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이 된 군주’ 정조, 그는 성리학 신봉자였다

배문규 기자

정조의 말과 행동을 역사적 맥락으로 해석한 ‘정조학총서’

‘학문이 된 군주’ 정조, 그는 성리학 신봉자였다

문체반정·부정학론…
정치적 난관 봉착 땐
글쓰기로 타개하기도

“당대의 사료가 보여주는 정조는 실학의 시대를 열거나 근대의 계몽군주를 자처하기보다 철저하게 ‘부정학(扶正學·정학을 도와 사학을 예방)’을 추구했습니다. 정조는 진실한 성리학의 신도였습니다.”

조선시대 성군으로는 세종이 첫손에 꼽히지만, 여러모로 주목받는 왕은 단연 정조다. 학자군주인 정조를 ‘철인(哲人)’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다방면의 재능으로 시대 변화를 통찰한 무결점 면모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의고 왕이 되어서도 암살 기도에 시달린 비운의 이미지도 겹친다.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편지 ‘정조어찰첩’이 발견되면서 조정을 막후에서 이끌어나간 마키아벨리스트라는 평가도 나왔다. 무엇보다 근대 국가의 여명을 준비한 계몽군주로 정조를 바라본다.

하지만 <정조학총서>에선 기왕의 고정된 이미지를 버릴 것을 제안한다.

“18C는 조선의 르네상스”
성리학 대체하는 실학
근대주의 입장일 수도

책의 대표저자인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지난 7일 전화인터뷰에서 “흔히 영·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로 떠올리는데, 다르게 보면 정조의 개혁이 많았던 이유가 그만큼 고칠게 많았던 것”이라며 “건국 400년에 누적된 폐습을 갱신하지 않으면 나라가 유지되기 어렵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까지 들어오는 상황에서 정조는 성리학 군주로서 경장을 했다”고 말했다.

<정조학총서>는 조선시대사 연구자 4인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으로 6년의 연구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다. 정조를 다룬 총서로는 처음이다. 네 명의 저자가 사료를 읽으며 깨달은 것은 “뜻밖에도 실학의 시대를 연 계몽군주이기보다는 성리학의 신봉자였다”는 것이다.

“소국의 사대는 외교”
진력했던 대청 사대
정세 판단에 따른 것

이들은 각각 문학(文), 군사(武), 교화(禮), 법치(法)를 주제로 설정하고, 정조 시대의 역사적 조건 가운데 정학(正學), 즉 성리학을 중심에 놓고 글을 썼다. 백승호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구현’을 향한 정조의 문학론을, 허태구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기초로 한 외교국방론을, 김지영은 ‘수신제가에서 치국평천하’에 이르는 예교론을, 김호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형정론’을 화두로 정조와 그의 시대를 탐색했다.

이들이 새롭게 정조에 다가간 방법은 “오직 정조의 ‘말과 행동’을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당대의 관점과 시야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정조학’이라는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

‘학문이 된 군주’ 정조, 그는 성리학 신봉자였다

주자학적 예교론 따라
화합하는 백성 길러
제도와 실천을 정비

“정조에 대한 대중문화 속 이미지나 이전 연구들은 그의 극적인 인생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역사학이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사료’를 통해 당시 맥락에서 인물이나 정치를 살피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200년 전 정조를 종종 현대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에서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르네상스’여야 했고, 거기에는 19세기 ‘좌절된’ 근대화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

“조선이 성리학 때문에 망했다는 부정적 시선이 강합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체로 실학을 설정하는데요. 근대주의적 입장일 수 있다고 봅니다. 조선이 성리학 사회라는 게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천착한 후 공과를 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조 본인은 당시를 ‘폐단으로 곪아 터지기 직전’의 말세로 파악했다고 한다. 그가 한 개혁의 중심은 성리학적 정치였다. 군주에게 문학은 경국(經國)과 관련되어 있었고, 정치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글쓰기로 타개하기도 했다. 문체반정과 부정학론 같은 것들이다. 주자학적 예교론에 입각해 조선의 제도와 실천을 정비하고, 화합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백성을 길러내려 했다. 정조의 상무 정책 활동은 철저히 유교적 전통 내에서 행한 것이었으며, 냉정한 국제정세 판단에 따라 대청 사대에 진력했다.

“사대는 약자의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아닙니다. 소국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 지역 평화를 유지할지 고민하는 외교정책입니다. 그걸 굴종으로 치부하면 오늘날 세계에선 미국만 자존심 있는 나라가 되어 버립니다. 정조가 직접적 교훈을 주진 않지만 현재 국제정세에 빗대어 보면 어떻게 평화 공존을 위한 외교정책을 추진할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국내적으로도 개인과 공동체가 충돌하는 오늘날 상황은 18세기에도 동일하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체를 보존하는 공공선을 모색했는지 정조의 정치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총서에 경제 분야를 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책이 다양한 논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정조학총서>의 법치를 쓴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정조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나라를 갱신하려 했지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서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금지시킨 것은 아니었다”며 “천주교 박해가 그의 사후 본격화됐던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호 교수, 문치를 쓴 백승호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무치를 쓴 허태구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예치를 쓴 김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정조학총서>의 법치를 쓴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정조는 성리학적 입장에서 나라를 갱신하려 했지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서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금지시킨 것은 아니었다”며 “천주교 박해가 그의 사후 본격화됐던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호 교수, 문치를 쓴 백승호 한남대 국어국문창작학과 교수, 무치를 쓴 허태구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예치를 쓴 김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성리학 군주라는 것이 뜬금없지 않냐는 지적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저희는 지나치게 현재의 열망으로 과거를 환기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소비하는 것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현재적 입장으로 과거를 재단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다보면 역사교과서 문제 같은 일들이 발생하잖아요. 현재의 열망으로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숙명적이지만, 그럼에도 좀 더 당시의 맥락을 통해 역사를 설명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사람이 정조라는 코끼리 다리를 하나씩 잡아보자고 했는데 쉽진 않았습니다(웃음).”

다음 연구로는 ‘정조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19세기로 가면 나라가 쇠하는데 그렇다면 정조가 만들어 놓은 토대 때문인가, 아니면 만들려던 토대가 안 돼서인가 따져보는 것이죠. 19세기 정조 정치의 후과를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또 한 번의 무모한 계획이 세워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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