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70명이 쓴 각양각색 초단편…읽는 덴 짧아도 곱씹는 덴 길다

이종산 작가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작가 70명이 쓴 각양각색 초단편…읽는 덴 짧아도 곱씹는 덴 길다

미니 미스터리
엘러리 퀸 엮음·김석희 옮김
섬앤섬 | 388쪽 | 1만6000원

<미니 미스터리>는 재밌는 것을 읽고 싶지만 오래 집중할 체력이 없을 때 펼치기 좋은 책이다. 원래는 70명의 작가가 쓴 71편의 초단편이 실린 책이지만, 국내에 번역된 판본은 그중에서 51편을 추렸다. 오래전에 나왔다가 절판되었는데 지난해에 다시 출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목록에는 아는 이름들이 꽤 있다. 잭 런던, 필립 맥도널드, 로버트 네이선, 아서 밀러, 안톤 체호프, 찰스 디킨스, 기 드 모파상, 마크 트웨인, 볼테르 등등. 이렇게 유명한 작가들의 짧은 장르 소설을 읽는 재미도 있지만,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잘 쓰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는 기쁨도 크다.

장르적 요소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도 있는 한편, 장르에 익숙지 않은 독자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실렸다. 특히 아서 밀러의 ‘어느 노인의 죽음’이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가장 여운이 깊은 소설이었다.

바깥에 찬바람이 부는 새벽 2시, 식당에 경찰관이 들어와 식사를 하다가 커피메이커에 몸을 기대고 온기를 느끼고 있던 조리사에게 자신이 좀 특이한 경험을 했다고 운을 뗀다. 경찰관은 서른다섯 살쯤 된 젊은이인데, 조리사는 가끔 오는 손님인 그가 음식을 ‘인간적으로’ 먹는다는 점 때문에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 이게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 경찰관이 경험했다는 특이한 일은 한 노인에 대한 것이다.

10년 전, 신입이었던 경찰관은 어떤 노인이 자살을 기도한 현장에 출동하여 그를 경찰서로 데려온다. 상처가 깊지 않아 병원에 데려갈 필요는 없었다. 경찰관의 상사는 그가 노인을 유치장에 넣은 것을 보고 나무란다. 경찰서로 데려와 조서를 쓸 필요가 없었던 일을 그가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사는 경찰관에게 노인이 다시 같은 시도를 해서 사고가 나면 그건 그의 책임이 될 것이며 승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라 한 뒤, 그런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면 노인을 정신병원에 가둬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경찰관은 노인이 자신은 너무 가난하고 외로운 상황이라 절망해서 죽으려고 했던 것뿐이고 정신적 문제는 없다며 병원에 보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자 마음이 약해진다. 결국 그는 노인을 풀어주며 다시 같은 시도를 하면 자신이 곤란해진다고 사정을 설명한다. 노인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경찰서를 떠났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오늘, 그는 다시 그 노인의 집으로 출동했다. 노인은 숨을 거두었다. 노인의 사인은 노쇠에 의한 자연사였다. 경찰관은 너무나도 초라한 노인의 방을 보고 노인이 그동안 비참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노인이 죽기를 바랐던 10년 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점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이 단편은 경찰관이 “너무나 불가사의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하고 조리사에게 인사를 한 후 가게에서 나오는 쓸쓸한 풍경으로 끝이 난다.

젊은 경찰관은 노인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노인이 같은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경찰관에게는 경력이 달린 중요한 일이었지만, 노인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젊은 경찰관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혼자 견뎠다. 경찰관에게 이것은 ‘너무나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단편이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이 이야기가 인생의 이상한 부분, 이해되지 않는 미스터리를 섬뜩하리만치 정확하게 짚어낸 소설 같다. 타인들은 내게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티끌보다도 더 사소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지만, 살다 보면 아주 가끔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존재가 구석에 외떨어진 것처럼 살고 있던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묻게 된다. 세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타인이란 무엇인가? ‘어느 노인의 죽음’을 보면 개인은 고독한 존재이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세상의 한 부분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곤 하지만, 어떤 순간에 세상은 그 착각을 깨트린다. 그렇다고 세상과 이어져 있다고 단단히 믿기에는 개인은 타인과 연결되는 데 너무 자주 실패하며 너무 큰 외로움을 느낀다.

다 읽는 데 5분밖에 걸리지 않는 소설이 복잡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세상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 초단편의 매력 같다. <미니 미스터리>에 이런 가슴이 묵직해지는 소설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수십 명의 작가가 쓴 다양한 소설이 실려 있어서 장르의 온갖 매력을 맛볼 수 있다. 재밌는 소설을 잘 쓰는 작가 콤비이기도 하고 장르 소설 잡지를 오랫동안 만든 엘러리 퀸이 엮은 작품집이라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도 실패할 확률이 낮다. 혹여나 어떤 소설이 재미없었다 해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한 편당 분량이 워낙 짧아서 시간이 아까울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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