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불안·공포 야기하는 인종차별정책에 반기

장영은

나딘 고디머

나딘 고디머는 내적갈등에 시달리면서도 무기력한 백인들의 방황과 인간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흑인들의 고통을 섬세한 심리적 묘사로 핍진하게 나타냈다. 고디머는 199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딘 고디머는 내적갈등에 시달리면서도 무기력한 백인들의 방황과 인간으로서 권리를 박탈당한 흑인들의 고통을 섬세한 심리적 묘사로 핍진하게 나타냈다. 고디머는 199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당시 내 나이 열한 살, 모든 것이 이상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신발을 사러 가면 얼마든지 신발을 신어 볼 수 있었고 집으로 가져올 수도 있었죠. ‘나는 가져갈 수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안 되지?’ 나는 열다섯 살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첫 번째 이야기를 썼습니다. 내가 내 양심을 자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나딘 고디머는 19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근처 작은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리투아니아 출신인 아버지는 소련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아프리카로 이주했다. 탄광촌 스프링스에서 보석상으로 자리를 잡은 아버지와 영국 출신으로 백인 중산층 문화에 자부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똑똑한 딸을 성공회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보냈다. 나딘 고디머는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온통 책 생각뿐이었다. 혼자서 집 안에 있는 책들을 다 읽어 치우고, 도서관을 부지런히 다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딘 고디머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내가 다니던 수도원 학교는 모두 백인 아이들이었고 토요일 오후에 극장을 가도 모두 백인뿐이었습니다. 나는 지방 도서관에 다녔는데 흑인들은 들어갈 수 없었어요.” 만약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학교를 다니며 책을 마음껏 읽고 작가의 꿈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이 왜 자신과 같은 보통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제도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자각하자 분노에 휩싸였다. 반드시 작가가 되어 이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겠다고 결심한다.

나딘 고디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교양학부 1년을 다닌 후 독학자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품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욕망”을 정규교육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쓰고 싶은 글이 넘쳐났다. 나딘 고디머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제도가 지배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 있는 이상 문학도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먼저 내린 채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들의 삶의 형체를 이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정치와 정치적인 책략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 만들어 낸 산물입니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저도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좋든 싫든 가르치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쓰든지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고 결국 작가는 사회적인 상황의 형상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수의 백인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인구의 80퍼센트가 훨씬 넘는 흑인들은 직업 선택은 물론이고 거주와 이동의 자유 및 토지 소유권을 박탈당한 채 백인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어야 했다. 흑인과 백인 간의 연애와 결혼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딘 고디머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흑인 차별 목격하며 성장…‘반드시 작가가 되어 파고들겠다’ 결심
1949년 단편소설 ‘얼굴을 맞대고’ 출간 뒤 철폐운동에 본격 동참
자전적 작품 ‘거짓의 날들’서 백인의 특권·위선적 태도 다루기도

1949년, 나딘 고디머는 인종차별 제도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불안과 공포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문제의식을 담은 단편소설 ‘얼굴을 맞대고’를 발표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제도 철폐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많은 독자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 문제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다. 나딘 고디머는 1953년에 자전적 성장 소설인 <거짓의 날들>을 출간한다. 남아프리카 광산 마을의 백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 헬렌 쇼는 대학에 진학한 후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자신이 지금껏 백인으로서 누려 온 특권을 인지하는 한편 자기 방어를 위해 취했던 위선적 태도를 통렬하게 반성한다. 나딘 고디머는 백인의 위치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할 수 있는 자신의 사회적 입지와 특권을 변명하지 않았다. 실제로 백인 작가는 흑인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 수도 없고 설득력 있는 작품을 쓸 수도 없다는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와 같은 분열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 또한 아파르트헤이트의 폐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제 책들이 이 세상에서의 제 존재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주니까요.” <거짓의 날들>을 쓰면서 나딘 고디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무너뜨릴 방법을 고심하는 것 못지않게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목하게 된다. 작가로서의 역량이 수직 상승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나딘을 만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나딘 고디머의 작품에 큰 찬사를 보냈다. 사진은 2006년 1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넬슨 만델라 재단에서 고디머(왼쪽)로부터 국제앰네스티 ‘양심 대사상’을 받고 있는 만델라의 모습.  AP연합뉴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나딘을 만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나딘 고디머의 작품에 큰 찬사를 보냈다. 사진은 2006년 1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넬슨 만델라 재단에서 고디머(왼쪽)로부터 국제앰네스티 ‘양심 대사상’을 받고 있는 만델라의 모습. AP연합뉴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나딘 고디머는 네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명예로운 손님>(1971), <보호주의자>(1974), <버거의 딸>(1979), <줄라이의 사람들>(1981)에서 나딘 고디머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무기력한 백인들의 방황과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흑인들의 고통을 섬세한 심리적 묘사로 핍진하게 나타냈다. 흑인 독자들의 반응은 여전히 둘로 나뉘었다. 감옥에서 <버거의 딸>을 읽고 큰 감동을 받은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나는 나딘을 만나야 합니다”라는 말로 나딘 고디머의 작품에 큰 찬사를 보냈다. 반면, 흑인들의 생활과 감정이 나딘 고디머의 작품에 일관되게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 비평가들도 상당수였다. “백인 여성 작가의 공허한 문학 활동”이라는 공격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따라다녔다.

작품 발표 때마다 찬사와 함께 “백인의 공허한 문학” 공격받아
남아공 당국의 판매금지도 당해…1991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

<버거의 딸>을 비롯한 나딘 고디머의 작품들이 연이어 판매금지 조치를 당하고, 그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당원으로서 투쟁 지지 의사를 밝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면 나딘 고디머의 작품 생명은 끝나게 될 것이라는 악담을 유포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그러한 예측은 보기 좋게 뒤집혔다.

1991년, 나딘 고디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가 장엄한 서사 구조를 갖춘 소설로 인류의 위대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에 심사위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종식되었고,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나딘 고디머의 일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는 매일같이 글을 썼다. “아침에 적어도 네 시간 동안 전화도 안 받고 문도 안 엽니다. 그렇게 완벽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집니다.” 오히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써야 할 이야기들이 더욱 많아졌다. 아파르트헤이트 제도가 사라지자 누적되었던 사회적 갈등이 폭발했다.

나딘 고디머는 섣부른 패배주의를 경계했다. 2006년에 나딘 고디머는 집으로 침입한 세 명의 괴한들에게 감금된 채 돈을 강탈당했지만, 그 사건으로 사회가 퇴보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검열을 받고, 도청을 당하고, 보안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던 과거와 비교했을 때 세상은 분명 좋아졌을뿐더러, 그는 여전히 인간이 노력하는 한 조금씩이나마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철폐했고, 이를 축하하자마자 서로의 민낯을 바라봐야만 했죠. … 잘못도 많았지만 남아공의 과거를 극복하려는 수없이 많은 위대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숙취로 인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딘 고디머는 빈곤, 범죄, 에이즈, 난민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동시대 최고의 소설가로 꼽는 동료들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작가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이야기” 한 편씩을 부탁했다. 인세 전액은 에이즈 예방운동 단체에 기부할 계획이었다. 나딘 고디머의 친구들이기도 한 수전 손택, 크리스타 볼프, 마거릿 애트우드, 살만 루슈디, 잉고 슐체, 치누아 아체베, 귄터 그라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오에 겐자부로, 주제 사라마구 등 총 20명의 대가들이 뜻을 함께했다. 2004년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를 펴낸 이후로도 그의 대외 활동은 계속되었다. 나딘 고디머는 2007년 맨부커상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기념비적일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읽는 만큼 썼다. 2007년, 83세의 나딘 고디머는 <베토벤의 16분의 1은 흑인>을 발표했고, 3년 후 <인생>을 공개했다. 나딘 고디머는 2014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글 쓰는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시리즈 끝>

■필자 장영은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25)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불안·공포 야기하는 인종차별정책에 반기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다. 이태영, 천경자, 박완서 등 20세기 초 한국 여성 지식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과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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