 한영수 정동 돌담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좌) / 한영수 정동 돌담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히치콕의 영화 <이창>(1957)의 주인공처럼 한영수는 창밖 풍경을 사진 찍는다. 영화가 개봉할 즈음 뉴욕에는 그렇게 사진을 찍던 쟁쟁한 작가들이 있었다. 한영수는 뉴욕의 사진가들을 알고 있었을까? 사울 레이터는 2006년이 되어서야 알려진 사진가였기에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사울 레이터의 컬러사진만큼이나 감각적이다.

뉴욕 5번가의 아파트에 살았던 앙드레 케르테츠는 알고 있었을까? 1954년 뉴욕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워싱턴 스퀘어 공원의 풍경은 <서울, 모던 타임즈>에 수록된 서울의 공원 사진과 느낌이 비슷하다. 한영수의 딸은 아버지가 사진의 세계적인 흐름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서재에는 당대 사진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들>(1958) 초판본이 꽂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비트 세대의 대표 작가 잭 케루악은 프랭크가 찍은 주크박스 사진을 보며 “이 사진들을 보고 나면, 당신은 관(棺)보다 주크박스가 더 슬픈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고 만다”라고 쓴다. 프랭크는 사물 너머의 어떤 분위기를 찍어 냈다.

한영수 서울 명동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서울 명동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비 내리는 어느 날, 한영수는 명동에 간다. 나는 그가 2층 다방 창가에 앉아 있었다고 상상한다. 한영수가 창밖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핸드백을 팔에 끼고, 우산을 받쳐 든 트렌치코트 차림의 한 여성이 길을 건넌다. 한 꼬마가 그녀 앞에 느닷없이 뛰어들지만 그녀의 단호한 발걸음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또각또각. 보행자 신호등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대의 세단 승용차는 정지선 앞에 멈춘다. 운전자들은 여인의 행진을 사열한다. 또각또각. 우리는 여인의 얼굴이나 표정을 볼 수 없다. 한영수가 포착한 것은 단지 여인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사진은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그녀는 어디를 가고 있을까? 사진에 찍히지 않은 운전자들은 그녀를 줄곧 쳐다보고 있을까? 위풍당당한 그녀의 발걸음 말이다.

당대의 명동은 어땠을까? 파리의 번화가가 샹젤리제고, 뉴욕은 5번가였으며, 도쿄가 긴자였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였다. 1959년 경향신문은 ‘봄을 전시하는 쇼윈도’라는 제목으로 명동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코트를 훨훨 벗어 젖혀놓기에는 그래도 좀 쌀쌀한 날씨, 그냥 코트를 걸쳐 입기에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듯싶은 그러한 첫봄. 그래도 명동의 쇼윈도들은 봄빛 어리는 원피스니 양단 겹저고리를 마네킹에 입혀놓고 봄을 전시하고 있다.” 여성학자 김미선은 1959년 명동의 양장점이 13개였고, 3년 후에는 30여개로 늘어났으며, 1971년에는 150여개에 달했다는 보고서를 <명동 아가씨>(2012)에 남겨 놓았다. 한영수의 사진이 표지로 장식된 책이다. 우산을 쓴 꼬마 숙녀가 양장점의 쇼윈도를 바라본다. 당시 대학생 필독서였던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여주인공 이름을 딴 ‘아리사’ 양장점이다. 명동은 한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의 상점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 여객기 항공사 노스웨스트의 두 번째 여성 승객으로 기록된 노라노가 명동에 의상실을 열었다. 국제 양장점의 디자이너 최경자는 잡지 ‘여원’에 사진이 딸린 패션 논평 기사를 썼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 수록된 모든 사진들에 세련된 명동의 아가씨들이 포착된 것은 아니다. 아직은 양장을 입을 형편이 못 되는 서대문, 마포, 한남동, 금호동에서 만난 여인들의 등 뒤에는 아이가 업혀 있었다. 가난을 바라보는 한영수의 시선은 당대 사진가들과는 달랐다. 그는 전후의 사회적 풍경에서 혼란스러움과 고단함보다는 “사람들은 살아간다”는 지극히 평범한 풍경을 찍고자 했다. 몸뻬 바지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찌들어 보이지 않고 당찬 이유인 것 같다. 사진집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진은 그래서 달구지를 끌고 가면서도 사진가를 뜯어보듯 깐깐한 시선을 던지는 여인의 당당한 모습이다.

한영수 속초 수복탑 1956 - 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속초 수복탑 1956 - 1963 ⓒ한영수문화재단

전쟁 이후, 한국의 사진가들은 리얼리즘을 고민했다. 그림을 흉내 내던 살롱사진으로는 당대의 사회상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는 사진가들의 자각이 있었다. 종군기자로 6·25전쟁을 취재했던 임응식은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주장했고, 한영수가 몸담았던 ‘신선회(新線會)’는 이형록을 필두로 현대 사진에 대해 연구했다. 1953년 명동에서 찍은 임응식의 사진 한 장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벙거지를 쓴 청년이 한자로 적힌 ‘구직’이라는 팻말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 사진의 구도는 이상적이며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구직자 뒤에서 악수하고 있는 양복을 입은 두 남자의 모습은 낡아빠진 옷차림의 구직자와 대비를 이루며 주제를 부각시킨다.

당대의 사진 리얼리즘을 한영수는 넘어선다. 그의 사진에는 메시지가 없다. 한영수가 사진에 담은 것은 어떤 시간의 분위기와 감정, 그리고 감각들이다. 생명이 없는 주크박스를 찍어 애잔한 감성을 포착한 로버트 프랭크처럼 한영수는 보이는 풍경 너머의 무언가를 포착하기 위해 감각의 날을 세운다. 다시 임응식의 ‘구직’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현재 우리가 보는 ‘구직’ 사진은 여러 가지 형태로 가위질 된 장면이다. 원본 사진에는 구직자 뒤로, 악수하는 비즈니스맨 옆으로 말쑥한 차림의 키 큰 젊은이도 찍혀 있었다. 곁눈질로 뒤돌아보며 걷는 젊은이의 발걸음은 경쾌해 보인다. 그가 직장인인지, 댄스홀에 가는지 우리는 더 이상의 정보를 사진에서 알아낼 수는 없다. 다만 한영수처럼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젊은이의 전체적인 자세가 구직자와 대비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한영수가 구직자를 찍었으면 어땠을까? 그는 아마도 ‘구직’이라는 팻말을 어떻게든 앵글에서 몰아내고 두 사내의 시각적인 리듬을 데칼코마니처럼 사진에 담아냈을 것이다.

비가 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진다. 한영수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인 빗물에 담긴 또 하나의 세상을 거울처럼 사진에 담는다. 비 오는 고궁 돌담길을 찍은 사진은 좌우와 상하가 쌍을 이루며 관객의 시선을 주고받는다. 하얀색 코트를 입고 우산을 쓰고 가는 여성의 뒤를 쫓는 사내의 우산과 차림새는 검정이다. 왼쪽 프레임 안으로 머리를 내민 고급 승용차의 앞부분은 오른쪽 프레임에 걸쳐진 합승 택시의 뒷부분과 짝을 이룬다.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한영수 서울 1956-1963 ⓒ한영수문화재단

세부의 요소들은 사실 이질적이다. 기와를 얹은 조선 왕궁의 담장, 쇳덩이로 만든 서양의 승용차, 나뭇가지로 어지럽게 얽힌 하늘, 울퉁불퉁하게 포장된 어두운 도로. 하지만 한영수는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적절한 위치를 찾아내 셔터를 누른다. 한영수의 미적인 감각이 전쟁 이후 혼란스럽게만 보일 법한 도시의 모습에서 찬란한 광경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영수가 찍은 시대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영준 평론가는 한영수가 찍은 서울이 “우리가 모르는 도시”였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넘긴 젊은 날의 한영수는 영락없이 멋쟁이다. 그의 딸도 아버지가 무뚝뚝했지만, 사진처럼 댄디했다고 기억한다. 외출을 준비하며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정원의 꽃을 봐라. 꽃과 잎의 색에 맞춰 옷을 입으면, 균형이 깨지지 않지.” 역시나 퉁명스러운 답변이지만, 아버지의 감각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영수와 그의 딸 선정씨는 사진을 통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 딸이 묻는다. ‘어머,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예요?’ 아버지가 쏘아붙인다. ‘네 엄마도 못 알아보냐?’ 그래, 이제 우리는 한영수 덕분에 우리가 몰랐던 젊은 날의 어머니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한영수의 필름통에 갇혀 있던 여성들은 “우리가 몰랐던 여인들”이다.


Today`s HOT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해리슨 튤립 축제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불타는 해리포터 성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