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922년 10월1일 경성의 장곡천 공회당에서 경성상공회 주최로 조선식량품 품평회가 개최되었다. 매일신보 당일자 신문에서는 ‘물가조절문제가 고조된 작금 식량품평회 개최’라는 제목을 붙여 이 내용을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값싸고 간이한 생활을 하려거던 반드시 한번 구경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품평회 관람은 일반인에게도 필요하지만 부인에 대해서는 가장 간절하다고 썼다. 식량이니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 된 전시회였다. 전시장은 일본·조선·중국·서양으로 나누어졌고, 심사위원에 의한 품평회도 진행되었다.

“조선요리는 식도원에서 출품하야 매일 가러 놓으며 군대요리는 군대에서 하며 기차벤또는 회기 중 전 조선의 것을 출품하여 공중 심사에 붙이며 학생벤또는 매일 가러서 회에서 출품하여 영양되는 요리는 동경영양연구소 발표에 헌림에 의하나 경성 제일고등여학교에서 매일 가러서 출품하는 바이는 하루 이천오백 가오리(칼로리)의 영양을 섭취하는 값싼 것을 헌림한다.”

이 품평회에서는 심사를 거쳐서 모두 271명의 수상자를 선정하였다. 그중에서 우수상은 20명, 1등상은 37명, 2등상은 65명, 3등상은 149명이 받았다.

명란젓 무침

명란젓 무침

불행하게도 우수상은 모두 일본인이 운영하는 업체로 돌아갔다. 하지만 1등상에는 조선인 수상자가 한 사람과 한 업체가 있었다. 그 사람은 조선소주를 출품한 고양의 신태영이었고, 한 업체는 조선과자를 출품한 경성의 식도원이었다. 앞의 매일신보 기사에 나오듯이 식도원은 그들이 다루는 조선음식을 모두 출품한 듯하다. 왜냐하면 토장과 명란으로 3등상도 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3등상의 수상자는 식도원이 아니라 안순환으로 나온다. 20세기 최초의 조선요리옥인 명월관 주인 안순환(1871~1942)이 바로 그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한 후 민봉호라는 인물에게 명월관 광화문 본점과 인사동 지점을 팔았다. 그 후 1921년쯤 안순환은 남대문 근처 지금의 중앙우체국 북쪽 길에 식도원이란 조선요리옥을 차렸다. 그러니 안순환의 이름으로 3등상을 받은 토장과 명란은 식도원에서 출품한 작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토장은 순창의 김영무와 함께 상을 받았다. 이에 비해 명란만은 안순환 혼자 수상자가 되었다. 따라서 명란은 식도원에서 요리상에 올랐던 음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1922년 10월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식량품평회 사진.

1922년 10월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선식량품평회 사진.

명란이란 모두 알다시피 명란젓을 가리킨다. 북어의 알을 명란이라 부르고, 그것으로 젓갈을 담근 것을 명란젓이라 부른다.

이규경((1788~1856)은 <오주연문장전산고·북어변증설>에서 19세기 초반 북어의 사정을 자세히 들려준다. “우리나라 동북해 중에 있는 생선이다. 생김이 좁고 길어 한 척 정도이다. 입이 크고 비늘이 거의 없다. 묽은 검붉은 색이다. 머리에는 호박처럼 타원형의 뼈가 있다. 배에는 알이 있는데, 작고 가늘면서 차지다. 또 살은 양의 기름이나 돼지의 등심고기와 비슷하다. 그래서 고지미(膏脂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이름은 북어(北魚)이고, 민간에서는 명태(明太)라고 부른다. 봄에 잡히는 것은 춘태(春太)라고 일컫고, 겨울에 잡는 것은 동태(凍太)라고 일컫는다. 동짓달에 시장에 나오는 것은 동명태(凍明太)라고 부른다. 젓갈로 담근 난해(卵해)는 명란이라 일컫는다. 생것의 고기는 질이 거칠지만 맛은 담박하다. 말리면 포가 된다. 한군데 몰려 있어 한 마리를 잡으면 수십마리가 따라와서 사방이 가득 찬다. 매일같이 밥반찬으로 쓰인다. 여항의 가난한 백성들은 신령에게 제사를 모실 때 말린 것으로 중요한 제수로 삼는다.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도 제사 때 올려야 하는 각종 고기 제물을 이것으로 대신한다. 그러니 값은 싼데 비해 귀하게 쓰인다. 단지 먹을 줄 알 뿐 그 이름을 모르니 과연 옳겠는가!”

이로 미루어 북어는 19세기 때 한반도에서 가장 널리 식용된 생선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명란이 널리 퍼진 것은 아니었다. 숭어·연어·민어 따위의 알을 알 주머니째 따로 빼내어 소금에 절여 햇볕에 반쯤 말린 음식인 어란은 장기간 상온에서 보관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명란은 알집이 단단하지 않아 단지 소금에 절여 삭힐 뿐이다. 겨울이 아니면 상온에서 쉽게 썩어버리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겨울에만 함경도에서 남쪽의 한반도로 유통되었다. 1909년 일 년 동안 함경도로부터 부산으로 720원어치의 명란이 유입(황성신문 1910년 1월29일자)된 때도 주로 겨울이었다.

1934년판 방신영의 <일일활용조선요리제법>에서도 ‘명란젓’이라고 적고, “겨울에 먹는 것이니 북어알로 만든 것이라 날로도 먹고 쪄서도 먹나니 (중략) 생으로 먹는 것은 명란을 도마에 놓고 잘 드는 칼로 오푼 길이로 잘러서-다른 것을 써는 것과 같이 썰지 말고 칼로 툭툭 처서 잘르라-접시에 담아 놓고 움파를 한 치 길이로 잘러서 채쳐서 접시 한옆에 것들여 놓고 초를 조금 쳐서 상에 놓는 것이니라”고 했다. 그런데 먼저 출판된 1921년판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이 명란젓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아마도 1910년대 초반만 해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란젓을 경성 사람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1914년 9월16일 경성과 원산 사이에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명란의 유통은 그 이전 원산과 부산 사이를 오갔던 배만큼 가까워졌다. 그래서 예의 조선식량품 품평회에서 안순환이 새로운 요리로 명란을 출품할 수 있었다.

명란젓 찌개

명란젓 찌개

명란젓 조리법은 1924년에 출판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비로소 언급되었다. “명난젓(明卵해): 명난젓은 찌개를 하든지 날로 먹는데 움파나 것드려 먹으면 보통 시려(싫어)하는 사람이 업나니. 이 젓은 정월이 지나면 먹기를 덜 하나니라. 이 젓이 원악(워낙) 흔하야 만히 먹으나 맛은 별맛 업나니라”고 할 정도로 1920년대에 겨울 별미로 경성 사람들의 입맛을 돋웠다.

원산선 철로의 완공과 함께 시작된 원산과 청진을 잇는 함경선이 점차 북으로 이어지면서 명란은 경성에서 발행되는 신문 기사에 그 이름이 속속 등장한다. 원산을 비롯하여 함경도의 주요 어항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북어를 매우 즐겨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발동선으로 싹쓸이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조선인 어부들은 걸그물이라 불리는 자망으로 명태를 잡았다. 옆으로 기다란 사각형의 그물을 명태 어군이 지나는 통로에 수직으로 펼쳐서 그물코에 꽂히게 하여 잡는 방법인 이 자망어법은 발동선을 이용한 수조망 어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수조망 어법은 그물로 명태 어군을 뺑 둘러가지고 그 구역 내의 명태를 휩쓸어 잡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발동선과 수조망은 북어 잡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가령 1930년 함경남도의 어항에서 가동되었던 발동선은 모두 24척이었지만, 그중 21척이 일본인 소유였다. 가장 큰 문제는 북어의 치어마저도 모두 잡아버리는 일본인 소유의 발동선에 있었다. 결국 1920년대 말부터 함경도의 주요 어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어민들이 이 문제를 여론화시켰다. 1930년 3월4일자 동아일보에서는 ‘함남의 명태어’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심지어 같은 신문 1931년 3월8일자에서는 함남의 중부 해안에 위치하는 홍원군 유지들이 ‘밀어발동선횡행’ 문제를 지방여론으로 당국에 청하는 기사까지 게재될 정도였다.

두부 명란조림

두부 명란조림

특히 명란의 개량 문제는 심각하였다. 이미 일본인에 의해서 북어의 가공은 물론이고 명란마저도 통조림으로 가공되어 일본열도는 물론이고 타이완과 만주로 수출될 정도로 성업을 이루자 조선인 무역상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좌담회에 참석한 대무역상 정종성은 “명란에 있어서는 그것이 수출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4~5년 전의 일인데 대개 일본과 대만에서 많이 수요합니다. 이것도 외인의 가공품보다는 품질이 양호치 못하야 판매가격에 있어서 조선 사람의 조제 명란은 약 2할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대상으로 보아서는 우리는 가공품제조에 대해야 장소와 기후가 매우 적당하야 썩 발전될 여지가 만타고 생각합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1920~30년대 홍원군의 삼호는 전국에서 명태 어획량이 가장 많은 어항이었다. 1933년 8월25일에 ‘삼호마루보시(대표:지표준)’라는 운송점 주최로 명태자(明太子) 곧 명란 문제 협의회를 결성하여 면장 등 유지들과 어민들이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조선운송주식회사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명란 운임을 인하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결의하였다. 동시에 명란 제조를 개량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했다. 자세한 개량방법이 나오지 않지만, 명란을 씻어 물기를 뺀 다음에 소금에 절이고 고춧가루를 곁에 바르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오늘날 일본인들은 명란을 가라시멘타이코(辛子明太子)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가라시는 고추를 가리킨다. 명란의 덩어리 곁에 고춧가루를 발랐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러한 명란 조리법은 19세기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1908년에 후쿠시마 출신 히구치 이쓰하(1872~1956)가 부산에서 명란 제조를 하여 시모노세키로 보냈는데, 그 역시 이러한 제조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해방 이전까지 부산 소재 히구치의 상점은 상당히 번창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열도에서 가라시멘타이코는 후쿠오카의 하카타가 명산지로 유명하다. 하카타 명란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가와하라 도시오(1913~1980)가 1949년 1월10일부터 하카타에서 ‘맛있는 명란(味の明太子)’이란 상표로 판매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마도 식민지 시기부터 부산과 후쿠오카 사이의 인적 교류가 한국어 명태의 일본식 표현인 ‘멘타이’를 유지시킨 힘이었다. ‘맛있는 명란’은 1970년대 중반 이후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일본열도 전체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니 오늘날 많은 일본인들은 명란젓을 자신들의 오래된 음식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19) 명란

오늘날 한국에서 명란은 ‘워낙 흔하다’고 했던 이용기가 살았던 1920년대 초반과는 사정이 너무나 다르다. 남북 분단은 함경도의 명란을 더 이상 월남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모습을 보였던 고성 앞바다의 북어도 1990년대 이후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더 북쪽으로 이동해버렸다. 결국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값비싼 명란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가져온다. 이규경이 밝혔던 바와 반대로 이제 북어나 명란이나 값은 비싸고 맛보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 모두 인간의 욕심이 가져온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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