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해 주세요!

이번 주 ‘책건문’은 <민중의 시대>(빨간소금)입니다. 이번 주 ‘책과 삶’ 머리기사는 다른 기자가 씁니다. 12월 문화면에 실었던 기사를 다시 정리했습니다.

‘민중사’에 밀려난 ‘대중가요’ ‘에로방화’ ‘SF 소설·만화’

<민중의 시대>는 1980년대 민중과 민주화운동을 다른 여느 책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1980년대 학술 연구는 “주로 격변과 해방의 서사에 집중”했죠. 박선영(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젠더학 부교수)은 “민주화의 주체로서 민중지식인에 주목함으로써 노동자, 여성, 일반 시민, 비주류 예술가처럼 함께 동시대를 만든 집단을 소홀히 다루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학술 영역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1980년대 문화를 조명합니다. ‘에로 방화’와 ‘동성애 소재 영화’, ‘SF 소설·만화’ ‘대중음악’ 같은 1980년대 ‘민중사’를 쓸 때 분석 대상에서 밀려난 것들이죠. 이에 관한 글 위주로 소개합니다.

먼저 대중음악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김창남(성공회대 미디어콘텐츠융합자율학부 및 문화대학원 교수)이 ‘대중음악사의 맥락에서 본 민중가요’를 썼습니다.

김창남은 대중음악은 민중가요와 ‘상대적 대립물’이자 별개 영역으로 존재한 점을 지적합니다. 대중문화는 지배문화로, 민중문화는 저항문화로 여겨졌지요. 당시 노래 비평 무크 <노래>는 “노래운동을 좀 더 포괄적인 민족민중문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이 무크지는 대중음악과 고급 음악을 비판합니다. 민중가요는 즉 “대중음악과 고급 음악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며 이에 대립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대중문화는 지배 문화다, 따라서 나쁘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기본적으로 ‘대중’과 ‘민중’,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 틀에 갇혀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인식 틀에서 대중문화는 늘 지배 형식이고 지배 구조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며, 민중문화는 대중문화 체계의 바깥에서 대중문화로 표상되는 지배 구조에 저항하는 문화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대중문화와 민중문화의 대립은 어느 한 편의 승리가 다른 한 편의 완전한 패배와 배제를 의미하는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지닌다. ‘대중문화는 지배 문화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나쁘다. 민중문화는 지배에 저항한다, 따라서 민중문화는 좋다.’ 문화를 논하는 논리는 결국 이렇게 단순화된다. 이 말은 결국 대중문화는 대중문화니까 나쁘고, 민중문화는 민중문화니까 좋다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동어반복이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다시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폭력적 억압과 온몸을 던지는 저항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1980년대의 현실적 조건에서 일정 부분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실제 군사정권의 파시스트적 통치 속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란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폭력적인 지배 구조에서 정치적 힘의 관계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대중’과 ‘민중’은 분리된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013년 서울 마포아트센터 공연 장면. 배경은 1987년 6월 19일 부산에서의 민주화 시위 장면이다. 빨간소금 제공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2013년 서울 마포아트센터 공연 장면. 배경은 1987년 6월 19일 부산에서의 민주화 시위 장면이다. 빨간소금 제공

대중음악을 두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라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대중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중음악에 담긴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되고, 결국 현재의 지배적 구조를 지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논리대로 대중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이를 수용한다면, 우리가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는 민중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민중가요 소비자도 대중문화 소비자

1980년대 저항 세력이 많은 사람이 술자리나 MT 현장에서 민중가요만큼이나 대중음악을 즐겨 불렀다는 점을 예로 들며 이같이 적었습니다. 김창남은 이분법의 시각을 넘어 민중가요를 대중음악의 일부로 새롭게 보려 합니다. “민중가요 역시 대중음악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김창남은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가 펴낸 <케임브리지 대중음악의 이해>에 나온 대중음악의 ‘테크놀로지’, ‘산업’, ‘(대중의) 소비를 통한 정체성의 정치’ 세 가지를 근거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민중가요는 불법 복제돼 팔렸는데, “서구의 저서 어디에도 대중음악이 단지 합법적인 음반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규정한 예는 없다”고 했습니다. 이분법이 성찰이 대상이 1980년대 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검열을 거친 합법 음반 형태로 시장에 나오기도 했죠.

두 번째 근거는 “노래운동의 조직적 전개 속에서 민중가요는 다양한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었다”는 점입니다. 1979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후 “불법 카세트테이프는 1980년대 내내 민중가요의 생산과 소비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로 기능”했죠. 김창남은 대학 서점 같은 운동권 네트워크를 통해 팔린 카세트테이프를 두고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 산업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민중가요 소비자들도 조용필이나 윤시내 같은 제도권 대중음악을 듣고 부르는 ‘기성의 대중문화 소비자’였습니다. 김창남은 “(민중가요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내는 수단으로는 민중가요를 채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1987년 8월 한 날 농성 중인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이 민중가요를 연주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7년 8월 한 날 농성 중인 현대중공업 노조원들이 민중가요를 연주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문학과 영화 속 흑인 여성들

어경희(미국 예일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조교수)는 ‘제3세계 연대체 퀴어링하기-1980년대 초 한국문학과 영화 속 흑인 여성들’을 썼습니다.

이 글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 문화에 재현된 여러 흑인 여성상이 이상주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반식민 제3세계 동맹이라는 개념의 많은 모순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민중 담론의 그늘에 숨겨졌던 다양한 초국가적 여성주의 및 퀴어적 욕망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근대 한국 문학과 영화에 등장하는 흑인들은 대부분 미국 흑인 남성 군인이었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흑인성에 대한 정치적·문화적 해석은 과잉 남성성이라는 젠더화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으로 상당히 왜곡되어 있었고, 흑인 남성이 곧 미국의 군사적 침략의 상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 반면 당시 흑인 여성은 훨씬 덜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흑인 여성성은 문화적 텍스트에서 일관성이나 뚜렷한 형태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었다.

주 분석 대상은 강석경의 1983년 단편소설 ‘낮과 꿈’입니다. “미국 흑인 여군 병사와 한국인 여성 성노동자 사이의 동성애적 관계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품 속 “흑인 여성은 미국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가부장제 폭력으로부터 한국 여성을 구하는 구세주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한국 여성과 다른 유색 인종 여성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교차적 억압 구조를 처음으로 다룬 문학작품”이다. 어경희는 이 소설의 “여성 동성애 관계는 동성애적 욕망의 재현이라기보다 유색 인종 여성들 사이의 연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말합니다.

퀴어한 흑인 여성성에 주목한 영화 ‘흑녀’

1982년 작  <흑녀> 포스터. 어경희는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난 영화라고 평가한다. 빨간소금 제공

1982년 작 <흑녀> 포스터. 어경희는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난 영화라고 평가한다. 빨간소금 제공

지금은 누군가를 지칭하거나 할 때 이런 제목의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만, 42년 전인 1982년 강대선이 내놓은 에로영화 제목은 <흑녀>입니다. 가수 인순이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인순이의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입니다. 영화 주인공 부모 배경 설정도 같습니다. 이경희는 이 영화 주인공의 “퀴어한 흑인 여성성”과 함께 “비규범적인 남성성 수행”에 주목합니다. 바로 주인공의 이런 속성이 “ 영화의 가부장적인 서사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에로티시즘적인 장면과 연결해 이같이 분석합니다.

1980년대의 에로영화를 연구한 이윤종은 이런 영화들의 에로티시즘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성적 절정에 다다른 여성들의 얼굴 표정을 전경에 배치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흑녀>는 그 장르적 규칙에서 벗어난다. 성적 긴장감이 높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여성 주인공 난이 아닌 남성들을 확대해서 비추는데, 난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경외감, 호기심, 황홀감에 빠진 표정을 초근접 촬영해 보여 준다. 난의 성적인 카리스마로 인해 남성성을 잃고 압도당한 것 같은 남자의 표정은 기묘한 힘의 역전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이는 평소에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담론에 가려진 한국인의 남성성과 인종적 타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측면을 드러낸다. 가부장적 사회질서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남성 권력이 인종적 타자를 만남으로써 위기를 맞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국적이고 피부색이 어두운 여성과의 성적인 접촉은 남성성을 거세당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인 남성의 권위는 민족국가의 자장 내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경희는 이 영화가 여성의 몸을 지나치게 성적으로 페티시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관습적인 이성애 중심적 가부장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습니다.

차범석 <열대어>를 각색한 영화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 장면. 빨간소금 제공

차범석 <열대어>를 각색한 영화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 장면. 빨간소금 제공

차범석의 <열대어>을 각색한 영화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도 분석 대상입니다. 주인공 진우의 미국인 부인 그로리아는 중국인 아버지와 아프리카계 포르투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순재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로리아역은 수잔 잭슨입니다. 포스터는 미국 TV 스타라고 했는데, 정보를 잘 찾을 순 없군요. 총격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방성자도 나옵니다.

이 책에 나온 줄거리(‘열대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대어>는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온 진우의 귀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중상류층인 그의 가족은 그와 함께 온 미국인 아내 그로리아를 보고 기겁한다. 그로리아는 진우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에게 인종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그로리아는 한국인 가족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그녀가 임신하면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시댁 식구들은 그녀에게 독극물을 먹여 강제로 낙태시키려고 모의까지 한다. 그로리아는 그 모의를 기적적으로 피하지만, 시댁 식구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에 크게 상처받고 신경 쇠약증에 걸려 결국 정신이 이상해지고 만다.

유색인종 여성에게 지고지순 여성상 투영하는 ‘진보적 남성 지식인들’

어경희는 당시 한국인의 인종차별주의적 시선 등을 살핍니다. 진우는 그로리아의 인종적 타자성을 포용하는 자신의 태도를 자유민주적인 서구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내면화한 증거로 여깁니다. 어경희는 “진우와 그로리아 관계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지배하는 남편과 순종하는 아내라는 가부장적 성역할에 의존한다”고 지적합니다.

배인철(1920~1947)이 1947년 발표한 ‘흑인녀’라는 제목의 시도 분석합니다. 시 한 단락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 네 아름다운 고향 산과 들/한번 백인의 노예선 찾아간 다음-/ 이제는 정다이 흐르는 나일강 저녁이 오면/ 바람속에 노래 부르면/ 아아 자연 그대로의 수목 같은 아가씨”.

“(배인철은) 한국인과 흑인을 식민주의적 소 인종적 탄압에 함께 맞서는 형제적인 관계로 여기는 관점”을 지녔다고 어경희는 봅니다. “연대 의식은 종종 매우 낭만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복잡한 역사와 정치에 대한 부족한 이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경희는 이 시가 “이후 수십 년간 한국문학에서 나타나는 제3세계 여성상을 예고한다”고 봤습니다.

1980년대 ‘진보적 남성 지식인’들이 “한국인 이주민이 미국식 인종주의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합니다.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인인 아이들이 겪는 인종차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여성상도 문제라고 봅니다.

백낙청이 흐무드 다르위시의 <팔레스타인에서 온 연인>에 관해 “식민지화된 조국을 팔레스타인 처녀에 비유한 점을 칭찬”한 점을 예로 듭니다.

한국 남성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다른 나라의 이런 가부장적/민족주의적 텍스트 속 유색 인종 여성에게 제3세계 반식민지 투사의 남성성 회복을 돕는 지고지순한 여성상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안정효나 이상문 같은 남성 작가들이 베트남 여성과의 연애 이야기를 썼습니다. 어경희는 이들 작품 속 여성 인물의 주요한 기능은 한국과 제3세계 사이의 동맹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경희는 “그러나 궁극적으로 타국의 유색 인종 여성을 거부하는 민족국가”에서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이성애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경직성과 인종적 타자에 대해 우월하다고 믿는 한국의 하위제국주의적 면모”라고 했습니다.

에로 방화에 담긴 여성 우호적 경향

‘에로 방화’와 ‘민중’이 무슨 관계일까요. 이윤종(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전임연구원)은 ‘진보와 퇴행 사이 역진하는 영화, 에로 방화’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봅니다.

1980년대 한국 에로 영화 장르는 “‘영화 산업의 건강한 사회의식에 대한 음모’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한국 영화의 병폐’라 일축됐다”고 말합니다. 1980년대의 1세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근원적으로 여성에 대한 한국 남성이 성적·정치적 지배를 이념적으로 영속시키는 성 착취적 기획물”로 봤지요.

이윤종은 “여성 우호적 경향”이라는 ‘진보’의 측면에 주목합니다. “에로 방화 속의 여성들은 영상적·서사적으로 복잡한 존재들인 경우”가 많고, “서사와 응시의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 주체가 되기도 한” 점을 꼽습니다. 여성들도 호응했습니다. <애마부인> 등 영화 구매자 중 다수가 중년의 가정주부였다는 점을 듭니다.

이두용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하명중의 <땡볕>(1984), 임권택의 <씨받이>(1986) 등 ‘에로 사극’은 “전근대 조선의 가부장적 신분제 아래서 억압받는 한국 여성”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에로 사극으로, 전근대 조선의 가부장적 신분제 아래서 억압받는 한국 여성을 다양하게 그렸다. 따라서 나는 에로방화가 민중영화와 대척점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로 방화의 여주인공들이 체제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한국인, 즉 민중을 상징적으로 구현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영화들은 친민중적 메시지를 영화인의 장인 정신 속에 녹여 내 한국인에 대한 예술적 민족지학의 기능을 한 것이다.

<무릎과 무릎 사이>(1984)는 반미주의적 감성을, <어우동>(1985)은 반권위주의적 감성을 반영한 에로 방화의 예로 듭니다. 또 “거의 모든 에로 방화가 부와 명성을 좇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남성 캐릭터를 회의적으로 그린다. 민중 담론의 반자본주의적 취지에 일부 동조하는 에로방화의 이러한 비판적 기능을 저항발전주의라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 <색깔 있는 남자>(1985), <매춘>(1988) 등을 두고는 “에로방화의 또 다른 공통 주제인 여성이 감행하도록 강요받았던 희생에 대한 복수 또는 대항발전주의적 메시지를 구현하고 확장”한 것으로 봅니다.

. <깊고 푸른 밤>(1986)과 <밤의 열기 속으로>(1985) 등은 ”지배층의 도덕적 부패, 성 노동과 군사 노동의 죽음정치적 특성, 가정주부화된 여성 노동의 착취’ 미국의 한국에 대한 과도한 군사적·경제적 지배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종종 젠더적 관점으로 조명했다“고 말합니다.

이윤종은 퇴행적 차원도 짚습니다.

에로 민중영화나 민족주의 영화는 여성 신체를 알레고리로 활용하는데, 여성의 정조가 한국의 인종적 순혈성 혹은 민족, 민중의 결백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즉 영화 속 여성의 수난을 통해 압축 근대화가 일으킨 한국의 민족적 문화적 위기를 보여줬다.
예를 들어 <깊고 푸른 밤>과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는 외국인 남성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서구화 과정에서 잃어버린 문화정치적 정체성을 민족적 알레고리로 표현하기도 했다. 에로 사극에서는 전근대 사회 여성이 당대의 백성이나 현대 민중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는 하는데, 이는 전통적 가부장제의 젠더적 폭력을 왕조 체제하의 신분적 차별에 대한 장르적 비판으로 희석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한국 여성 전체를 민중으로 환원시키는 이러한 남성주의적 재현에서는 여성의 다양한 욕망, 생각, 고민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반영되지 않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떠올리게 하는 ‘기계전사 109’

<기계전사 109>의 한 장면. 빨간소금 제공

<기계전사 109>의 한 장면. 빨간소금 제공

박선영은 ‘호혜의 시너지 1980년대 한국 SF 와 민주화운동’에서 김준범의 만화 <기계전사 109>(1989)를 분석한다. ”인간의 뇌를 가진 사이보그 셰르(Cher)가 당당하게 서서 사이보그해방전선의 깃발을 휘두르는 장면“ 즉 ”인간 주인의 억압에 대항해 시위“를 벌이는 장면 등에 주목한다. 사이보그의 저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그 이 작품이 날카로운 계급의식을 드러낸다고 봤습니다.

<기계전사 109>는 정부에 의해 벌어진 광주 학살을 참조한 듯하다. 희생적인 여자 주인공 셰르는 ”해방전선의 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광주항쟁 당시 전옥주가 시민들에게 저항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 이후 “광주의 목소리”로 알려진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기계전사 109)에 등장한 사이보그들의 감옥 안 봉기 에피소드는 삼청교육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상시킨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8월에서 1981년 1월까지 운영된 강제 수용 시설로 전두환 정권의 폭력 남용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타워에 올라간 사이보그의 투신과 이어진 장례식은 1980년대 시위자들의 자살과 그들을 기리는 장례 행렬을 연상시킨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던 역사적 시기에, 노진수가 줄거리를 짜고 김준범이 작화를 맡았던〈기계전사 109〉는 할리우드의 환상적 표현 양식을 사용해서 민주화를 위한 당대의 투쟁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

대중문화 장르인 SF와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간의 관계도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았던 주제입니다. 박선영은 SF 소설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1987)를 중심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1980년대 한국의 SF를 서구, 특히 영미권의 장르를 적극적으로 재전유함과 동시에 현지의 문화 전통과 조건에 따라 자생한 창작물”로 봅니다. “문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거의 존중받지 못했던 SF 장르에 중대성과 절박함을 부여한 건 당시의 치열한 정치적 사회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1980년대에 대한 사회적 기억: 불연속 체제의 해부(이남희), 목적론을 부르는 시대: 역사 서술로 본 1980년대(황경문), 반제국주의적 초근대로서의 1980년대(김재용), 냉전 말 정치 여행: 오스트레일리아와 남·북한의 국제 학생 교류(루스 배러클러프), 민중미술의 해외 전시: 냉전의 끝 무렵 도쿄, 뉴욕, 그리고 평양으로(이솔), 그 많던 ‘외치는 돌멩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1980-90년대 노동자문학회와 노동자 문학(천정환), 1980년대 남한에서 여성해방문학의 탄생과 의미’(이혜령)도 실었습니다.

[책에서 건진 문단]‘유색인종여성 연대 동성애소설’부터 ‘가부장제 억압 에로방화’, ‘5·18저항 SF만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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