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균형에 집착, 거짓 논거·폭력적 혐오 못 거른 KBS ‘엄경철의 심야토론’

위근우| 칼럼니스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이 토론회 자체가 허용이 안됩니다.” 지난 10월27일 방영된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이하 <심야토론>)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에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패널로 출연한 조영길 변호사는 해당 법안이 동성애에 대한 반대 의견을 침묵시키는 “동성애 독재주의”라며 이렇게 말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도 직접적이고 반복적인 괴롭힘과 차별 행위를 하지 않으면 사법처리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영길의 말은 거짓말이다. 또한 “동성애 독재”의 근거로 제시된 외국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설교했다가 잡혀갔다거나 동성애 케이크 제작을 거부한 이가 벌금 폭탄을 맞았다는 사례는 이미 타 언론을 통해 극우 개신교발 ‘가짜뉴스’로 밝혀진 바 있다. 토론의 기본 태도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실로 확인된 경험 자료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이 토론에서 누구의 의견이 더 옳은지 따지는 것조차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조영길의 위 발언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의 말대로 이 토론은 허용되어선 안됐다. 이번 <심야토론>에 그 같은 패널이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토론이라는 행위에 전제되는 근본 가정들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지난달 27일 방영된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이날 방송에는 차별금지법 찬성 패널로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반대 패널로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과 조영길 변호사가 출연했다.  방송 갈무리

지난달 27일 방영된 KBS 1TV <엄경철의 심야토론>.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을 주제로 한 이날 방송에는 차별금지법 찬성 패널로 진중권 동양대 교수와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반대 패널로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과 조영길 변호사가 출연했다. 방송 갈무리

토론이란 자유롭고 평등한 위치에 선 대화 주체들끼리 다른 외부적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논거의 제시를 통해 주장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TV 토론회가 양측 패널의 합의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토론 행위란 각 발화 주체의 지위를 차별적이지 않게 인정하고 오직 더 나은 논거에 대한 구속력을 가정해야만 작동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합리적 대화를 통한 합의를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정하는 순간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전제다. 법철학자 로베르트 알렉시는 <법적 논증 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예 상태와 같은 권리 부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성 규칙과 조화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언제든지 모든 규범을 상대로 논증대화를 통한 심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이를 배제하는 규범은 허용될 수 없다. 이러한 규범은 논증대화적으로 불가능한 규범이다.” 성소수자 반대자는 결과적으로 성소수자를 권리 부재의 상태로 규정한다. 그들은 성소수자가 성소수자임을 공적 차원에서 밝히지 말라는 요구를 하는 중이다. 이것은 내용적으로도 문제지만, 또한 알렉시의 말대로 논증적 대화 형식에서는 불가능한 규범이다. 즉 토론의 근본 가정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조건이다.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논의
반대 패널 측, 거짓 논거 제시
성소수자에 반대 의견 낼 자유
침해받는다는 억지 주장까지

균형에 대한 집착이 부른 왜곡
부적절한 의견 소개로 흘러

단순한 ‘쪽수’ 싸움 막으려면
공적 논의 위한 필터링 필요
불합리한 주장 차별적 배제도
합리적 토론의 전제 조건

물론 차별금지법 반대 패널들은 교묘하게, 오히려 차별금지법이 자신들을 권리 부재의 상태로 만든다고, 반대 의견을 낼 토론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말장난이다. 가해자들이 가장 역겨울 땐, 그들이 피해자의 자리까지 선점하려 할 때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차별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도 차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합리한 주장을 차별적으로 배제하는 것 역시 합리적 토론의 전제 조건이다. 충분한 논거에 기초하지 않고 특정 종교의 교리나 개인의 불쾌함만을 근거로 타인의 기본권을 제한하자는 따위의 주장을 조기에 탈락시키지 못하고 한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들어줘야 한다면, 토론은 합리적 문제해결 행위가 아닌 ‘아무말 대잔치’가 될 뿐이다. 이것은 이번 방송에서의 패널 섭외와 논쟁 구도의 문제지만, 또한 그것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당일 방송 중 시청자 유료 문자 참여에선 “일반 국민입니다. 퀴어축제 보고 싶지 않은 자유는 누가 보장해주는지요” 같은 내용이 전파를 탔다. 일반 국민으로서의 본인과 성소수자를 분리하고, 존재할 자유와 자기가 안 보면 그만인 축제를 안 볼 자유를 같은 무게로 놓는다는 점에서 차별적 언사다. 성소수자 입장에선 폭력적 언사라 해도 될 것이다. 이건 그 시청자만의 잘못일까. 100원만 내면 어떠한 논거 없이도 자신의 혐오와 차별적 태도를 심지어 지상파에 전시할 수 있다. 책임질 필요도 없다. 이 역시 토론의 최소 규범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심야토론>은 그걸 허용해준 셈이다. 다시 말해 해당 방송의 수많은 부분은, 심지어 토론 주제와 상관없이 방송에 포함된 몇몇 장치들마저 토론 프로그램으로서의 존재이유를 부정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TV 토론의 문제는 논쟁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가짜 논리>의 저자 줄리언 바지니는 해당 책의 ‘팽팽한 균형은 왜곡을 부른다’는 챕터에서 “나는 토론의 ‘균형’이라는 게 결국 모두에게 의견을 개진할 똑같은 기회를 부여하고, 각 진영에서 제일 선명한 입장을 소개하는 수준일 때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비판적으로 술회한다. 바지니의 통찰처럼 양극단의 주장을 소개하는 게 균형이라는 착각은, 어떤 한쪽이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들을 가치가 있는 것 같은 착시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학교에서 진화론만 가르쳐야 되는가’라는 토론 주제에서 창조론자나 지적설계론자에게 한 자리를 줘도 될까?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 문제에 대한 토론에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내란 폭동이라고 믿는 논객을 섭외해도 될까? 야당의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고 해서 홍준표를 섭외할 필요는 없다. 팽팽한 균형에 대한 집착은 토론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의견을 시청자에게 소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지난 7월 ‘남혐 VS 여혐 - 위험한 이분법’이란 제목으로 진행된 MBC <100분 토론>이 딱 이런 함정에 빠진 사례다. 한국 내의 젠더 갈등(이 표현부터 마치 평등한 차원에서의 싸움이 이뤄진다는 착시를 내포하지만)을 다룬다고 해도 페미니즘의 기본 전제, 즉 누구도 생득적 이유로 차별받아선 안된다는 당위 명제, 여성은 그 생득적 이유로 다양한 차별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명제 정도는 공유한 패널끼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의 싸움은 서로 지양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0분 토론>은 EBS <까칠남녀>에서 데이트에 대한 경제적 보답을 바라는 여성의 행동이 “매춘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해 물의를 빚고, 심지어 팟캐스트에 출연해 여성 패널과 제작진에 대해 뒷담화를 했던 방송인 정영진을 패널로 섭외했다. 아무런 전문성도 없지만 그저 여성혐오에 복무한 남성이라는 이유로 한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논의의 왜곡을 부를 뿐이다.

위근우

위근우

지상파에 TV 토론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익을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보수 개신교도들이 성소수자를 혐오할 권리를 주장하고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처럼, 다수결은 언제든 저급한 파워 게임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단순한 ‘쪽수’ 싸움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절차적 합리성이 보장된 토론을 통해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내고 시민들에게 더 나은 주장을 채택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것이 공론장의 역할이며, 늦은 밤 졸음을 참고 우리가 TV 토론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다. 여기엔 공적 논의를 위한 필터링이 필요하다. 하지만 합리적 논의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적절한 논의 구도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그 필터는 얼마든지 가짜 논의로 오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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