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졸렬하고 음흉한 성품까지 오롯이 복원된 ‘베토벤’

문학수 선임기자

얀 카이에르스 지음·홍은정 옮김

길 | 868쪽 | 4만5000원

[책과 삶]졸렬하고 음흉한 성품까지 오롯이 복원된 ‘베토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진다. 800쪽이 넘는 분량도 그렇거니와 거장의 57년 생애가 압도적인 까닭이다.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야 베토벤의 장례식 장면이 눈앞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저자가 프롤로그에 상세히 묘사한 덕택에, 책장을 비록 덮었어도 그날의 장면은 조금 전에 끝난 다큐 영화처럼 생생하다. 1827년 3월29일, 오스트리아 빈의 알저포어슈타트에는 2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당시 빈의 인구가 30만 명을 채 넘기지 않을 때였으니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베토벤의 관은 그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슈파르츠슈파니어 하우스의 안마당에 놓여 있었다. 입구에서 경찰들이 인파를 제지했고, 관악기용으로 편곡된 피아노 소나타 12번의 ‘장송행진곡’이 어둡고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오후 3시30분에 장례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름 같은 인파를 헤치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성직자들이 가장 선두에 섰고 여덟 명의 궁정 오페라 가수들이 관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이어서 여덟 명의 카펠마이스터들이 관 위에 드리워진 흰색 공단 리본을 붙들고 함께 걸었다. 그 뒤에는 베토벤의 친구들과 시인, 배우, 작곡가 등 당시 빈의 예술가들이 도열했다. 약 마흔 명이었다. 베토벤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 지휘자 겸 바이올리니스트 이그나츠 슈판치히,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 그리고 서른 살의 슈베르트도 무리에 섞여 있었다. 왼손에 흰 백합을 들고 오른손에는 횃불을 든 그들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장례 행렬은 밀려드는 인파를 헤치면서 500m 떨어진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삼위일체 성당까지 1시간30분이나 걸려 당도했다. 그곳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베토벤의 관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영구 마차에 실려 베링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묘지 입구에서 그릴파르처가 격정적인 억양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하라. 그를 묻는 자리에 우리가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노라.”

이렇듯이 이 책은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장례식 묘사에서부터 현실감이 넘친다. 게다가 소설적 윤색이 아니라 숱한 자료를 한데 종합한 객관적 진술인 까닭에 한 줄 한 줄 곱씹으면서 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자 미덕이다. 아울러 800여쪽의 분량이 암시하듯, 베토벤의 삶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려 한 점도 돋보인다. 부분적 자료에 함몰돼 베토벤에 대한 왜곡이 서슴없이 벌어져온 지난 시절의 오류에 대해 저자는 따끔한 경고를 보낸다. 그는 베토벤에 관한 몇몇 자료들을 맥락 없이 믿었다가는 “(베토벤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 일그러질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특히 베토벤 사후에 많은 기록들이 조작되고 위조됐음을 거론하면서 “그 일을 저지른 대표적 인물이 안톤 쉰들러”라고 단언한다. 베토벤을 왜곡시킨 ‘최대 범죄자’로 지목된 쉰들러는 말년의 거장을 수행했던 비서였다. 스스로 “베토벤의 친구”라고 떠벌렸던 그에 대해 저자는 “비열함의 표상, 어떻게든 유명 작곡가 곁에 들러붙어 있으려는 혐오스러운 아첨꾼이자 기생충”이라고 비난한다.

사후 많은 기록의 조작·위조
왜곡의 주범은 비서인 쉰들러
저자는 그를 ‘기생충’으로 표현

‘전원교향곡’처럼 5장으로 구성
덜 알려진 첫 번째 음악 스승
사랑했던 ‘불멸의 여인’ 눈길

성장에서 고뇌에 이르는 과정
반만 눈 감은 운명 순간까지
윤색 없는 객관적 서술 이어가

책은 모두 5개 장으로 이뤄졌다. 베토벤의 음악적 연대기를 다섯 시기로 구분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어린 예술가’라는 제목을 지닌 1장은 할아버지 루이스(루트비히)에서부터 베토벤의 가계(家系)를 세밀하게 톺아본다. 재미있게 읽히는 챕터는 아니지만 혈통과 집안 환경에 대한 서술이 촘촘하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의 스승이었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의 등장이다. 지금까지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책들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이 인물은 본 궁정의 오르가니스트였으며 베토벤의 첫번째 음악 스승이었다. 그는 계몽주의 비밀결사조직인 ‘일루미나티’의 회원이었으며, 어린 베토벤에게 음악 외적으로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유추된다.

2부에는 ‘성숙의 시기’라는 제목이 붙었다.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들어섰던 1792년부터다. 3부는 이른바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1802) 이후부터 1809년까지다. 4부 ‘대중과 권력’은 1809년에서 1816년까지, 5부 ‘고독의 길’은 1816년부터 마지막 해인 1827년까지를 기록했다. 수많은 사실들이 종횡으로 직조돼 있지만, 이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졸렬한 이중성과 인간적인 어리석음, 야심과 이기심, 속마음을 감추기 일쑤였던 그의 음흉한 성품까지도 샅샅이 파고들면서 ‘인간 베토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요제프 카를 슈틸러가 그린 베토벤.

요제프 카를 슈틸러가 그린 베토벤.

베토벤은 수많은 여성을 사랑했고, 그중 몇 명과는 결혼을 꿈꾸기도 했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를, 베토벤이 거의 평생에 걸쳐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불멸의 여인’으로 유력하게 지목한다. 베토벤은 요제피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뒤 여러 차례 무의미한 애정 행각을 벌였다. 친구인 이그나츠 폰 글라이헨슈타인에게 여자를 찾아봐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자네가 지금 있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이따금씩 나의 화성학에 한숨을 내쉴 수 있는 미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반드시 미인이어야 한다는 점이네. 난 아름답지 않은 여자는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네. 그게 아니면 차라리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게 낫지.”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음악은 역시 교향곡 9번 ‘합창’이다. 1824년 5월7일 빈에서 초연된 이 걸작은 베토벤이 8번 교향곡 이후 12년 만에 다시 작곡한 교향곡이었다. 빈 체제 이후 유럽 사회가 보수 반동으로 회귀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로시니의 화려하고 감각적인 음악이 빈은 물론이거니와 유럽 전체를 흥취로 들썩이게 하던 시절이었다. 청중에게 실망한, 저급한 취향에 분노한 베토벤은 더 이상 음악이 설 자리가 없다면서 ‘고독의 길’에 이미 들어서 있었다. “음악사에서 가장 과감하고 복잡하고 까다롭고 수수께끼 같은 곡으로 손꼽히는”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 클라비어’는 바로 이 시기의 베토벤을 표상하는 음악이다.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 빠져들어 “자신을 위해 작곡했던” 베토벤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교향곡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합창’이 초연되던 날, 4악장 크레셴도의 끓어오르는 듯한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연주회장은 마침내 폭발했다. “청중은 미친 듯이 환호했다. 베토벤이 큰 소리에도 둔감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어댔다. 베토벤은 무대로 다섯번이나 불려 나왔다.”

1827년 3월 29일, 베토벤의 장례식.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에 약 2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프란츠 크사버 슈퇴버가 그린 이 그림은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보관돼 있다.

1827년 3월 29일, 베토벤의 장례식. 빈 슈바르츠슈파니어 하우스 앞에 약 2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프란츠 크사버 슈퇴버가 그린 이 그림은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보관돼 있다.

1826년 12월에 베토벤을 진찰했던 의사는 “화끈거리는 얼굴, 각혈, 질식의 위험, 왼쪽 편의 찌르는 통증”을 언급하면서 중증 폐렴으로 진단했다. 다행히 폐렴은 며칠 만에 차도를 나타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12월 말이 되자 “베토벤의 얼굴빛은 누렇게 떴고, 간은 딱딱하게 굳었고, 발은 부어올랐다. 밤에는 토사곽란이 심했고, 베토벤은 간과 장의 격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그의 만성 간질환은 복수를 동반하며 급격히 나빠졌고 발에까지 부종이 생겼다”. 그동안 베토벤의 사인을 둘러싼 여러 가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간질환 쪽에 확고한 방점을 찍는다. 베토벤은 배를 째고 바늘을 삽입해 복강의 물을 제거하는 ‘복수천자’ 시술을 네번이나 받았다. 1827년 2월27일 마지막 시술에서는 “복수가 방 한복판을 향해 솟구쳐 침구가 젖었고, 바늘을 삽입할 때마다 엄청난 양의 고름이 흘러나왔다.” 베토벤은 3월24일 종부성사를 받았다. 사제가 돌아간 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뤼데스하임 포도주 두 병을 바라보면서 “유감이군, 늦었어. 너무 늦었어”라고 말했다. 책에 따르면 그것이 베토벤의 ‘마지막 말’이었다. 의식을 잃고 혼수에 빠진 그는 마지막 순간에 “눈을 크게 뜨고 오른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더니 위협하듯 높이 휘둘렀다. 그러고 나서 손은 다시 침대 위로 떨어져 내렸고 눈을 반만 감은 채” 운명했다. 3월26일 오후 5시45분이었다.

저자인 얀 카이에르스(65)는 지휘자이자 음악학자다. 한때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조수로 일했으며 ‘베토벤 아카데미’의 예술감독을 지냈다. 현재 벨기에 루뱅대학 교수다. 이번에 번역·출간된 <베토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국내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던, 베토벤 평전의 수작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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