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복권 당첨·인간의 탄생·공룡 멸종…모든 사건은 우연이다

김종목 기자

우연이 만든 세계
션 B 캐럴 지음·장호연 옮김|코쿤북스|272쪽|1만6500원

[책과 삶]복권 당첨·인간의 탄생·공룡 멸종…모든 사건은 우연이다

2001년 미국 영화 제작자 세스 맥팔레인은 술자리 때문에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LA행 ‘아메리칸 항공 11편’을 놓쳤다. 배우 마크 월버그도 이 비행기를 예약했다가 일정 변경으로 타지 않았다.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부딪힌 비행기다. 비행기 탑승권 예약자 2명이 9·11테러 11년 뒤 만든 영화가 <19곰 테드>다. “더 큰 목적이 있었을까? 그러니까 대마초를 피우고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곰 인형을 보며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게 하려고? 아니면 5억달러 넘는 수입으로 영화업계 배를 채워주려고?”

진화생물학자인 저자는 맥팔레인이 공항에 늦게 도착한 건 우발적 사건이지 ‘삶의 풍요’ 같은 목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 예를 든다.

인간은 무작위적 우연과 아주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행운이 찾아왔을 때, ‘훌륭한 인격이나 행동에 따른 보상’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여긴다. 심장발작으로 아내가 죽은 다음날 산 복권이 65만달러에 당첨된 맥대니얼이라는 사람은 “아내가 아이들을 계속 잘 보살펴달라고 이 돈을 내게 보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건 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무작위로 정해진 독립적 사건들인데도 의미 있는 패턴이 있다고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전염병과 가뭄 같은 격변을 두고도 인과응보나 신의 심판 같은 데서 원인을 찾는 사람이 많다. 재난과 비극들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법한 자연의 무작위적 사건들로 촉발”된 것들이다. 저자는 “(간발의 차이일 때가 많은)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것이 우연”이라고 말한다.

책은 과학 이야기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동물에서도 상당한 폭의 구조 변화는 많고 사소하고 우리가 우발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아무튼 이로운 변이들이 축적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는 찰스 다윈의 이론 안팎을 살핀다. 다윈의 이런 생각도 조물주나 지성이 행하는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다윈이 비글호에 탑승한 것 자체가 여러 우연이 겹친 것이었다. 저자는 “순전한 우연, 절대적으로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우연, 이것이 진화라고 하는 엄청난 체계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다”는 자크 모노의 이론을 쉽게 풀어낸다.

지구의 승자와 패자는 우연히 판가름났다. 6600만년 전 공룡, 익룡, 해룡, 암모나이트의 멸종을 가져온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 자체가 가능성이 희박한 우연이다. 다른 소행성 충돌은 지난 5억년 동안 지구나 달에 없었다고 한다. 소행성이 지금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부딪히지 않았다면 공룡들은 지금 지구를 활보하고 있을지 모른다. 소행성이 30분 일찍 왔으면 대서양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멸종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연은 ‘드물거나 예측 불가한 사건 혹은 변수나 작용하는 힘들이 워낙 많아서 무작위로 일어난다고 해도 무방한 사건’이다. 소행성 충돌, 지각판 이동과 충돌, 세계 기후의 격렬한 요동을 포함한다. 저자는 우연(偶然·chance)과 불의(不意·contingency)를 구분한다. 우연은 사건 자체에 적용되는 말이고, 불의는 결과를 소급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즉 불의는 우연이 일으킨 여파다. 배우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지만, 그것은 아이의 존재에 불의의 사건이 된다. 소행성이 유카탄에 충돌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진화의 측면에서 포유류, 영장류, 인간에겐 불의의 사건이었다.

인간 존재는 어떤가. 네 가지 무작위적 기제, 즉 정자와 난자에 들어가는 염색체 결정, 유전자 일부의 맞바꿈, 새로운 돌연변이,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유일무이한 우연’의 확률을 따져보라. 난자와 수정되는 정자는 1억여개 중 하나뿐이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존재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진실”이다. 이건 인간 이외 다른 생명체에게 적용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저자는 “경이롭고 아름다운 모든 생명체들의 바탕에 무작위적 우연이 존재한다”며 인간 중심 세계관에 균열을 내려고 한다.

책 각장은 <19곰 테드>에 얽힌 이야기 같은 여러 일화로 시작한다. 마지막에 맥팔레인과 모노, 소설가 알베르 카뮈,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 빌 마허를 등장시킨 가상의 ‘우연에 관한 대화’도 실었다. 저자가 하려는 말은 저베이스 입에서 나온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아요. 운이 좋았을 뿐, 삶은 휴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난 145억년 동안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운이 좋아서 80년, 90년을 살면 다시는 존재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삶을 최대한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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