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언어 전파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도구였다

문학수 선임기자

외국어 전파담

로버트 파우저 지음 |혜화1117 | 356쪽 | 2만원

[책과 삶]언어 전파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도구였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다. 미국인이 한글로 쓴 책이다. 슬며시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어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 보니 저자의 한국어 문장 구사가 매우 적확하다. 오문이나 비문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읽는 이를 감성적으로 매혹하진 않지만, 글의 전개와 문장 구사가 매끄럽고 정확하다. 이쯤 되면 저자의 약력에 호기심이 인다. 좀 특별해 보인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저자 파우저는 한마디로 ‘언어의 달인’이다. 1961년 미국 미시간주 앤아버에서 태어났는데, 고교 시절부터 외국어에 흥미를 가졌다고 한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고 졸업 후 멕시코, 스페인, 한국 등지에 머물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익혔다. 미국으로 돌아가 응용언어학으로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라틴어와 프랑스어, 북미 선주민들의 언어까지 섭렵했다고 한다. 이후 5년간 고려대 영어교육과에서 강의하며 남산 독일문화원에서 한시와 시조를 공부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대학, 가고시마대학 등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서울대에 부임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외국어 학습서가 아니다. 지난 40년간 숱한 언어를 섭렵하면서 “외국어와 함께 살아온” 저자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외국어의 전파 과정, 아울러 그 과정에서의 인류학적 맥락을 살피고 있는 ‘언어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마르크스주의 예술사학자인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를 빈번히 떠올렸다고 말한다. 알려져 있듯이 하우저는 헝가리 출신이지만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독일어로 책을 썼다. 그의 명저로 손꼽히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어느 시대든 예술을 좌우하는 힘이 ‘위대한 개인’보다 ‘시대의 변화’에 있음을 꼼꼼하게 묘파했다. 저자는 그 명저의 관점과 방식을 빌려 이 책을 썼다면서 “외국어는 개인의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전파의 과정은 시대에 의해 좌우되며 역사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1899년 잡지 ‘퍽’에 실린 정치 풍자 만화 ‘개강’. 미국인이 점령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을 희화해 식민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1899년 잡지 ‘퍽’에 실린 정치 풍자 만화 ‘개강’. 미국인이 점령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을 희화해 식민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책의 전반부는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언어(말과 문자)에 대해 언급한다. 수메르인의 쐐기문자, 이슬람의 쿠란, 중국의 한자,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등이 간략히 서술된다. 그러나 이 책의 본령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이 ‘외국어’인데, 당연하게도 그것은 ‘국어’의 반대 개념이다. ‘국어’가 있어야 마땅히 ‘외국어’가 존재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자면 “르네상스 이후 국가와 국경이 등장했고, 유럽 각국의 지배층이 국어를 결정하고 보급하기 시작”했다. 국어의 지정은 문법의 정립과 사전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스페인이 가장 빨랐다. “유럽 최초의 문법서는 1492년, 첫번째 국어사전은 1611년에 스페인에서 각각 간행”됐다. 이후 제국주의 열강이 잇달아 국어 정책을 강화했다.

언어의 전파는 불평등하다. 권력자들은 국경을 만들고 국어를 지정해 다른 이들에게 강제했다. 제국주의가 확산되면서 외국어는 다른 지역으로 건너갔다. “침략과 선교를 위해 선주민의 언어를 배웠던”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강제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책에는 수많은 사진과 그림이 함께 수록돼 있다. 그중에 ‘퍽(Puck)’이라는 잡지에 1899년 실린 풍자만화 한 컷이 눈에 띈다. ‘개강’이라는 제목이다. 성조기 문양의 옷을 입은 미국인 교사가 점령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을 희화화했다. 뒤편의 백인 아이들은 제법 진지하게 수업에 임하는 것 같은데, 앞쪽에 앉아 있는 선주민 아이들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교사는 체벌용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을 을러대고 있다. 그림의 소장처는 미국 국회도서관이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방대하다. 외국어라는 개념의 등장에서부터 17~18세기 근대국가의 형성과 식민지주의, 19세기의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쳤던 20세기와 그후의 글로벌화 및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다보니 어떤 지점들은 간략하게 약술돼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의 전파’를 역사주의적 맥락에서 더듬어 나가는 저자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다. 특히 제국주의와 관련한 부분에서 서술이 깊고 구체적이다.

결국 “권력의 획득과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자국어를 국외로 전파하거나, 그와 반대로 외국어를 배우게 만든 강력한 동기였다. 저자는 “자국어를 널리 퍼뜨리는 국가가 세계 질서를 주도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책 말미에 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인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그림 한 점을 불쑥 꺼내놓는다. 인공지능의 출현에 따른 인류의 언어적 삶, 특히 외국어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예감하면서 이렇게 책을 마무리한다. “나는 브뤼헐의 ‘바벨탑’으로 책을 끝맺으려 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던 인간들은 신의 진노를 산 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됐다. 이제 인간은 다시 같은 언어를 사용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인공지능이 과연 그 꿈을 실현시켜줄 것인가. 우리를 가로막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게 해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만능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제 도구 너머의 다른 무엇을 고민해야 할 때다.”


Today`s HOT
러시아 전승기념일 리허설 행진 친팔레스타인 시위 하는 에모리대 학생들 뉴올리언스 재즈 페스티벌 개막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