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밀리언셀러가 됐을까

위근우 칼럼니스트

남성들 미움보다 억눌린 여성 독자들의 ‘공감 신드롬’이 더 컸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에 놓인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 이후 첫 밀리언셀러 소설이다.  김창길기자 cut@kyunghyang.com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대에 놓인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 이후 첫 밀리언셀러 소설이다. 김창길기자 cut@kyunghyang.com

배후가 있을 것이다. 그토록 수많은 남성들의 미움을 받았던 책 <82년생 김지영>이 출간 2년 만에 누적 판매 100만부를 돌파했다. 불황이던 출판계에서 한국 소설이 밀리언셀러가 된 건, 2008년 출간됐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이후 거의 10년 만이다. 믿기 어렵다. 최근 1년여 동안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한국 남성들의 반응을 살펴보라. 지난 1월 소녀시대 멤버 수영이 해당 소설을 읽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불평등과 차별을 인식하게 됐다고 밝혔을 때,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팬미팅에서 그 소설을 읽고 있노라 밝혔을 때, 배우 정유미가 <82년생 김지영>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남초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분노를 드러냈는가.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운 뒤 사진으로 인증하고, 정유미의 인스타그램에 달려가 “한심하네요, 믿고 거르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이던 그들의 거센 반응은 그때마다 굳이 기사화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런데도 100만부가 팔렸다. 일부, 아니 상당수 한국 남성들에 의하면 읽고 인증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만큼 편향적이고 악랄하고 조작된 통계로 가득한 작품을 국민 100만명이 돈을 주고 구매했다는 뜻이다. 합리적이고 건강한 시장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걸까. 당연히 의심해야 마땅한 일이다. 도대체 이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엔 어떤 음모와 배후가 있을 것인가.

그동안 당연히 여긴 불평등·차별
보편적 관점과 쉬운 글로 짚어내
소설 읽으며 모순적 상황 깨닫아

특정 배후 세력의 음모·공작 아냐
시장서 ‘보이지 않는 손’ 작용하듯
자발적 구매 힘입어 100만부 돌파

가장 쉬운 합리적인 의심은 사재기를 비롯해 출판사가 반칙성 마케팅을 했을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다. 출판사에서 사재기를 하는 건 보통 발간 초기 해당 도서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 노출 효과를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난 9월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82년생 김지영>의 출간 초기 월별 판매율은 월 2000부 안팎이었다. 그러다 2017년 들어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게,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하면서 월 판매부수가 만 단위로 뛰어올랐다. 다시 말해 출판사 불법 마케팅 가설을 밀고 나가면, 민음사에서 두 명의 명망 있는 남성 정치인을 매수해 책 이름을 노출시켰다고 판단할 수 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100만부에 이를 수 없다. 위의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지난해 8월 <SBS 스페셜> ‘82년생 김지영’ 편이 방영되면서 월 8만부 수준으로 판매부수가 급증했다. 민음사가 SBS도 매수했다. 그래도 100만부까진 멀었다. 잠시 주춤하던 판매량이 앞서 말한 아이린의 발언 이후 다시금 솟아올랐다. 민음사가 아이린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도 매수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에서 암초에 부딪친다. 아이린의 발언만으로 화제가 된 것이 아니라, 아이린 발언에 대한 남초 커뮤니티의 반발로 화제성이 높아져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민음사가 한국 남성들을 매수하는 데까지 성공한 것일까. 우리 한국 남성들은 매우 사려 깊고 균형 감각을 갖춘 이들일 것이기에(그것을 전제했기에 <82년생 김지영> 100만부 판매를 의심스럽게 보는 것이기에) 출판사 마케팅 가설은 아쉽지만 폐기해야 할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

그다음 가설. <82년생 김지영>에 공감하는 여성 페미니스트 작전 세력의 공작 혹은 사상 주입을 통해 100만부 판매에 성공했다는 것. 가령 남초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에선 한 고등학교의 독서 감상문 쓰기 대회 안내문 사진을 올리며 권장도서 목록에 <82년생 김지영>이 있는 것을 두고 “교육부 페미들 정말이지”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페미니스트 작전 세력이 한국의 교육, 행정, 법조계 등을 장악해 사람들로 하여금 <82년생 김지영>을 구매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선 교육계를 페미니스트들이 장악했다고 가정해보자. 학교 권장도서로 <82년생 김지영>을 올리고 학생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읽히거나 구매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것 때문에 보수 성향 학부모 단체에 고발당했던 최현희 교사는 이러한 공격에 개인 차원에서 대응하느라 오랜 병가를 낸 바 있다. 교육부나 교육청을 정말로 페미니스트들이 장악했다면 교사 개인이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항의에 홀로 맞설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금태섭의 책 선물을 넙죽넙죽 받았던 국회야말로 페미니스트 공작의 온상이 아닐까. 하지만 ‘미투’ 운동과 관련된 법안 절대 다수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회를 장악한 페미니스트들이 ‘미투’ 관련 법안을 제쳐두고 <82년생 김지영> 판매에만 집중했으리라 판단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사법부? 2018년 ‘미투’ 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찰 조직에서 당한 성추행에 대해 고발한 다음 날 본인 책상이 없어지는 걸 경험해야 했다. 그 역시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개인으로서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및 직권남용에 대해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중이다. 이 역시 페미니스트들이 사법부를 접수했다면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행정부일까. 현직 대통령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선언했던 만큼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 남성들이 생각하듯 편향적이고 남성 혐오적인 <82년생 김지영> 애독자 페미니스트들이 장악한 청와대라면 최소 지난 주말 서울에 8㎝가 넘는 눈이 쌓였을 때 탁현민 행정관을 자비 없이 추운 눈밭에 내보내지 않았을까.

[위근우의 리플레이]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밀리언셀러가 됐을까

과거 2012년 대선 개표 부정 음모론을 다룬 시사IN 기사에서 천관율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모론에는 철칙이 있다. 두세 명의 작당으로 가능한 음모는 실현 가능성이 제법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수십명이 가담해야 하는 음모론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배후 세력과 가정을 최소화한 설명은 어떨까. <82년생 김지영>은 어떤 한국 남성들이 말하는 것처럼 편향적이고 왜곡된 사회 인식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정말로 한국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배제를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보편적인 관점과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낸 소설이며, 그러한 소설을 보고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공감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 구매했으며, 또한 이것이 그동안 억눌렸던 한국 여성 독자들에게 하나의 신드롬으로 발현되어 2년 만에 100만부 판매에 이르렀노라고. 출판사나 페미니스트 같은 특정 배후 세력의 음모와 공작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냥 시장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된 수요와 공급 곡선이 지금과 같은 숫자로 이어졌노라고. 흔히 음모론의 문제를 다룰 때 인용되는 오컴의 면도날 법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그에 대한 불필요한 가정이 가장 적은 설명이 진실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렇다면 로지틱스곡선이나 K값 같은 드라마틱한 가정이 없더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100만명이 공감할 만큼 잘 쓴 소설이 팔릴 만해서 팔렸다는 설명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아, 물론 이 설명에도 하나의 가정은 추가되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악마화하고 평가절하하며 그와 관련한 모든 소식에 분노하던 남성들의 목소리가, 사실 그 크기에 비해 사회적으로도 시장에서도 그다지 영향력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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