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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재의 ‘워라밸’ 발언과 명사 토크쇼로서 <손석희의 질문들>의 한계
앞서 한 모든 대화는 에피타이저일뿐, 마지막 답변만이 메인디쉬로 회자되리란 걸 직감했다. 지난 3월 11일 방송된 MBC <손석희의 질문들>(이하 <질문들>) 말미, 게스트로 나온 안성재 셰프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의 가치관 변화 속에서 요식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방청객 질문에 대해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지가 모든 것의 답은 아니지만 전문가를 양성하고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더 많은 시간을 미치광이처럼 투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답했다. 또한 논란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하며 “지금의 ‘워라밸’을 지키면 미래의 ‘워라밸’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언밸런스한 삶은 미래에 더 많은 선택지를 가져올 수 있다”고 부연했다. 그의 말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고, 자신의 답변을 보편적 삶의 궤적보단 미슐랭 가이드 3스타 파인다이닝 셰프라는 특정한 경지와 범주에 한정하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한국은 교육을 가... -
<퇴마록> 애니메이션, 27년이나 걸려 비로소 풀린 원작 팬의 한
*원작 소설을 포함한 <퇴마록>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있으니, 해당 내용에 익숙하신 분들은 잊지 말고 건강 검진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신이 부당한 경험을 당했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구리시 부원씨네마에서 혼자 영화 <퇴마록>을 본 1998년, 고3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내가 극장에서 돈과 시간을 허비해 본 것은 요즘 표현으로 ‘허위 매물’이었다. 원작과는 거리가 멀고 오컬트도 아니고 판타지 액션은 더더욱 아닌 그저 어두침침한 배경의 신파 멜로를 만들기 위해 굳이 <퇴마록>이란 이름을 가져오고 굳이 대배우 안성기와 당시 가장 뜨거운 배우였던 신현준(<은행나무 침대> 황장군 캐릭터의 인기는 주연인 한석규를 능가할 정도였다)을 섭외해 굳이 액션과 상관없는 무의미한 CG 장면들을 선심 쓰듯 기워 붙인 그 모든 일련의 과정과 결과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영화의 재미를 위해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를 각색했다기보다는... -
<김현정의 뉴스쇼>를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들이여, 이준석 좀 작작 부릅시다
최악의 경우 정언유착, 높은 확률로 상부상조, 최소한 방송이 호구. 최근 허은아 개혁신당 전 대표가 페이스북을 통해 제기한 이준석 의원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이하 <뉴스쇼>)와의 언론 유착 의혹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허 전 대표는 이준석이 아마도 당직자들과 모인 듯한 단톡방을 캡쳐해 공개했는데, 해당 캡쳐에서 이준석은 <뉴스쇼> 게스트인 국민의힘 조정훈 의원을 공격할 여론조사 자료를 제작진에게 제공하라 지시하고, 실제로 해당 방송에선 당일 새벽에 올라왔던 뉴스토마토의 여론조사 자료를 사용해 조 의원에게 질문했다. 우연일까. 허 전 대표의 의혹 제기에 대해 <뉴스쇼> 제작진은 바로 반박문을 통해 이준석 측에 자료를 제공받은 게 아니라 “생방송 도중에 이 여론조사 내용이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질문을 추가”했으며 “어떤 특정인이나 단체의 지시 또는 강압에 따라 방송한 일이 없음”을 강조했다. 대체 당일 새벽 6시에 올... -
<중증외상센터>, 백마 탄 초인 백강혁은 어떻게 퇴행적 복음을 전파하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증외상센터>의 장르는 메디컬도, 히어로물도 아니다. 종교물이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그러했듯, 주인공인 천재 외과의사 백강혁(주지훈)은 수술실에서 이적을 행하며 또 다른 주인공 양재원(추영우)를 외상외과 펠로우로 끌어들이고, 가끔 혼란에 빠진 재원의 믿음을 책망한다. 베드로야, 내가 물 위를 걸어야 나를 믿겠느냐. 열두 제자가 모이듯, 박경원(정재광), 한유림(윤경호) 등 하나둘 추종자가 모이며 교세는 늘어가고, 당연히 그 반동으로 병원 내부의 박해가 시작된다. 하지만 괜찮다. 강혁은 언론 플레이로 자신의 교세를 병원 밖으로 확장하며 재원에게 말한다. “내가 외상센터의 성역, 성자, 성녀(정확히 말해 성녀는 천장미(하영) 간호사)” 삼위일체를 이루노라고. 그래서일까.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언론 리뷰도 분석보다는 차라리 간증에 가깝다. “1화만 보려고 틀었는데, 정신 차리니 끝나버렸다.”(마이데일리) “계속 다음 화를 클릭하게 된다... -
1.19 법원 폭동 사태, 우리 시대 파시즘은 온라인 여성혐오를 먹고 자랐다
어째서 기시감은 대부분 불쾌한 과거를 소환할까. 아마도 선의는 참신한 상상력으로 갱신되지만 악의는 지리멸렬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리라.“최근 신남성연대는 이러한 공백을 파고들어 댓글란을 점유한다. … 가짜뉴스를 통한 선동이자… 믿음을 적극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다. … 암묵적 공공선에 대한 약속을 파기하는 효과, 그리고 비슷한 …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를 낸다. … 지난 2020년 네이버 댓글 개편에 대한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미디어 정책 리포트’에선 ‘대다수 이용자들은 전체 댓글을 10개 이내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순위에 들기 위한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최상위 댓글 노출을 고정이 아닌 변동형으로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젠 조작의 가능성 문제가 아니라 대놓고 조작이 이뤄지는 걸 모두가 목도하는 중이다.”윗글은 최근 윤석열의 내란 시도 이후 대표적 반여성주의 단체인 신남성연대가 텔레그램을 통해 특정 기사들에 대해 내란 옹호 댓글 공작을 펼치는 자칭 ‘여론 정화’에 대... -
12월 KBS 시청자위원회 회의록, 이것은 영원히 남을 비웃음거리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만화 <왓치맨>에 인용되며 더 유명해진 로마의 풍자시 구절이다. 최근 몇몇 언론과 진보당 논평을 통해 공론화된 지난해 12월 KBS 시청자위원회 회의록을 보며 이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회의에서 노현숙(건국대 글로컬캠퍼스 교수) 위원은 윤석열의 계엄 선포부터 탄핵까지의 보도와 관련해 “‘내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객관적 검토가 필요한데 그에 대한 부분이 미흡했던 점이 있던 것 같다. 한쪽에선 내란죄로 몰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법적인 해석들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양쪽의 의견을 전달해주면 좋겠다”며 비슷한 맥락에서 “좌파 집회(탄핵 찬성 집회)는 성실하게 보도하는 반면 우파 집회(탄핵 반대 집회)는 보도를 안 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견을 남겼다. 이상기(온라인 매체 The AsiaN 발행인) 위원은 뜬금없이 10초 발언 기회를 요청하며 “지금 우리 군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으니 ‘군심’을 잡... -
<모뉴먼트 밸리 3>, 12월 3일 그날 이후에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폐허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지난 12월 10일 출시된 모바일 게임 <모뉴먼트 밸리 3>를 하며 든 생각이다. 전작들이 그러했듯 파스텔 톤의 색감과 공간감을 극대화한 몽롱한 사운드, 마우리스 코르넬리스 에셔의 석판화 ‘오르내리기’, ‘전망대’처럼 착시를 이용해 물리 법칙을 무너뜨리는 환상적 퍼즐은 기대했던 만큼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특히 파스텔 평면화의 질감을 거의 그대로 살리고 노골적으로 채색하는 소리까지 덧입힌 ‘오리가타 아뜰리에’ 스테이지는 시리즈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화사한 세계를 구현해낸다. 이토록 인상적인 시청각적 경험이 전작들과 분리되는 건, 바다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의 빛이 소멸하면서부터다. 한정적이고 파편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과 다른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이 전작보다 훨씬 많이 부각된 이번 작품에서, 빛의 파수꾼 견습생 누어는 빛의 소멸이라는 재해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상실과 실패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등대의 빛이 사라... -
특별 편성 <PD수첩>, 언론의 탄핵 요구가 중립성 의무를 해친다고 볼 수 없는 이유
급히 TV를 틀어 MBC로 채널을 돌렸다. <스포츠 매거진>에서 보던 박소영 아나운서가 당황스러움을 억누르며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반복해서 재생하며 방금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틀림없이 당직을 서다가 황망히 뉴스 특보를 진행하는 상황이었을 게다. 12월 3일, 밤 11시에 벌어진 일이다. 계엄 해제를 위해 국회의원들이 경찰의 통제를 뚫고 국회에 모이고, 어떤 의미로도 와선 안 될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하려 하는 긴박한 와중에 MBC에선 <PD수첩>으로 익숙한 오승훈 아나운서가, JTBC에선 역시 전 <뉴스룸> 메인 앵커로 익숙한 오대영 기자가 당직자와 바통을 터치하고 특보 2부를 진행했다. 그 사이에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항목이 포함된 계엄사령부 1호 포고령이 선포됐다. 새벽 1시 즈음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190명 전원 찬성으로 계엄 해제 요구안이 통과되고, 각 정당 대표들... -
‘폐경’이 중립적인 의학용어라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다르게 말한다
최근 케이블 채널 MBC ON에서 재방송 중인 고전 드라마 MBC <사랑이 뭐길래>에선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결혼을 앞둔 사윗감이자 의사인 대발(최민수)에게 예비 장모인 심애(윤여정)가 최근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문의하자 “그거 갱년기 증세”라 거침없이 말하고, 이에 심애는 불쾌해한다. 갱년기가 여성만의 증세이자 폐경과 동의어로 여겨지던 시절, 여성에 대한 대발의 무례함과 갱년기를 여성 생애주기의 흠으로 여기는 당대 분위기를 보여주는 짧지만 강렬한 에피소드다. 얼마 전 한 보드게임 수입 및 번역 과정에서 벌어진 ‘폐경’과 ‘완경’이란 표현에 대한 논란을 보며 그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11월 4일 코리아보드게임즈에서 번역 출시한 보드게임 <메디컬 미스터리: 뉴욕 응급실>의 한 환자 카드에는 “완경기가 지난 53세 폴리네시아계 여성”이란 문구가 적혀있다. 영어 menopause를 ‘폐경’이 아닌 ‘완경’으로 번역한 것에 대해 보드게임 커뮤니티 등 몇몇 ... -
“이거 ‘국정농단’ 아닌가요?” 국립국어원 질문이 드러내는 윤석열 유니버스의 기묘한 세계
최근 한국에서 대법원이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보다 더 첨예하고 난감한 질문 앞에 놓인 기관은 국립국어원처럼 보인다. 이미 언론을 통해 기사화된 것처럼,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아내 김건희 여사에게 제기된 의문에 대해 “(부인이) 남들한테 좀 욕 안 얻어먹고 원만하게 잘하기를 바라는 그런 일들을 국정농단이라 그런다면 그건 국어사전을 좀 다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한 것에 대해 한 네티즌은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온라인 가나다’ 코너에 정말 김건희 여사의 행동을 국정농단으로 칭할 수 없는 것인지 문의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기기에 질문은 진지하고 집요했다. 질문자는 표준대사전을 근거로 ‘국정’은 ‘나라의 정치’,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을 의미하는 만큼, 그 합성어인 ‘국정농단’으로 헌법상 어떤 지위도 가지지 않은 영부인이 선거와 국정에 개입한 행위를 명명할 수 있지 않은지 국립국어원의 공식 입장을 요청했다. 개인적으로는 넷플릭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