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건진 문단

이번 주 경향신문 ‘책과 삶’ 지면은 ‘올해의 책’입니다.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 김종목 기자. 촬영 협조 교보문고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책. 김종목 기자. 촬영 협조 교보문고

이번 주엔 ‘올해의 책’을 정리하느라 따로 읽은 책이 없습니다. ‘책건문’은 제가 서평 일로 읽은 책들 중에서 ‘올해의 문단(문장)’을 골라봤습니다. 책건문에 소개한 책들은 제외했습니다. 기사 링크도 전합니다. 더 자세히 읽고 싶은 분들은 보시면 될 듯합니다.

반전 메시지를 담은 소설과 시가 여럿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직접적으로 다룬 건 하종오의 40번째 시집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도서출판b)입니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전시 강간을 운 없는 개인이 겪은
안타까운 작은 일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
(…)
러시아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전쟁은 추상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개개인이 겪는 전쟁 피해를 규명하는 작업도 구체적인
사건이다.
정치외교적 담론으로 전쟁을 중계해선 안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알려야 한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 중

이 시는 2002년 개혁당 내 성폭력 사건 처리를 두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는 유시민 발언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소수자와 피해자에게 중요한 일이 ‘국익’ ‘선거’ ‘대의’ ‘큰일’의 뒷전에 놓이는 일은 요즘도 반복되죠. 여성, 난민, 이주노동자, 장애인, LGBTQ 등 소수자 문제는 지금도 진보와 인권을 내세운 세력 안에서도 사소한 일로 치부되곤 합니다.문재인 정권은 약속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나중’ 일로 미뤘는데, 결국 없던 일이 됐습니다.

억압적 국가기구가 이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을까

<헌신자>(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김희용 옮김|민음사)는 2016년 퓰리처상을 받은 <동조자> 후속작입니다. <동조자>는 박찬욱이 HBO 드라마로 만들면서 화제가 됐죠.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CIA 비밀 요원이자 베트남 공산당의 고정간첩인 ‘나’가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스릴러 외피를 두른 책 내용은 정치소설이자 역사, 문화 비평입니다.

“샤를 드골의 이름을 따서 이 공항의 이름을 지은 건 적절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를 나치에게서 해방시키면서도 우리 베트남인들을 계속 노예로 부린 영웅이었으니까요.”

“뇌, 내장, 달팽이 따위를 먹는 미식가다운 특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인들은 모든 종류의 동물의 모든 부위를 먹겠다는 영웅적인 결심을 한 명예 아시아인이었으니까요.”


자본주의 비판도 인상적입니다.

마약상은 개인을 표적으로 삼는 하찮은 범죄자에 불과했고,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대개 자신이 하는 거래의 불법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본가는 몇백만은 아니더라도 몇천 명을 표적으로 삼고 자신의 약탈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합법적인 범죄자입니다.

지적 과시로 느낄 정도로 현란한 글에서 밑줄 그을 만한 압축적 문장들이 이어집니다.

“인간 숭배의 위험 요소란, 인간은 결국 자신의 결함 있는 인간성을 드러내고, 그러면 그 시점에 신자는 그 추락한 우상을 기필코 죽이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항상 개인적인 거예요. 그래서 치명적이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 무명인들이 마침내 단결하여, 들고일어나서,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이고, 자신에게 목소리와 힘이 있다고 주장할 때, 가진 것이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가 이 모든 사람을 막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억압적 국가기구가 이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 죽일 수도 있을까?”


보트피플에 관한 다음 문단은 어떤가요.

나는 보트피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카고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청교도들이 보트피플이 아닌 한은 말입니다. 그 난민들에게는 운 좋게도, 곧 불행해질 원주민들이 보기엔 악취가 나고, 죽을 만큼 굶주리고, 면도도 하지 않고, 이가 득실거리는 그들 무리를 기록할 카메라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에 반해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는 ‘뤼마니테’에 영원히 기록되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도무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보트피플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낭만주의 화가에게 뽑혀, 침몰하는 배의 뱃머리에 대담하게 서서 고귀한 그리스 영웅처럼 무시무시한 비바람에 맞서는 모습의 유화로 루브르에 고이 소장되어 관광객들의 찬탄을 받고 미술사가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보트피플은 희생자들, 신문에 사진으로 영원히 박제된 동정의 대상들이었습니다.

한 여성의 입을 빌어 젠더 문제도 제기하죠.

너희들은 처음에는 정치, 정부, 대학에서 여자들을 배제하더니, 그 다음에는 여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냐고 묻지. 우리가 어떤 여자의 말을 인용해야 할까…마르크스와 세제르와 파농을 읽고,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지만, 마지막으로 읽은 여자 작가는 대체 누구니? ‘성차별’이나 ‘가부장제’나 ‘남근’ 같은 단어를 마지막으로 입 밖에 낸 건 대체 언제야? 아, 대체 왜 내가 굳이 물어보는 거지? 네 자술서가 에크리튀르 페미닌(여성적 글쓰기)라면 모를까. 안 그래? 맙소사, 엘렌 식수라면 널 찢어발길 거야.

난 전쟁이 정말 싫어

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안정효 옮김 | 민음사)은 1955년 처음 나왔습니다. 타임 선정 ‘100대 영어 소설’, BBC 선정 ‘우리 세상을 만들어낸 100대 소설’ 등에 뽑혔죠. 한국에선 1991년과 1995년 두 차례 번역 출간됐다가 절판됐습니다. 18년 만에 다시 나왔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세계 곳곳의 테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선 눈에 들어오는 건 전쟁, 전투, 테러에 관한 묘사와 서술입니다. 소설은 민간인 희생을 여러 차례 다룹니다.

한 여자가 찢긴 아기 시신의 남은 토막을 무릎에 얹어 놓고 땅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그나마 예의를 갖추려는 듯 농부의 밀짚모자로 어린 시신을 가렸다. 여자는 꼼짝하지 않은 채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베트민 영향 아래 놓인 북부 팟지엠에서 작전을 수행하면서 무고한 민간인도 사살합니다.

아이의 시체 밑으로 한입 물어뜯었지만 미처 먹지 못한 빵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전쟁이 정말 싫어.’

한 프랑스군 장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직업 군인이어서 정치가들이 그만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까지 계속 싸워야만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애초에 양측이 만나서 맺었을 법한 수준의 평화 협정에 동의할 테고, 그러면 지금의 이 모든 세월은 헛짓거리가 되겠죠.

글쓰기와 작가에 관한 말도 떠오릅니다. 제이디 스미스는 서문에서 그린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작가란 글을 쓰는 노동자를 의미했다. 그들(그린 등)이 생각하는 작가란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며 세상 이야기를 하고, 비평가가 아니라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쓰고, 잘난 체를 하지 않고 꾸밈이 없으며, 날마다 신문 기자만큼 많은 어휘를 써내는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 대해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활용

소설 <사소한 일>(아다니아 쉬블리 지음·전승희 옮김 | 강)은 팔레스타인 점령 내내 이어진 이스라엘의 폭력과 억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이스라엘 점령군이 1949년 8월 사막에서 발견한 소녀 한 명을 집단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을 다룹니다. 소설은 살해 25년 뒤인 1974년 태어난 ‘나’가 집단 강간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립니다.

‘필화’가 된 소설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는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자유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만, 주최 측이 하마스가 이스라엘 민간인을 기습 공격한 직후 시상식을 여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취소했죠. 한국 작가 175명이 “시상식 취소를 취소하라”며 항의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옮긴이 전승희(보스턴칼리지 한국학 교수)는 해설에서 소설 속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억압 문제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사소하게만 연결된 듯한 두 삽화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반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겪어온 점령과 폭력과 억압의 현실과 그 근원적 문제점을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1948년의 알 나크바, 즉 대재앙이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심화되어왔고, 그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양성의 평화로운 공존과 상호작용이 아니라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체제의 산물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아다니아 쉬블리는) 팔레스타인의 현 상황은 민족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 억압과 폭력의 현 체제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윤리적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차이를 억압의 구실로 활용하는 기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기제에 저항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아니 이미 얼마간 가해자다.”


죽어서 안전해져야만 사랑받는 존재

유대인 문제에 관한 서평도 썼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데어라 혼 지음|서제인 옮김|엘리)는 ‘죽은 유대인’에게서 희망과 사랑만을 찾으려는 대중과 문화예술의 문제를 비판합니다.

유대인은 “살아 있을 때는 혐오의 대상이 되다가 오직 죽어서 안전해져야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죠. 대표적인 게 안네 프랑크죠. 저자는 ‘죽은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나 애착, 집착이 인간 존엄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가장 상냥하고 시민 정신이 투철해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을 때조차” 말이죠.

저자는 홀로코스트가 사랑의 중요성을 납득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환상이라고 비판하죠.

홀로코스트는 사랑의 부족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일은 전 세계 모든 사회가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즉 책임을 대변하는--이 세계에 ‘명령받음’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한 이래 언제나 그것을 대변해온--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오징어 게임과 백래시

다음은 페미니즘과 젠더에 관한 서평들입니다.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 흥행 뒤 국내외 학술 영역의 담론 분석 대상이 됐죠. <오징어 게임>과 젠더 문제를 엮은 논문도 있습니다. 권명아(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는 <몸들의 유니버스 너머>(산지니)에 실은 논문 ‘<오징어 게임> 어펙트, 마주침의 윤리와 연결성의 에톨로지’에서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순위 변화 의미를 살핍니다. 그는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흥행 등 “그 시대 많은 사람의 판단, 취향, 감각의 집적물”인 지배적 장르의 교체가 “페미니즘에서 반페미니즘으로 기울어지는 초국가적 백래시”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오징어 게임> 이전 도메스틱 누아르가 대세였죠.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 관점에서 가정 범죄를 다룬 범죄 장르 소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명아는 넷플릭스의 도메스틱 누아르를 “가스라이팅에 대한 비판과 가스라이팅 서사를 여성 주체화 서사로 전유한 문화적 흐름”이자 “미투 시대의 문화적 상관물”이라고 해석합니다.

“(도메스틱 누아르는) 불안정하지만 결국 통제된 환경에 저항해서 승리하는 여성과 이성적이고 안정된 겉모습 뒤로 폭력과 잔인함을 감춘 믿을 수 없는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
“(반면) <오징어 게임>은 취약하고 불안정한 중년의 남성이 믿을 수 없는 여자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통제된 환경에 저항해 나름 승리를 쟁취하는 서사”
“‘믿을 수 없는 여자들’과 ‘억울한 남자’라는 정체성 편성을 통해서 생산되는 이른바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 한국 사회의 젠더 정치와 긴밀한 연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미녀는 ‘아이를 알리바이로 삼는 엄마’, ‘성추행이라고 거짓말하는 여자’, ‘자신의 몸을 술책으로 삼는 여자’, ‘성을 거래하는 여자’로 그려지죠.. 권명아는 “믿을 만한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중년 남성 가부장 신화를 강화하면서 여성은 신뢰 자본을 획득하는 플레이어에서조차 배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다시 고정희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다시 고정희>(소명출판)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여성-민중’을 역사적 주체로 상징화하려고 했던 고정희와 2015년 이후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내세우려는 ‘강남역 세대’ 여성주의자들을 이어내려는 기획입니다.

고정희는 지금 봐도 대단한 시인입니다. <여성해방출사표>의 화자 중 한 명인 황진이는 ‘삼종지도’를 ‘남자 집권 보안법’이라 비판하죠.

“아직도 조선의 남녀 문사 머릿속엔/ 우리가 그토록 지긋지긋해 하던/ 가부장제 허세가 은연중 남아있어요/ 내가 서녀 출신이라 기녀가 되었다느니/ 혹은 나를 사모하다 죽은 총각 때문에 기녀가 되었다느니”(‘황진이가 이옥봉에게-여름편지’ 중).

고정희는 일찌감치 5·18민주화운동의 주체를 지식인, 학생에서 노동자, 여성, 민중으로 자리매김한 시인이기도 합니다.

“호남전기 생산부 우리 딸들/ 넝마주이 우리 아들들/ 황금동 흥등가 우리 딸들/ 전기용접공 우리 아들들/ 술집 접대부 우리 딸들/ 구두닦이 우리 아들들/ 야간학교 다니는 우리 딸들/ 무의탁소년원 우리 아들들/ 방직공장 우리 딸들/ 주저없이 망설임없이/ 총받이가 되고 칼받이가 된 저들/ 진압봉에 머리 맞아 쓰러진 저들”(‘저 무덤위에 푸른 잔디’ 중)

‘밥과 자본주의’ 연작은 ‘급진적 자본주의 비판’ 시입니다.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새 시대 주기도문’ 중)
“나절을 일한 자나 하루 종일 일한 자나 똑같이 최대생계비를 지불함이 하늘나라 은총이다 선포하셨건만, 반평생을 뼈빠지게 일한 자나 일년을 혼빠지게 일한 자나 똑같이 임금을 체불당한 채 밀린 품삯 받으러 일본으로 미국으로 다국적기업 뒤꽁무니 쫓아간 우리 딸들이 임금 대신 똥물을 뒤집어쓰고 울부짖을 때 당신의 말씀은 침묵했습니다”(‘행방불명 되신 하느님께 보내는 출소장’ 중)

지방에 사는 비정규직 여성이었다면?

젠더 문제는 돌봄과도 이어집니다. 주로 여성들이 돌봄 노동을 떠맡는데, <아내는 서바이버>(나가타 도요타카 지음·서라미 옮김 | 다다서재)는 섭식장애, 해리성장애, 알코올성 인지저하증을 앓는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정신장애인과 함께 사는 가족의 절망을 절실히 느낍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겪죠. 다중채무 지옥과 불법 사채에 관한 기사에도 눈길이 갔죠.

“끔찍한 환경에 처한 저들도 나처럼 감정이 있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빈곤 문제에 관해서도 고민합니다. 빈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가타는 취재로 알게 된 사회운동가 유아사 마코토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실태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자기 책임론을 허용하며, 그런 까닭에 더욱더 사회에서는 빈곤을 보기 어려워지고, 그 때문에 자기 책임론이 더욱 유발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저자는 아사히 신문 기자입니다. 아내를 간병할 때 여러 동료가 도왔죠.. 일을 대신 처리해주고, 간병을 위해 부서도 조정해줬고요. 나가타는 ‘만약 여성이었다면’이란 생각도 합니다.

‘도시에 사는 정규직 남성’이라는 제한된 시각에서 본 광경일 뿐입니다. 만약 ‘지방에 사는 비정규직 여성’이 정신장애 남성을 돌보는 형태였다면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을 것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의료기관과 복지서비스가 더 적고, 쓸 수 있는 돈과 시간은 더 제한적이며, 환자가 가하는 폭력은 훨씬 무거웠을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에는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부의 서사에서 여성 역할은 아내, 비서, 피해자뿐인가

미국 자본주의 문제는 크죠. 에르난 디아스의 <트러스트>(문학동네)는 월 스트리트 자본가들의 탐욕을 다룹니다.

사족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문학은 지난해 처음 맡았습니다. 1년 2개월가량 하면서 읽은 시, 소설이 평생 읽은 그것보다 많았습니다. 무지하다 보니, 책 고를 때 부담이 컸죠. <트러스트>는 제 서평이 나가고 몇 달 뒤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이제 좀 ‘안목’이 생겼나 하고 자기 위안을 했던 책입니다(물론, 이 서평과 퓰리처는 아무 관계가 없죠).

소설은 ‘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대사가 나와요. 한국 자본가들에게 해당하는 말인 듯합니다.

우리 존재는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소설은 ‘여성’들이 주요 인물입니다. 아이다를 수동적 비서로 그리다가 점점 진실을 좇는 주체적 작가로 그립니다. 밀드레드를 내조의 아내에서 투자의 귀재로 전복합니다. 디아스는 지난해 4월 말 미국 공영방송 NPR과 인터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든 소설이든 미국의 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여성이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지워진 걸 확인했다. 부의 서사에 나오는 여성 역할은 아내, 비서, 피해자 이 세 가지로 고정된다. 이 전형적인 세 지위를 받아들인 뒤 전복하는 데 관심을 뒀다.

무차별 도살은 경제성장에서 시작

자본주의는 기후위기 문제와도 직결되죠.

소설 <마이그레이션>(샬롯 맥커너히 지음·윤도일 옮김 | 도서출판 산) 배경은 야생동물들이 대부분 멸종한 가까운 미래입니다. “동물들이 죽어 가고 있다. 머지않아 우리는 이곳에 홀로 남겨질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환경보호론자이자 채식주의자인 프래니가 대양을 횡단하는 철새를 따라가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 철새는 북극제비갈매기입니다.

기후위기 경고 메시지를 담은 소설입니다. 프래니의 남편이자 아일랜드 국립대 교수인 나일의 입을 빌려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도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인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경제성장이라고 결정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멸종 위기는 그들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대가입니다.

나일이 프래니에게 가장 자주 한 말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역병과도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일은 죽음 이후를 두고 “오직 부패와 소멸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죠. 죽음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삶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저 재생의 순환일 뿐이라면서, 우리는 여느 동물과 마찬가지로 불가해할 정도로 짧은 생을 사는데, 그것이 인간이라고 해서 어떠한 생명체의 삶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자만심과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우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삶을 제공해 주는 이 행성을 함께 공유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인류 최고의 아이디어는 책 덕분

문학, 읽기와 쓰기, 책에 관한 책 서평도 여러 개 썼습니다.

<갈대 속의 영원>(이레네 바예호 지음·이경민 옮김|반비)는 책에 관한 역사책이자 에세이입니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노예제하의 미국 남부에선 노예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게 불법이었습니다. 대농장 소유주들은 철자를 아는 노예를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책엔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의 한 단락이 나옵니다.

노예의 주인들(독재자, 폭군, 절대 군주, 기타 불법적인 권력의 소유자)은 문자의 힘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읽기가 몇 개의 단어만으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자는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책을 마무리합니다. 책은 해로운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수단이란 점은 분명하죠. 여성 억압, 노예제 유지, 장애인 차별의 이데올로기가 책에 담기기도 했습니다. 발터 베냐민은 “문화에 대한 기록은 동시에 모두 야만에 대한 기록”이라고도 했죠.

저자는 그럼에도 “인류가 창안한 최고의 아이디어가 생존할 수 있었던 건 책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책이 없었다면 우리는 시민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결정한 소수의 무모한 그리스인을 잊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대담한 실험을 ‘민주주의’라 한다. “환자의 상황을 고려하라. 경우에 따라서는 무료로 치료하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에게도 전폭적인 도움을 주라.”라며 가난한 자와 노예를 동등하게 치료할 것을 약속한 히포크라테스적 의사들도 잊었을 것이다. 최초의 대학을 설립하고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자와 무지한 자의 차이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잊었을 것이다. 막대기와 낙타를 사용하여 겨우 50마일의 오차 범위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도 잊었을 것이다. 거대한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인정한 로마인의 법전도 잊었을 것이다. 또한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노예도,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없다.”라는 평등주의적 연설을 한 기독교 그리스인 사도 바울로도 잊었을 것이다. 이 선례들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권, 민주주의, 과학에 대한 신뢰, 건강, 의무 교육,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약자를 위한 사회적 관심과 같은 생각이 피어나게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한 언어와 지식을 잊어버렸듯이, 이 모든 발견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독일어로 작품활동을 한 영국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답했다. “한 시대가 이전 시대와 단절되고 세기가 탯줄을 끊어버린다면 우리는 미래가 없는 우화밖에 만들지 못할 것이다. 질식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책은 스페인에서 ‘인문학 수호를 위한 시민참여상’을 받았습니다.

오스카상 닮아가는 부커상

<문학의 역사>(존 서덜랜드 지음·강경이 옮김 | 소소의책)는 문학 작품에 얽힌 역사와 개념을 쉽게 풀어낸 책입니다. ‘위험한 책, 문학과 검열’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권력자들은 어디에서나,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늘 책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책은 당연히 불온하고, 국가에 잠재적 위협이 된다고 여겼다. 플라톤이 이상적 국가에서 시인을 모두 내쫓아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의 다음 선언도 인용하죠.

사람을 죽이듯 좋은 책도 죽일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신의 형상인 이성적 피조물을 죽이는 것이지만, 좋은 책을 죽이는 자는 이성 자체를 죽이는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익숙한 부커상에 관한 평도 인상적입니다. 저자 존 서덜랜드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근대 영문학 로드 노스클리프 명예교수입니다. 1999년과 2005년 부커상 심사위원을 맡았죠. 문학상 제도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상 제도는 승자와 패자라는 흥미진진한 요소를 문학에 들여왔다. 문학을 일종의 스포츠 경기장이나 검투경기장처럼 만들었다.…시상식이 해가 지날수록 오스카상 시상식을 닮아간다. 레드카펫만 없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도 조만간에 생길지 모르겠다.

부커상을 두고도 거침없습니다.

부커상은 얼마 전부터 한 헤지펀드의 후원으로 상금을 수여해오고 있다. 그래서 이름을 맨부커상(책이 나오고 다시 부커로 바뀌었다)으로 다시 지었다. 앵글로색슨다운 실용주의 덕택에 이 상의 관리자들은 자본주의와 거래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부커상을 받은 존 버거가 수상 연설에서 ‘식민지를 착취하는’ 후원자들을 비난하고, 상금의 절반을 흑인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블랙팬서 운동에 기부한 일도 적었습니다.

고인류는 한민족이 아니라 인류였다

<인류의 진화>(이상희 지음 | 동아시아)는 부제는 ‘한 권으로 읽는 최신 고인류학 다이제스트’입니다.방송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이상희(미국 캘리포니아대 리버사이드 캠퍼스 교수·사진)는 최신 논문과 정보를 이야기로 녹여 쉬운 입말로 풀어냅니다. 책 마지막에 ‘검은모루 고인류 유적’ ‘력포 사람’ 등 한반도의 고인류 문제를 2장에 걸쳐 다루죠. 고인류를 두고 ‘한민족’ ‘한핏줄’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를 경계합니다. 지금 시대를 사는 개개인은 저마다 2명의 부모가 있는데, 3대째 걸러 올라가면 조부모는 4명, 4대째 증조부모는 8명이죠. 20대째 조상은 104만8576명이 됩니다. 200대 조상까지만 올라가도 60자리의 수가 된다. 이상희는 “1000년을 넘으면 더는 조상의 의미가 없게 된다”고 말하죠.

이상희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등을 인용하며 “애초에 한민족이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허황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현대 인류의 서식지는 지구 전역이고, 인류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라는 개념은 그 한순간에만 존재할 뿐 언제든지 허물어지고 구성원이 바뀔 수 있는 취약한 개념입니다.”
“누가 한민족에 속하는지는 생물학으로 연결된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학적 조상 중 특정한 사람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은 조상에서 제외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된다”
“한반도의 고인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단일 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이라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경이 없던 시절, 바다가 땅이었던 시절에 지금의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고인류는 한민족이 아니라 인류였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했다

민족 문제를 본격 다룬 건 김종준(청주교육대 사회교육과 교수)의 <한국 근현대의 파시즘적 역사인식>(소명출판)입니다. 문제작입니다. 여러 출판사가 출판을 거부했습니다. 논쟁적인 문제의식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책은 주류 역사학계와 유사 역사학계, 뉴라이트를 두루 비판합니다. ‘민족주의의 외형을 띤 파시즘적인 역사 인식’이 주 비판 대상입니다.

김종준은 ‘파시즘적 운영 원리’를 “한마디로 개성과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당연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충성의 대상이 전통 시대 가족, 문중, 마을, 왕조에서 근대 이후 민족, 국가, 계급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보죠. 김종준은 파시즘적 사고방식이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껍데기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분석합니다.

파시즘적 역사인식과 포퓰리즘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금 한국 사회로 확장합니다.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데 있어 포퓰리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포퓰리스트는 ‘진짜 국민’을 대표한다면서 ‘비국민’을 배제하는데, 그 편 가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혈통, 인종 등에 의존하곤 한다. ‘민족’의 이름으로 ‘반민족자’와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는 이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정리하고 보니, 민음사 책이 몇권 보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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