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말 내뱉는 얼어붙은 마음들…사르르 녹여줄 사랑이 필요한 우리

이종산 작가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차가운 말 내뱉는 얼어붙은 마음들…사르르 녹여줄 사랑이 필요한 우리

눈의 여왕
안데르센 글· P J 린치 그림,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 48쪽 | 1만2000원

입동이 지나자마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날씨가 춥다는 것을 말하는 표현 중에 재밌는 것 하나가 ‘동장군’이다. 추운 바람이 살을 엘 때 사람들은 “동장군이 오셨나 봐” 하고 말한다. 겨울을 의인화한 것이 참 재밌다. 우리나라에 겨울 장군이 있다면, 유럽에는 눈의 여왕이 있다. 요즘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눈의 여왕>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져서 책을 펼쳤다.

다시 읽으면서 내가 몇 가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우선, 케이와 게르다를 남매로 잘못 알고 있었다. 동화 중에 <파랑새>나 <헨젤과 그레텔> 같은 남매의 모험담이 많기도 하고, 어릴 때 남동생과 동화책을 읽으면서 우리 남매 이야기로 이입해서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케이와 게르다는 남매가 아니라 이웃에 사는 친구 사이다. 두 사람은 두 집 사이에 있는 홈통을 건너 서로의 집을 오고 가며 지내는데, 겨울이 오면 창이 얼어붙어서 그럴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창이 얼어붙으면, 사람들은 난로에 달군 동전으로 꽁꽁 언 창을 녹였다. 케이와 게르다는 뜨거운 동전으로 녹인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 서로 바라보았다.” 이 대목을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이 이야기 속에서 두 아이의 감정이나 관계는 ‘썸’이나 연인, 우정 등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의 원형이 드러난다. 한겨울에 동전으로 녹인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케이를 눈의 여왕이 데려가 버렸으니 게르다는 그를 찾으러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기억하는 것과 다른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어릴 때 읽었던 그림책 축약본에서는 눈의 여왕이 갑자기 나타나 케이를 데려간 것처럼 나오는데, 이번에 다시 책을 읽으니 심장이 차가워져 심술궂은 장난꾸러기가 된 케이가 스스로 자신의 썰매를 눈의 여왕의 썰매에 묶는다. 그렇다면 눈의 여왕이 케이를 일방적으로 데려갔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지 않은가? 물론 정상적인 어른이라면 아이를 발견한 즉시 집으로 되돌려 보냈어야겠지만.

또, 나는 케이의 눈에 들어간 얼음 조각이 눈의 여왕의 성에서 마을로 날려 보낸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눈의 여왕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얼음 조각의 정체는 악마의 거울이 부서진 파편이다. 악마가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려고 아름다운 것을 추해 보이게 하고 추한 것은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 거울을 만들었는데, 그게 실수로 깨져버려 수억 조각으로 세상에 흩어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눈의 여왕>의 오프닝이다.

이렇게 여러 오해가 있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가장 새삼스러웠던 것은 <눈의 여왕>이 게르다의 모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책에서 케이가 등장하는 분량은 전체의 4분의 1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게르다가 케이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채워져 있다. 작은 마을에서 케이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전부였던 게르다는 케이를 찾으러 가는 모험을 하면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간다.

게르다의 모험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모르는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이다. 게르다는 모험을 하면서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매번 길에서 만난 동물이나 사람들이 베푼 친절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모험 중에 만난 도둑의 딸은 처음에는 무서워 보이지만, 실은 인정 많고 귀여운 소녀다. 게르다를 멀리까지 태우고 가준 순록은 그와 헤어질 때 아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핀란드의 마녀 할머니는 어떤 술수도 부리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게르다를 도와준다. 따뜻한 사랑만이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을 녹일 수 있다는 <눈의 여왕>의 메시지는 결말에서만이 아니라 게르다의 모험 이야기 전체에 흩뿌려져 있다.

<눈의 여왕>을 읽던 며칠 사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안데르센의 또 다른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잠깐 화제에 오른 것을 봤다. 곽재식 작가의 트위터에 올라온 내용이었는데, <성냥팔이 소녀>는 당시 열악한 환경의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담아낸 것이고, 그 이후에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해서 영국 노동자 권리에 전환점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2017년 이후 SPC 4개 계열사의 산재 피해자가 581명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무심히 “일하다 보면 다칠 수도 있는 거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꽁꽁 얼어버린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안데르센은 <눈의 여왕>을 쓸 때 어린이들에게 사랑은 인간의 차갑게 굳은 마음을 녹인다는 것과 더불어 당신이 자라나는 동안 세상은 험난하겠지만 위기의 순간에 반드시 누군가가 나타나당신을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랑과 친절함은 한 사람만이 아니라 한 국가를 성장시킬 수도 있다고 믿는다. 위기에 빠진 타인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사랑과 친절의 마음으로 함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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